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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첫, 사랑의 화인이 마음 깊은 곳에 아프게 새겨졌던 오래전 그 밤, 더 이상 과거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랑은 마주침이었고, 실연은 감당키 어려운 낯선 감정이었다. 사랑은 존재를 바꾸는 몸부림이었다. 다시는 사랑 이전의 내가 될 수 없는 변혁이었다.

 

사랑이 부재한 자리에 ‘책’이 자리를 잡았다. 시공을 초월해서 마주쳤던 저자의 사상(思想)을 빠져나오는 순간,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는 ‘나’와 마주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신의 세계로 빠져 들듯,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스물에 해독 불능의 암호 같은 마르크스의 원전과 해설서를 넘나들던 혼돈의 겨울밤이 있었다. 사회생활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혼란의 시대에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발견한 자기배려의 윤리로 내 삶을 지켜냈다. 주체적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던 오만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통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일상을 의심하고, 반추하며 미시권력에 포섭되어 있는 종속된 자신을 도처에서 발견했던 시절이었다.

 

수줍게 ‘성장’이라고 여겼던 그 감정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사사키 아타루는 ‘혁명’이라고 말한다. 현대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인 사사키는 루터, 무함마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 등 수많은 개혁가와 문학가, 철학가를 통해 ‘책이 곧 혁명’임을 주장한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재에 기대어야 책이 쉽게 읽힌다. 귀 기울여 경청하듯 사사키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내 안의 개별적인 추억의 경험을 호출한다. 사사키의 추종자가 될 의사가 없었으나, 그의 책을 이미 읽어버렸으니 돌이킬 수는 없다. 사사키식으로 표현하자면,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읽고 말았다.”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리뷰를 작성한다는 것은 언어(개념)의 차용이고, 그것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이며, 새로운 세계를 수태(잉태)하여 생명을 낳는 과정이다. 텍스트와 텍스트는 서로를 마주하며 새롭게 창조된다. “한 단어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번역가의 발가벗는 책읽기 방식이 있다.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읽는 방법도 있다. 두 방식은 모두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연결된다.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쓰는 행위는 혼자가 되어야 하는 고독한 싸움이다. 다행인 것은 고통을 넘어설 때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학의 승리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광기를 내포하고 있는 신(神) 조차 선망하는 일이다. 정보의 명령에 따르는 노예화에 반(反)하여,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문학은 세계를 변혁한다. 둘째, 루터는 문학자이기에 혁명가이다. 대혁명은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 루터에게 독서는 기도였고, 시련이었다. 신에게 말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므로, 언어는 하나의 행위다. 혁명에서 폭력은 이차적인 것일 뿐, 본체는 텍스트다. 셋째,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천사를 매개로 신(神)의 말씀을 읽는다. 대천사는 읽을 수 없는 것을 읽게 한다. 문맹에서 벗어나려는 자의 불안을 낮추도록 용기를 주는 이가 있었다. 바로 아내 하디자였다. 이슬람의 최초의 신도는 하디자와 그들의 딸들이었다. 문맹을 극복하고 무함마드는 <코란>을 잉태한다. 넷째, 우리는 이미 읽어버렸다면,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아야한다. 역사적으로 앎이 어떻게 통제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문자를 쓰는 것이 특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문학은 우리 삶을 통제하는 정보와 구별되어야 한다. 다섯째, 도처에 문학의 사망을 선언하는 말들이 넘실거린다. 이것은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의 비겁한 변명이다.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지 20만 가량이 지났다. 한 생물종의 평균 수명이 400만년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아직 돌잔치도 치르지 않았다. 인류에 의해 발명된 지 고작 5,000년인 문학은 이제 시작일 뿐이며, 380만년의 영원할 것이다.

 

기도하는 손은 책을 읽는 손이 되어서 혁명을 꿈꾼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와 독특한 문체로 쓰여 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보여준다. 일본 출판계를 뒤흔들었다던 사사키의 『야전과 영원』의 출판이 은근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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