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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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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과 만나다.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유홍준 지음, 눌와, 2013. 11.

 


 

십대 시절, 용돈의 십 할을 책 구입에 사용했다. 밥벌이를 시작한 이후에도 책을 사서 모으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권의 책을 다시 읽을 여유 없이 새 책이 쌓여갔다. 책을 살 때는 분명 다시 이 책을 펼쳐들 날이 여러 번 있으리라는 기대했지만, 언제나 눈은 신간에 꽂혔다. 책을 끌어 모으는 것은 지적 허영의 한 측면이기도 했지만, 작가의 지적 생산에 대한 독자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단돈 만원에 일기장을 공개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다보면 책값이란 세속적인 계산에 의해서 합리적일 뿐, 그 가치는 누구도 매길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책’이라는 물화(物化)된 지성에 대한 경도되었던 한 시절의 소회다.

 

책에 대한 사랑이 유난했던 그 시절 ‘유홍준’ 선생님은 인기 없던 우리의 관공서 ‘문화재’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친근한 해설을 곁들여 주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학술적인 저술을 대중을 위한 글쓰기로 형식을 바뀌면서 천상(!!)의 미학에 머물던 한국의 미술품이 지상에 발을 디뎠고 답사여행이 순식간에 파급되었다. 나 또한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끼고 남도를 여행하는 학생 중 한명이었다. 정약용의 유배지를 서성였고, 해남, 강진 남도 답사 일번지에서 나와 비슷한 여행자들을 여럿 만나기도 하면서 선생님의 글쓰기 속도를 터덕거리며 따라갔다. 점점 발이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 읽고 보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선생님의 저서를 읽다 보면 생각이 멈추고 망연해지는 순간만큼은 여전하다.

 

유홍준 선생님은 작품과 나 사이의 거대한 창문이다. 유일하게 언어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나와 같은 고전 작품 문외한들에게 유홍준 선생님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망원경이자 현미경이다. 이번 저서에게 선생님은 - 작품의 기본 정보를 제공하여 -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지만, 이미 작품 선택 자체가 개입인지라,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늘 그의 작품 보는 법을 모방하였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작품 보는 안목에 기대어 감상할 수밖에 없다.

 

그가 취사선택한 옛 그림과 글씨 49점, 그에 곁들여지는 100여점의 도판은 사람과 작품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명작순례』는 작품보다 작가의 삶에 더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작가의 삶과 작품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풍죽도>를 통해서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신을 표현한 것 같은 탄은 이정의, “능숙한 필치와 간일한 묘사로 재료상의 제약을 모두 극복(68쪽)”한 겸재 정선, 함께 어울릴 벗이 없이 고독했기 때문에 그림이 관념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현재 심사정, 그중에서도 능호관 이인상이 <수하한담도>에 그림을 그린 연유를 써 넣은 것에서 작품 너머의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내 친구 임매는 내 그림을 애써 받고도 그의 너그러운 성품 때문에 다른 이가 가져가도 상관하지 않아 내 그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이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임매가 내 소심함을 비웃을 것을 무릅쓰고 이를 (임매에게 주는 그림이라고) 쓴다.(79쪽)” 진심을 전하면서 유머를 잃지 않는 능호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표암 강세황이 자화상에 쓴 찬문의 유머 감각은 요즘 대세인 드라마 <별에서 온 남자>의 천송이에 버금간다.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들만하지만 / 세상 사람들이야 어찌 알리오, 나 혼자 즐기는 것임을”이라는 글 속에서 유머가 차고 넘쳤을 강세황이 현현하는 느낌이다. 그런 성품을 지녔기에 제자 단원과의 망년지우(忘年之友)가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단원과 사귄 것은 전후하여 모두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단원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지도 했다. 중간에는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쳐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知己)다운 느낌을 가졌다.(101쪽)”고 한다.

 

모든 작품의 사연도 각별하고 훌륭하지만, 평소 좋아했던 화가에 더 오래 머물고 집중했다. 이때부터는 저자를 벗어난 읽는 자들 각자의 독법이 가능해진다. 아는 만큼 보이니 어쩔 수 없다. 대책 없이 돌출한 <취화선>의 오원 장승업이 매력적이고, 고국과 고향을 떠나 실향민의 심정으로 점을 찍는 김환기의 삶에서는 목울대가 뻐근해져서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기를 여러 번 했다. 예술의 용법과 용도는 다양하지만, 예술은 유한한 삶속에서 무한한 꿈을 꾸는 자들의 사유에 물질성이 부여된 것이기도 하다. 김환기의 삶과 작품이 그러하다. 오래전 내가 가르쳤던 제자의 이름이 ‘김환기’였다. 화가였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이름이었는데,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화가의 이름을 자식에게 붙여준 (뵌 적도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져서 그 아이 이름을 부를 때는 남다른 감흥에 젖기도 했다. 모더니스트 김환기의 우수에 찬 작품이 선연하다. 다산 정약용의 삶에 대해서도 새삼 다시 곱씹어 생각한다. “다산에게 유배란 강요된 안식년”이라는 의견에 대한 유홍준 선생님의 재해석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18년 귀양살이에는 비록 ‘강요된’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해도 감히 ‘안식년’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237쪽)”는 말씀에서 어떤 표현은 누군가를 향한 폭력이라는 생각에 한참 머물러야 했다.

 

“세상엔 한석봉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추사를 아는 사람도 없다.(221쪽)” 여전히 우리는 아는 만큼 볼 것이며 사랑할 것이다. 남과 다르게 보고 해석하며 관계 맺을 것이다. 앞서 깨달은 분들에 기대어 앎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낮은 지평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남자>의 도민수처럼 오백년을 사는 외계인이 아니고, 영화 <어바웃 타임>처럼 타임슬립할 수 없다면, 우리가 온전히 기댈 곳은 책을 통한 시간 여행이다.

 

다음 주에 이사를 해야 하는 내가 포기한 물건은 결국 책이다. 서재를 지금 사는 집에 그대로 두고 가기로 결정하면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책꽂이를 잘 찍어서 새집 벽에 걸어야겠다는 것이다. 서가 사진이라도 있어야만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여가가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림 ‘책가도’를 보면서 옛사람들도 나와 같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 보다. “정조는 화공에게 명하여 책가도를 그리게 하여 자리 뒤에 붙여두시고 업무가 복잡하여 여가가 없을 때는 이 그림을 보며 마음을 책과 노닐게 했다.(266쪽)”고 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사랑한다. 나쁜 책도 도움이 되었다는 막심 고리끼처럼 한시절은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작순례』를 읽으면서 일상이 고고해지는 느낌이다. 예술작품을 보고 읽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번 생의 시간 여행은 이것으로 대신해야한다. 내 삶을 예술로 가꾸는 과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세네카, 푸코처럼 주체의 윤리로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야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2013)은 시간이 되돌릴 수 있는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는다. 타임 슬립 없이도 충분한 행복을 누렸을 것 같은 현명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묻는다. “그 능력으로 얻는 남보다 많은 시간 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했느냐?”고. 영문학 교수인 아버지는 남들이 세익스피어를 한번 읽을 때 나는 여러 번 읽을 수 있었다는 것으로 답한다. 재산을 탐하지도 않았고, 세상의 이치를 깨트리지도 않으면서 시간이 줄 수 있는 최고를 누렸던 것이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2075

 

고교 동창 P는 “음악을 귀에 걸고 사는” 아이였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면서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고, 우여곡절 끝에 S대학교에 입학했다. 대기업 직원이 된 그 아이가 여자 친구에게 했던 말, “한 달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영화 보고, 책 읽고, 음악 듣고, 여행하고 싶다.”였다.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자의 - 투정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 지금 뇌졸중으로 쓰러져 뇌수술을 세 번 받고 투병중이다. 새털 같은 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참 많다. 오늘의 행복은 오늘의 몫이다. 그 친구가 꿈꾸었던 시간을 이번 생에서 반드시, 여러 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 체리 향기 같은 시간이 그에게 허락될 것을 믿는다. 나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명작순례』를 다시 펼쳐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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