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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포머 진중권이 제공한 튼실한 사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현대 미술사
미적 가상의 영역을 아예 벗어나 사물의 영역으로 진입한 현대 미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2013. 4.
미학이 세상에 내려와 대중과 소통할 수 있게 한 단초에는 ‘진. 중 .권’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십 수 년 동안 많은 독자들이 『미학 오딧세이』시리즈를 통해서 미학에 입문했다. 번역서 일색이던 미학 서적들 사이에서 진중권의 글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어법으로 난삽한 미술사의 세계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헨델과 그레텔의 돌멩이처럼 이정표가 되어 주었던 그의 글은 변증법적으로도 명료한 논리를 갖추었다. 글을 쓸 때마다 매번 소리 내어 읽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접한 이후에 왜 진중권의 글이 - 난해한 미학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 쉽게 읽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림을 보듯 거리를 두고 진중권의 글을 보다 보면 하나의 문단 문단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족 : 학생들의 논술 글쓰기 지도에 더없이 좋은 전례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4월에 출판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은 2008년 출판된 『고전 예술 편』, 2011년 『모더니즘 편』에 이은 세 번째 책으로 서양미술사의 완결판에 해당한다. 짐작하겠지만, 책 세권에 서양미술사 전체를 담는다는 것은 아무리 해박한 미학자라 할지라도 ‘과욕’이었을 것이다. (이는 진중권이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단 난해한 서양미술사의 골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나처럼 낯선 미학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책이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선언문’을 통해서 미적 가치를 담보했던 예술은 평론을 통해서 인정 투쟁을 벌인다. 무수한 작품 속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한 것은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평론가들의 몫이었다. 작품은 본연의 미적 가치로 평가되는 ‘작품’이 아니라,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사물’이 되었다. 고전과 근대에 비하면 더욱 복잡해지고 다채로워진 현대 미술의 족보를 세우고 지형도를 그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 책을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복잡해진 현대 철학의 언어는 그대로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연장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면 같은 지점에서 반복하는 악몽만 꾸다가 책을 덮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는 문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미국 주도 속에서 예술은 ‘탈정치화’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된다.’는 포스트 모던이 자리 잡으면서 예술가의 실존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것(18쪽)이 된다. “현대적임을 과시하면 등장한 추상 표현주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대립각을 세운다. “교훈적인 예술에 대한 반발, 예술을 위한 예술, 무기로서의 예술에 대한 대극으로 발생한 비정치적 예술이 주요한 정치적 무기가 된 것이야말로 추상표현주의의 가장 비극적인 역설일 것이다.(21쪽)”
과거와의 연속선상에서 추상표현주의를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위치시켰던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달리, 회화는 이제 단순히 회화이기를 거부한다. 미국의 회화는 “순수성과 평면성을 향하는 미적 가상의 영역을 아예 벗어나 사물의 영역으로 진입하다. 환영주의를 떨쳐버리려면, 회화가 미적 가상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체가 사물이 되는 수밖에 없기 때문(24쪽)”에 형식주의 비평을 넘어 서게 된다. 사물성의 회화는 연극처럼 현전하고, 관객의 참여가 요구되면서 회화의 공간성은 시간성을 획득한다. 단선적인 진보를 전제한 모더니즘의 종언에 따라서 회화에서 역사성이 사라진다. 정치적 연대를 표명한 예술이 사라지면서, ‘미학적 위반’이 ‘예술의 규칙’이 되었다. 대중문화는 고급예술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고, 팝 아트가 오히려 체제 순응적이라는 역설이 발생했다. 반면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에 지친 대중은 복고적인 재현의 방식을 환영하기도 한다.
잭슨 폴록의 드립 페인팅과 더불어 시작된 후기 모더니즘에서 형체와 배경은 제각각으로 해체된다. 형체에서 물질로 환원하는 것은 (저자는 과잉 해석이라고 언급했으나) 폴록의 죽음 충동이라는 무의식의 표상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했다 사라지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이제 후기 모던의 준거가 되었다. 유럽 또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짝패로 ‘앵포르멜’이 등장한다. 이는 “조형의 원점으로 돌아가 물질에 잠재한 형상의 가능성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전후 모더니즘을 이어간 것은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이다. 폴록 보다 훨씬 평면적이었으나, “숭고의 체험”을 주제로 내포했다. 1960년대에는 추상표현주의의 대안으로 팝아트가 등장한다. 그림으로 벽에 걸리는 것을 거부한 회화는 이제 퍼포먼스의 형태로 관객 참여를 유도한다. 미셸 푸코가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듯, 이제 예술 작품에서 작가가 사라진다. 또 모더니즘과 대립되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개념 미술이 등장한다. 이제 회화는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잡지에 기고“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의 작업실이 공장(factory)이기를 바랬던 앤디 워홀(영화 <팩토리 걸>을 보면 예술가 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앤디 워홀을 엿볼 수 있다.)은 예술의 독창성에 문제 제기한다. 반면 전후의 유일한 혁명적인 아방가르드로 상황주의가 등장한다. 해프닝과 다다이즘, 복고적인 형태의 신표현주의까지 후기 모더니즘은 방대하고 난삽한 길을 가고 있다.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경계에서
후기 모더니즘이 근대와의 연속인가, 단절인가의 논쟁 속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네가 본 것은 네가 본 것이다.”는 명제가 새삼 화두로 떠오른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이 다채로운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참조해야 하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단 저자의 주관적인 평가는 적고, 지극히 사실과 예술가 각자의 주장으로 가득 차 있으니, 저자의 특허가 되어 있는 ‘독설’은 기대하지 마시길.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트랜스 포머 ‘진중권’이지만, 그는 역시 미학자일 때 가장 숭고한 재능을 발산한다. 사회적 쟁점의 태풍의 눈에 위치해서 구경꾼조차 피로할 정도의 논쟁을 해나가거나, 케이블 채널의 오락 프로에 깜짝 등장해서 시뮬라시옹 진중권인지 시뮬라르크 진중권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 만큼 방대한 활동량을 자랑하는 에너자이저지만, 역시 그는 최첨단의 사이버 미학까지 섭렵한 현재와 미래를 수렴해나가는 진정한 미학자다. 저자 서문에 “지붕에 올라갔거든 (진중권의) 이 사다리를 치워버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붕위에서도 진중권이라는 사다리를 치울 생각이 없다. 아직은 그를 통해서 미학을 관망하는 태연한, 맹목적인 독자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