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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 ㅣ J 미스터리 클럽 2
슈노 마사유키 지음, 김수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감이나 경험은 중요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진실을 잡을 수 없어. 더 중요한 건 사실이야.
-p.182
셜록 홈즈와 에르퀼 푸와로 그리고 아르센 뤼팽이 활약하던 탐정의 황금시절에는 피해자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는 금전문제 혹은 애정문제 혹은 그 둘 다, 라는 것이 살인사건의 대부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복잡한 가족사에서 유산을 혼자 차지하기 위해, 바람을 피운 부인이 미워서 등등.
하지만 대체로 이런 식의 범죄의 동기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흔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감정적인 원인들은 이제는 미스터리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진부한 소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스터리 소설이나 사회적 관심은 이런 식의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 아닌, 자신의 감정적인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연쇄살인마들에게로 초점이 많이 옮겨진 듯하다.
소위 사이코패스(psycopath)라는 것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넓은 땅덩어리에 섞여 있는 미국에서 이러한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은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감정적인 결함이 있어 사람을 죽이는 데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동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렇기에 용의자를 피해자의 주변 인물들에서 특정지을 수 없다. 그리하여 수사관들은 그들의 '내면' 대신 '사실'을 추측하는 수밖에 없고, 교도소에 수감된 사이코패스들의 특징에 대한 '통계'에 의해 사건 현장의 흔적을 분석해 용의자의 특징을 추측해낸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인물을 우리는 프로파일러(profiler)라 부른다. 그리고 경찰들은, 그 추측을 통해 어느정도 시간을 줄일 수 있다 한들 결국은 '사실'을 바탕으로 범인을 검거한다.
'궁극의 엔터테인먼트'를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있는, 제13회 메피스토 상 수상작이라는 이력에 걸맞게 슈노 마사유키의 <가위남>은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다.
1999년 작인 것을 감안하면 사이코패스를 등장인물로, 그것도 화자로 직접 내세우는 것은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위남'은 젊은 소녀를 목졸라 죽이고 목에 가위를 꽂아놓고 사라지는 연쇄살인마로, 2명의 소녀에 이어 세 번째 희생자를 물색하고 있다.
그렇게 목표에 둔 소녀를 죽이기 위해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소녀는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그것도 가위남의 소행인 양 꾸며놓은 채로! 자신의 모방범의 소행, 그리고 자신이 노리고 있던 목표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하던 가위남은 스스로 모방범을 찾아나선다. 그렇게 살해당한 소녀의 행적을 되짚어보니 그저 참하고 얌전한 여학생이라 생각했던 희생자의 의외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경찰에서는 이번 살인사건이 가위남의 세 번째 살인으로 간주하고 엽기 연쇄살인마를 검거하기 위해 범죄심리 분석관을 투입해 가위남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ㅡ.
"무동기 살인의 경우는, 지금 말한 것 같은 의미에서의 '평범한 동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동기를 구해도, 아무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납득하고 싶은 겁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인간이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그래서 무동기 살인자의 심리를 알고 싶어 해요."
우에이다 경부는 두 눈을 감고 말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는 '평범한 동기'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요.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번 사건의 범인이 평범하게 보이느냐 아니냐는 아무래도 좋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보는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p.224~225
자신의 모방범을 찾기 위한 탐정으로서의 가위남의 시선과, 가위남을 쫓기 위해 프로파일러까지 투입된 수사과의 경찰들의 움직임이 번갈아가면서 흘러가는 이야기는 굉장히 빨리 잘 읽힌다.
엽기연쇄살인범인 가위남은 평상시에는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나름대로 성실하게 하고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토요일이면 매번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한 뒤 다시 정신을 차리면, 가위남의 또다른 인격인 '의사'가 온갖 참견을 해댄다. 인간관계의 부족, 이중인격 등은 나중에 등장하는 범죄심리 분석관에 따르면 사이코패스의 특징으로 보인다.
덕분에 좀체 속내와 심리를 짐작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작가는 나름대로 꼼꼼하게 조사한 듯 가위남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심리 묘사는 꽤나 뛰어났다.
반면, 경찰들의 입장에서 그려진 시선 역시 매력적이다. 늘 승진을 꿈꾸며 승진시험 공부를 하지만 번번히 낙제하는 형사나 심문의 달인, 예의바르고 공명정대한 과장, 풋내기 형사, 그리고 '사이 나리'로 불리는 프로파일러까지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형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언론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양한 방법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생각이나 질문 등을 던지기도 하고, '베테랑'으로서의 형사의 면모를 보여줘 '탐정'이 아닌 '형사'의 직감과 능력을 그려내는 것에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의 오컬트 예찬 프로그램에서 이런 일이 우연히 일어날 확률은 몇백만 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연이 아닙니다, 기적입니다, 라고 말하는 녀석들이 곧잘 있지.
바보 같은 소리 말라고 해. 몇백만 분의 일이든, 몇억 분의 일이든, 확률이 제로가 아니라는 건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야.
-p.392
하지만 결말을 향해 달려가며 점차 '탐정' 연쇄살인마와 경찰이 쫓은 사건의 진상은 굉장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정말 굉장히 드문 확률의 우연을 가장해 이야기를 끝낸 작가는 그렇기에 '확률이 제로가 아니라는 건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는 말(p.392)'로 마무리 짓는다. 굉장한 우연으로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공룡이 멸종되었고 그것이 정설로 받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먹여가며.
그리고 그 정도의 '우연'을 이용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작가가 마련해놓은 또다른 장치로 관심이 쏠려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작가는, '우연'과 '편견'이라는 양날로 이루어진 가위로 독자들의 목을 찔러오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