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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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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글쓰기』 최종규 씀, 호미, 2012.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 없이 표상할 수 없는 무수한 관념이 세상에 존재한다. 사물화 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개념은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름만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희망, 유토피아, 신(神)과 같은 추상의 개념은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 언어를 넘어서 -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한다. 관념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아간다.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성찰의 시간 동안 사람은 성장하고,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서 욕망을 형상화한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을 배우고 흉내 내며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저자 최종규님의 강직함과 올곧음이 그대로 베어나는 『뿌리깊은 글쓰기』는 모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하고 쓸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을 반성하게 한다. 말이 곧 글이 되는 일인 미디어 시대, 개개인의 사사로운 글들이 퇴고(推敲) 없이 네트워크에 쏟아지고 있다. 최종규님은 글밭 일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책무성의 준엄한 자기 검열의 기준을 제시한다. 고약하다 싶을 만큼 고치고 다듬어서 우리글에 맞는 적확한 문장을 구성한다. 그는 불편함 없이 우리가 입어왔던 옷을 새롭게 고쳐서 더 편안하고 멋진 옷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솜씨를 갖추었다. 그런 일을 업(業)으로 삼는 이는 고루할 것이라는 예상과 반대로 책날개에 담긴 저자 최종규님의 얼굴빛이 참으로 맑고 곱다. 갓 쓰고, 도포 입은 구태의연한 외양을 생각한다면, 그의 실체와 멀어도 한참 멀다. 올곧은 성품이 그대로 살아난다. 마음 씀과 글 씀이 그대로 형상화한 느낌이다. 그가 엮어 가는 착한 넋, 착한 말, 착한 삶이 활자로 살아난다. 인용된 글의 저자들 역시 그가 다듬어 준 새 문장에 빈정거릴 수 없는 까닭이 바로 그가 갖추고 있는 ‘진정성’과 ‘올바름’이다.

 

『뿌리깊은 글쓰기』는 오랜만에 독한 자아비판을 쏟게 한다. 글씨를 배워 읽고 쓸 줄 알게 된 이후로, 을 매개로 세상을 배웠던 나는 ‘번역서’를 창작 소설보다 먼저 읽었다. 대부분이 한자어인 우리 글, 서양의 동화책에서 출발한 책읽기, 번역서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던 나의 글에서 뿌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고민과 퇴고의 절차 없이 썼던 글은 오문(誤文)과 비문(非文)이 가득하다. 읽은 사람과의 소통을 고려하지 않고 쓴 자기 과시의 글들도 더러 있다. 우리말 사이사이에 영어와 한자를 섞어서 현란하게 쓰는 것이 학력과 문화라는 통념의 반향이기도 하다. 이 책은 펼치는 순간 한숨에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채워주셨던 한시절의 소중한 가르침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그분들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며 살고 있는 나에게는 두 큰 어른의 부활로 느껴졌다. 최종규님은 그분들의 언덕에서 숲을 이루고 있는 가장 반듯하고 곧게 자란 한그루 나무 같다. 우리글을 향한 저자의 ‘생각’, ‘사랑’, ‘뿌리’는 언어를 통제하는 제도 권력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강인한 내공과 생명력을 담고 있다. 그는 한글을 모국어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좋은 선생님이시다.

 

누군가가 한글만을 고집한다면, 시류를 거스르는 유통성 없는 사람쯤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우리말을 고집하는 사람을 보면, 순혈주의, 인종주의, 국수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언어 권력의 지배를 간과한 비판이다. 불과 19세기에도 서구 지배계급은 ‘라틴어’를 가지고 명문대 입학을 조절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21세기 한국은 기득권으로의 진입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변인이 바로 ‘영어’다. 듣고 말하는 영어 능력이 대학 입시, 취업, 전문대학원 입학의 당락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말은 더욱 더 경시 당한다. 언문(諺文)이라고 하여 우리말을 천시하고, 한문만을 고집했던 이조 양반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뿌리를 가진 공동체의 언어를 억압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순혈 인종주의 침략자들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일제 36년 동안 오롯이 새겨진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대주의를 가지고서 자문화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오늘 당장 컴퓨터를 셈틀로, 다운로드를 갈무리로, 디저트를 입씻이로, 디테일을 구석구석으로 바꿀 수는 없다. 한자어를 모두 폐기하거나, 일본말과 영어식 어투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로 잡을 수는 없다. 뿌리가 잘린 꽃은 오래가지 못한다. 좋은 토양에 뿌리를 깊게 내린 글쓰기를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글을 쓰겠다는 다짐 하나 세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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