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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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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정체(正體)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아를 모방하는 삶, 플라톤의 『『Politeia 국가』

천병희 역, 숲, 2013. 2.

 

플라톤의 4주덕을 공부하던 고등학교 윤리 수업의 시작으로 해서, 정치 사상사를 배우던 스무 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비교하는 에세이를 쓰던 시절까지 거치다보니 『국가』를 읽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천병희 역의 『Politeia』를 읽고 보니, 오랜 시간 다이제스트만을 읽었을 뿐 원전을 접하지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기시감과 같은 친숙함이 느껴지지만, 읽은 이가 드문 책이 바로 플라톤의 『국가』이다. 고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절대 읽지 않은 책”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나는 지점이다.

 

철학과 등 돌리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플라톤의 동굴과 그림자, 이데아, 철인정치, 지혜·용기·절제·정의의 4주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28세의 플라톤은 민주주의자들에 의한 스승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중우정치와 다수결의 한계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도 군주정이 민주정보다 더 발전된 정체(正體)였다. 각 시대의 상황에서 요청되는 정치 형태가 다르다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정체는 일관된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와 철학자를 떼어내어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플라톤을 논할 수 없다. 플라톤 철학은 BC 400년경의 아테네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상 국가를 꿈꾸었던 플라톤의 『국가』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 시켜서 스승의 견해를 제시하고 자신의 부연을 덧붙이기도 하며, 이데아와 같은 자신만의 철학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책에 관한 대부분의 리뷰들이 언급하듯이 원전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읽기 좋은 우리말로 해석한 역자 천병희 선생님의 공이 큰 책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국가』는 4주덕(主德)을 세세하게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지혜로운 것은 최소한의 치자 집단의 지식 덕분이다. 본성상 가장 적을 수밖에 없는 그들만이 유일하게 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 “용기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지 법이 승인한 소신을 어떤 경우에도 보전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그대로 보여준다.) “절제는 일종의 질서이며, 특정 쾌락과 욕구의 억제다. 자신의 주인이 절제를 암시한다. 국가 탐구의 목적인 정의는 “앞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자체 때문에도 그 결과 때문에도 좋아해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부류”에 속한다.(87쪽)

 

 

왜 철인정치여야 하는가?

 

“수호자들에게 못난 자식이 태어나면 다른 계급으로 강등해야 하고, 다른 계급들에서 탁월한 자식이 태어나면 수호자 계급으로 승진시켜야 한다. 그런 말을 한 의도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 적성에 맞는 한 가지 일에 전념해야만 개인은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 되고, 나라는 여러 나라가 아닌 한 나라가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216쪽)

 

“만약 수호자들이 잘 교육받아 분별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한 이 모든 것은 물론이요, 그에 더하여 아내의 소유, 결혼, 출산 등 우리가 방금 빠뜨린 것들도 쉽게 꿰뚫어볼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친구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ss 속담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216쪽)

 

모방적인 시(詩)는 왜 이상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하는가?

 

플라톤은 급진적인 개혁을 거부하고 가능한 한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詩)가 갖는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경계했다. 음악 양식의 변화가 정치적인 변혁을 수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가 거짓된 진리를 전하고, 인간의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매혹하며, 저급한 시민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여전히 수용하기 어려운 플라톤의 이분법적 세계관 

 

21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나에게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그 한계를 간과하여 읽는 일이 쉽지 않다. 플라톤의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적 담론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각기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할 때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는 플라톤의 견해를 그대로 우리 삶으로 가져 온다면 누군가는 심장과 머리의 역할을 하고, 누군가는 손과 발이 되어 일을 해야 한다. 그 근거가 타고난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백번 양보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크기를 넓게 만든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어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또한 자신의 지력을 사용하고 삶을 기획하는 주체로서 살아야 할 ‘자격’을 갖춘 이가 따로 있고, 그들이 극소수의 철학자라는 부분에도 동의할 수 없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분법적인 세상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토대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일단 좋은 정체가 산뜻하게 출발하면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좋은 양육과 교육 체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좋은 성격이 태어나고, 좋은 성격들이 좋은 교육을 받으면 더 낳은 자식을 낳는다.”(216쪽) 그러한 선순환이 노예와 여성에게는 악순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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