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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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네자와 호노부, 그와의 첫 만남이자 깊은 인상을 받게 했던 작품 <추상오단장>은 리들 스토리 자체의 매력 뿐 아니라 그 이야기 속의 차원으로부터 한 단계 더 위로 올라와 그 '이야기들'로 또 다른 축제를 벌였다.

'이야기' 그리고 그 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줬던 작품 그리고 이에 이은 <인사이트 밀> 역시 너무나도 즐거웠으니 이 사람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어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이번에 펼친 책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이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단편집으로, 각각 연관이 없어보이는 단편은 'The Babel Club Chronicle'이라는 부제과 맞물려 '바벨의 모임'이라는, 상류 계급의 영애들만 가입할 수 있는 독서클럽이라는 공통점으로 수렴한다. 연작 소설의 형태로 '바벨의 모임'의 회원이 주인공으로 직접, 혹은 주변인물로서 등장하곤 하는 것이다.

 

「집안에 변고가 생겨서」는 피하고 싶은 모임에 대한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그러나 변고를 숨기고 있는 한 명망있는 가문에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갇힌「북관의 죄인」은 본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않고 납, 식초, 동물의 피 등 수상쩍은 재료들을 자꾸 부탁한다. 이런 가문은 휴식을 위한 별장이 있기 마련이고 별장을 관리하는 사람 역시 당연히 존재한다. 그런 산장 관리인의 숙명은 바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 손님맞이를 위해 산장 관리인의「산장비문」은 등산 중 실족한 한 등산객을 손님으로 맞이한 것이었고, 그를 찾아나선 산악부 회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산장의 손님이 되어 방문한다. 주인의 허락없이 손님을 받곤 하는 산장 관리인과는 달리 주인의 부탁은 반드시 지키려는「타마노 이스즈의 명예」는 '밥짓는 요령'에 따라 지켜진다. 이렇게 '원체' 부자로 살아온 이들과는 달리 졸부가 되어 상류층의 생리를 잘 모른 채 그저 자신의 씀씀이를 과시하고만 싶어하는 아버지를 위해, 딸과 특별 요리사 '츄냥'은 「덧없는 양들의 만찬」을 준비한다.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이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종잡을 수 없는 반전이 담긴 이야기를 홍보하기 위한 문구가 쓰이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반전,에 대한 기대를 키워놓은 채 책을 펼쳐보면 그 값(?)을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 붙어 있는 수식어는 그야말로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뒷통수 때리는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뒤늦게 밝혀지곤 하는 '약간의 트릭' 역시 깜찍한(?) 정도다. 단정한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화자의 말에 따라 조금은 기묘한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상황을 그려낸 이야기의 분위기가 오히려 상당히 매력적이라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단 한 줄의 마지막 문장으로 감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덧없는 양들의 축연> 속의 단편은, 일반적인 '미스터리 단편'에서 볼 수 있는 짧은 사건과 수수께끼 그리고 그 풀이와 같은 전개와는 달리 '이야기'의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 속에 수수게끼를 숨겨두고 조금은 귀엽기도 한 트릭을 준비해 반전의 초석을 깔아두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상류층 영애들의 독서 모임인 '바벨의 모임'이라는 매개를 통해 요네자와 호노부는 <인사이트 밀>과 같이 책, 특히 미스터리 팬으로서는 좋아할 만한 코드가 녹여내는 데도 성공했다.

비밀 책장에 고이 꽂아둔, 집안 어른들이 아신다면 격노할지도 모를 수많은 미스터리들을 직접 무대에 등장시켜 익숙한 작품에는 반가워하고, 낯선 작품은 챙겨두게 만든다거나, 꽤 익숙한 트릭이라 할지라도 '이 단편에서는' 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단편 제목에서도 역시 미스터리에 대한 패러디가 존재하는데, 어쨌든 이런 식의 코드를 녹여내고 있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그의 미스터리 사랑과 능력이 참 부럽다.

 

내가 읽은 그의 작품 출간 순서는 인사이트 밀 - 덧없는 양들의 축연 - 추상오단장이다. 정말 이 <덧없는 양들의 축연>은 <인사이트 밀>과 <추상오단장>의 중간쯤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스터리를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인사이트 밀>에서 출발해 이러한 단편에서 한 차원을 더 끌어올린 메타픽션 <추상오단장>에 이르기 이전에, 또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덕분에 '신본격 미스터리의 기수'라는 평을 받고 있는 그의 다양한 시도와 작풍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는데, 이것 역시 이 <덧없는 양들의 축연>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단편을 소개해 보자면 나름대로 숨어있던 트릭이 돋보였던 「북관의 죄인」, 마지막 반전에 미소짓게 했던 「산장비문」, 그리고 「덧없는 양들의 만찬」이다. (60%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니.. 뭐 그냥 다 마음에 들었다고 말해도 실은 무방하긴 하다.)

 

바벨의 모임이란 환상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덧없는 자들의 성역입니다.

우리 모임에는 너무나 단순한 현실을, 혹은 너무나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듭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같은 지병을 가진 사람들이죠.

-p.301

 

환상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덧없는 자들, '바벨의 모임'의 회원들과 그 주변인들, 그리고 책을 통해 몽상에 빠지곤 하는 (나를 포함한) 이들을 위한 단편집이 아니었나 싶다. 그 몽상과 현실의 경계에 놓인 듯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덕분에 나는 그가 준비한 '미스터리의 양들의 축연'을 마음껏 즐겼다. 어쨌든 계속 즐거움을 안겨주는 요네자와 호노부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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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 - 박형근 장편 소설, 제5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대상작
박형근 지음 / 노블마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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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억나? 정말 이런 것들이 나오면 완벽한 유토피아가 될 줄 알았지.

공해없이 달리는 전기자동차가 나오는 세상은 완벽했어.

그런데 전기자동차가 돌아다니고, 액자보다 얇은 TV를 보고, 빌어먹을 영상통화 휴대폰을 쓰는데도 세상은 달라진 게 없잖아.

매일같이 죽어나가고, 불타고, 무너지고 있지. 아무도 행복해 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아.

우리는 21세기가 유토피아가 될 거라고 철저하게 교육받았지. 완벽하게 속은 거야.

21세기는 우릴 배신했어.

-p.61

 

4월은 과학의 달, 이랍시고 항상 과학의 달 행사를 했다.

뭐 물의 날이면 물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거나 포스터를 그리거나 표어를 쓰거나 했는데, 과학의 달에는 언제나 그리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는 걸 잘 하지도 못하고 싫어하는 나로서는 '과학의 달 상상화 그리기'가 그렇게 고역스러울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언제나 레퍼토리는 정해져 있다.

 

그 때는 딴에 나는 그래도 너희들과는 달라, 라는 식으로 좀 다르게 그리는 어린이도 있었을지 몰라도 어쨌든 결론은 우주여행, 해저도시, 전기자동차, 무빙워크, 집안일을 다 해 주는 로봇, 화상전화기를 비롯한 지금의 스마트폰 역할을 할 것 같은 기기, 뭐 그 정도.

가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해 기발한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대부분의 그림 역시 이 정도로 끝났다.

 

여전히 2000년대는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닌듯하지만, 2003년이라던가 하고 딱 연도를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거기서부터도 꽤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절감하곤 한다.

벌써 2002년 월드컵과 붉은 악마의 열기로부터 월드컵이 두 번이나 더 개최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쨌든 2000년이라거나 2001년이라거나 하는 연도를 생각해보고 있으면 꼭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다.

'2000년이 되면 상상화에 그리던 게 진짜가 될 줄 알았는데.'

그 때는 진짜 직립보행하는 로봇이 일상화가 되고 사람이 운전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컬러 핸드폰으 물론이고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던 일이 얼마 전이었는데 이제는 카메라에 mp3가 웬 말인가. 이건 기본 옵션에 화상통화는 당연히 가능, PC가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스마트한 세상이 되었는데.

 

어쨌든 '~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라는 발상으로 시작된 소설인 듯한 <20세기 소년>.

소설 속 21세기는 뭐 우리의 모습 그대로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면 인터넷으로 바로바로 검색해 보고,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기 벅차다.

뭐든지 검색, 또 검색이다. 새로고침, 그리고 새로고침. 클릭하고 또 클릭한다.

실시간 급상승 인기검색어. 어라? 이 사람 이름이 왜 여기에? 하고 클릭해보고, 시덥잖은 루머에 휘둘리든 진짜든 어쨌든, 다음 날의 훌륭한 대화 소재 중 하나가 되어주기도 한다.

뭐 더 있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에 거의 의존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던 21세기의 모습은 아니다ㅡ라고 말하려니 어린 시절이 완전히 20세기에 있었다기보다는 경계에 놓여있었던 내가 말하기에는 좀 뻘쭘하긴 하다.

 

어쨌든 주인공 '신'은 그런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의류 디자이너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청계천' 등의 글자가 적힌 티셔츠를 파는, (문 닫기 일보 직전인) '20세기 소년'이라는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포털 사이트 메인의 뉴스를 업데이트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언제나 언제나, 최신 소식과 동향에 뒤처지지 않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한다.

늘 반복되는 업데이트, 그리고 언제나 트렌드를 좇는 여자친구를 만나는 주인공. 그런 그에게 은밀한 즐거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새벽 4시부터, 3분간의 자그마한 일탈이다.

3분동안, 메인 뉴스의 링크를 바꿔놓는 것. 두 국가의 정치인이 악수하는 사진을 원숭이 사진으로 바꿔놓는다거나 하는 일이다. 아무도 모르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날 부턴가 그 시간, 링크에 덧글이 달린다.

 

 

'팬이에요.'

 

 

이 즐거움마저 빼앗길 것 같아 미칠 것만 같은 신이지만, 정작 팬이라는 이 사람은 신을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다.

고등학교때부터 해외 구매 대행 서비스를 하면서 떼돈을 번 그, 호제는, 삶에 목표도 즐거움도 없다며 새벽 4시의 그 일탈을, 자신이 할 수 없겠냐고 물어온다.

뭐 아르바이트비는 자기가 받겠다, 그러라고 했더니 아예 자신이 살고 있는 방에 눌러앉는다, 호제라는 녀석.

 

그러나 그 뒤로도 새벽 4시의 은밀한 행각을 지켜보는 이는 존재하고 있었으니, 골때리는 마조히스트 소녀 혜지였다. 그렇게 20세기 소년의 회원을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들은 세상을 뒤집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ㅡ.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이라는 녀석은 우리 생활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마 내 기억으로 어린 시절 게임 말고 인터넷의 가장 커다란 용도는, 바로 독후감이었다. 지금도 가끔 방학의 끝무렵 네이버를 미칠듯이 검색하고 뒤지고 있을 '독후감 숙제'라는 키워드를 볼 수가 있는데, 어쨌든 그렇다. 독후감이랍시고 읽어보지도 않고 남의 글을 슥 베껴 고대로 제출하니, 선생님들도 꽤나 꼼수가 생겨 일부 구절을 검색해봤더니 똑같더라..라는 식으로 무단 도용을 색출해내기도 했고ㅡ물론 내가 이런 걸 베꼈다는 건 아니다. 난 성실한 학생이었으니까.. 음하하..

숙제의 가장 좋은 길잡이는 바로 이 인터넷,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식*N 뭐 그런 거다. 그 밖에도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생활을 하면서 발생하곤 하는 소소한 문제들을 물어보고 답변을 하는 등 정보 교환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그 넓고 넓은 인터넷의 바다를 두고 한정된 포털 사이트의 지식 관련 활동을 그저 받아들일 정도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프랜차이즈의 수많은 이벤트와 쿠폰을 뿌리며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블로거들의 영향력 역시 커지면서 맛집, 책, 영화 등등 수없이 많은 상품에 대한 정보와 평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단이다(얼마 전 파워블로거라는 것을 빌미로 한 식당에서 좋게 올려줄테니 밥값을 면제 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고는 안 된다니 악평을 올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목격담도 본 적 있다ㅡ이 마저도 인터넷으로 확인하다니! 어찌되었든 그 사람은 분명 파워블로거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_-;;).

 

개인 정보,라는 것도 무시할 수가 없다. 어느샌가 방송에 출연해 이름이 공개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파헤쳐질 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면네티즌들은 바로 촬영 정보를 바탕으로 소위 '신상 털기'에 돌입하기도 하는데, 그 행동력이 정말 놀랍기까지 하다.

 

어쨌든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바로 '20세기 소년'들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첫째, 프랜차이즈의 로고를 닥치는대로 모아 '가짜 쿠폰'을 퍼뜨린다.

둘째, 인터넷에 친절한 답변을 통해 전문적인 수준까지 내공을 쌓아 누구든지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게되었을 때 쯤, '가짜 지식'으로 세상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셋째, 너무나도 많은 재산을 어찌할 바 모르는 호제. 그의 재산 탕진을 위해 '고칼로리, 트랜스 지방'에 '불친절'을 모토로 내세운 햄버거 가게를 차린다. 그러나 그 곳이 망하기는 커녕, 사람들은 더더욱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조지 오웰의 <1984>는 모든 이가 감시받는 1984년이라는 미래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검사받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는 커녕 뭔가 그들이 보기에 불순해 보이는 자그마한, 행동 하나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세상.

그 곳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탈출구를 찾으려는 조지 윈스턴의 몸부림은 눈물겹다. 그리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이 그려냈던 1984년이나,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21세기의 빅브라더는, 21세기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21세기가 되어 화상통화가 일상화, 아니 솔직히 일상화는 아니지만 일단 가능해졌다. 공공장소에서 눈쌀을 찌푸릴만한 행동을 하면 순식간에 사람들은 손에 들고다니는 자그마한 핸드폰,이라는 이름의 카메라를 들이대고 순식간에 그 사실이 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게 잠깐 나온 얼굴을 가지고 어디에 사는 누구라더라, 라는 식으로 평소 그 사람의 행실까지 조목조목 되짚기까지 한다. 물론 그 사람이 잘 했다는 건 아니지만,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잘못한 사람의 행동과 그의 모든 것은 까발려도 된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렇게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익명의 공간'이 세상의 모두를 감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익숙해진 우리들은 그 많다는 다양성 대신 모두가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다 결국은 조지 오웰이, 그리고 모두가 두려워했던 '전체주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21세기의 이 문명의 이기를 폐해만을 바라보며 심각하고 나쁘게만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편리함을 누리고, 앞으로도 누리며 살아가려는, 살아갈 수 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20세기 소년>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보려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참 통쾌하고 유쾌한 소설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보였듯 <1984>의 21세기 버전 같은 요소도 있다. 맞다. 나는 '20세기 소년'들이 벌이는 일을 지켜보며 스스로가 뜨끔했으며,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메시지, 주제가 소설 속에 직접 써놓은 듯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래, 너네도 그렇지? 뜨끔하지?라고.

호제, 그리고 혜지라는 캐릭터에도 공감이 좀 가질 않았다.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 공부는 일찌감치 때려치고 구매대행,이라는 특별한 분야를 처음이다시피 뚫고 성공한 호제나 정말 골때리는 마조히스트이자 관련 카페를 운영하는 여중생(그것도 중학생!) 혜지,라니.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실을 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말도 안되는 젊은 CEO와 마조히스트는 갑자기 뚝, 소설과 현실을 갈라버리는 벽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덕분에, 소설은 조금 더 활기를 띠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의 요소가 되어주었으니까.

 

 

 

비틀즈의 무지개
흑백 텔레비전에 오즈의 마법사
듀란듀란의 노래
달나라에 간사람 마돈나의 가슴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왔을 법한
화상전화기를 든 소년들
너무 빨리 어른의 세상에 눈을 뜬
아직 말간 눈을 한 소녀들


밤하늘에 가득히 떠올라 빛나던 별 투명하던 바람
무지개와 새들과 꽃이 피어오르던 봄날의 언덕
천진했던 소년들 순진했던 소녀들 20세기의 아이들


비틀즈의 무지개
흑백 텔레비전에 오즈의 마법사
듀란듀란의 노래
달나라에 간사람 마돈나의 가슴


밤하늘에 가득히 떠올라 빛나던 별 투명하던 바람
무지개와 새들과 꽃이 피어오르던 봄날의 언덕

올리비아 핫세는 세월이 흘러도
청순한 소녀일 것 같았고
나는 언제까지나 어른의 세상을 모를 것만 같았지 아이인 채


 

-자우림, 20세기 소년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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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설득합니까, 설득당합니까?

 

 

귀가 무지하게 얇은 나의 대답은 아마도,가 아니라 꽤 많이 확신하건대 '설득당한다'.

물론 나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볼 때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설득당한다'.

 

최근에는 많이 경계를 하고 아예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지만, 그래도 한때 꽤나 낯선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곤 했었다.

'인상이 참 좋아보이시네요'... 제기랄...

그들은 어찌나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한 번은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다가 거의 넘어갈 뻔한 적도 있다.

좀 말빨이 좋은 선생님이 약간 거짓말이 가미되었지만 꽤 설득력있는 말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정말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사기꾼이 살살 꼬드기는 말에 넘어갈 것만 같아 경계를 하며 살아가야할 것만 같은, 엄청난 습자지 정도 두께의 귀를 소유하고 있다.

요즘은 그래도 좀 두꺼워졌나.. 싶긴 하다.

 

 

인생을 결정하는 기로가 종종 있다.

분명 주변에 조언을 구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결정한 일에 귀기울이지 않겠다는 듯 설득 당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처음 결정과 달리 다른 이의 설득에 넘어가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언을 주는 이 역시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한 것이므로 그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렇지 못했는지 시간이 지난 후 답을 해 주는 경우도 있다.

아쉬운, 그 때의 선택에 미련이 있다면 또 다른 선택지의 결과를 상상하며 아쉬워하고 곱씹어보겠지.

그 때의 선택을 되돌릴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때의 선택을 만회할만한 기회가 돌아온다면, 그 기회를 잡는 데 있어 망설임은 없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설득>은 그렇게 '설득'으로 인해 후회를 남기는 선택을 한 노처녀(앤 엘리엇, 27세)의 이야기다.

 

스무 살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고 미래를 약속했지만, 장래성이 없다는 주변(레이디 러셀, 나이불명)의 설득에 넘어가 연인(프레더릭 웬트워스, 나이불명)과의 이별을 선택한 것이다.

 

꽤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준남작 아버지 월터 엘리엇 경과 장녀 엘리자베스는 허영심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인물이다.

그들의 무계획적인 재정 운용으로 인해 켈린치 홀을 유지할 수 없게된 그들은, 저택을 임대하고 바스로 거처를 옮기기로 한다.

하지만 웬 운명의 장난인가. 변호사가 알아본 임대인은 바로 앤 엘리엇의 옛 연인이었던 웬트워스 대령의 누님 부부로, 레이디 러셀과의 우정으로 새 저택에 늦게 향하기로 한 앤으로서는 그와 만날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져 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앤이 머물고 있는 동생 부부의 저택 어퍼크로스를 드나들게 된 웬트워스 대령은 머스그로브 가 자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동생 메리와 남편 찰스는 두 자매 중 누가 웬트워스 대령과 어울릴까 의견을 주고받기 분분하다. 서로를 의식하지만 좋은 감정이 남아있다고 생각지 않는 앤은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이 들기만 하다.

 

 

"좋은 밤 보내시길. 가봐야 해요. 가능한 빨리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 노래는 남아서 들을 만하지 않나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에 스친 앤은 의도했던 것보다 더 절박한 말투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아니요!" 그가 단호히 말했다.

"남아서 볼 만한 게 없는걸요." 그러고서 그는 바로 가버렸다.

-p.253

 

 

크.. 웬트워스 대령과 앤이 아직 서로에게 마음이 남아있음을, 대령의 질투의 끝을-_-;; 보여주는 대화.

이렇게 결국 몇몇의 사소한 혹은 커다란 사건을 겪으며 둘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쩌고저쩌고... 우리가 짐작하는 바로 그 결말이다.

 

 

 

과거의 설득으로 인한 오해와 이별,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ㅡ. 앤은 이번에는 망설임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판단을 내려 자신의 행복을 움켜쥐는데 성공한다.

 

딱 제인 오스틴스럽다,라고 판단하기에 나는 그녀의 작품을 단 한편 읽어봤기 때문에 꽤나 성급한 판단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오만과 편견> 속 그 분위기가 이번 <설득>에도 가득 녹아 있었다.

 

그 분위기란 역시 어떤 선남선녀의 만남과 사랑을 그려낸 살랑살랑한 바로 그 분위기, '로맨스'라는 것이다.

참 로맨스소설을 즐겨 읽기는 커녕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나지만서도 묘하게 제인 오스틴의 로맨스 소설은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하는 힘이 있다.

 

'행복'을 좋아하는 나는 역시 이쪽 장르(?)는 아무래도 이리저리 얽혀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는 것보다ㅡ소위 순정만화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다각-_-관계라는 것이다.ㅡ그냥 둘이서 알콩달콩 지내는 이야기가 훨씬 좋다. 그런 점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데,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설득>에서도 그런 요소는 여전했다.

 

 

사실 앤은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27세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채 노처녀가 되어갔고, 높아진 지위와 늘어난 부로 선택의 폭이 더 넓어졌던 웬트워스 대령은 얼마든지 다른 신붓감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행운'이 작용했다. 그런 남자의 마음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그 정도는 픽션에 가미될 수 있는 요소이기에,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의 모습을 그려낸 제인 오스틴 특유의 문장이 꽤나 정갈해 그 정도는 눈 감아 줄 법하다.

 

멜로든 로맨스든, 누군가의 사랑을 소재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일은 종잡을 수 없다기 보다는 '우리는 빤히 알고 있는데' '자신들만 정작 모르면서'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주인공 중 한 명의 입장, 아니 빙의되어 그 감정에 함께 휩쓸리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리 될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것이다.

 

<설득>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앤과 웬트워스 대령이 예전에 끝났던 관계를 재회를 통해 조금씩 감정을 되살리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묘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당시 영국 중류층의 대화와 생활 방식을 엿보는 것은 덤이라면 덤이라고나 할까ㅡ그런데 나는 솔직히 여기서 체면치레를 하며 우아한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고집도 부리고 왁자지껄 대화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앤과 웬트워스 대령의 사랑보다 더 즐겁긴 했다.

 

 

그와 더불어 생생한 캐릭터들 역시 그 즐거움에 한몫 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상대방 남자의 신분에 따라 대접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며 네 딸들의 혼사문제에 이것저것 어찌나 참견해대는지 나에게 짜증을 유발-_-;하셨던 베넷 부인만한 캐릭터는 그래도 없었다ㅋㅋ)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거나 웬트워스 대령의 짝이 누가 될 것인지 흥미진진해하며 남편과 언쟁을 벌이는 막내동생 메리를 비롯해, 머스그로브 일가와 함께 방문한 라임에서의 사건, 웬트워스 대령의 강력한 라이벌 엘리엇 씨 등등 마냥 평면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재미난 캐릭터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전히 제인 오스틴이 사랑받고 있는 것은 이런 '로맨스 소설'의 이면에 현재도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을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장래성이 없다는 것으로 두 연인의 결혼은 종종 양측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곤 한다. 여전히 '결혼'은 사랑 뿐 아니라 그 밖의 요소들에 영향을 받는 것이기에 레이디 러셀의 설득은 그 당시로서는 꽤나 타당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에게도 이런 설득을 한다면 나는 끝까지 내 의견을 관철시킬 자신이 있을까?

앞서 말했듯 굉장히 얇은 귀의 소유자인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하게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어쩌고..는 작품의 말미에 함께 실려 있던 '작품 해설'에서 하는 이야기에 어느정도 공감을 하면서 요즘 결혼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이건 나에게는 아직은;; 조금 먼 얘기ㅡ이게 점점 압박이 다가오면 끝장인거?ㅋㅋㅋㅡ이고, 그저 제인 오스틴의 문체와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나처럼 흐뭇한 미소 지으면서 재밌게 이야기를 읽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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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아래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 학살은 이 사회가 정화될 때까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잘못을 저지르려는 자들이여, 똑똑히 보라.

-p.130

 

개인적으로 수없이 많은 범죄 중에서도 성범죄는 가장 악랄하고 용서할 수도 없는 범죄라고 생각한다. 그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던 한 사람과 그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힘겨운 나날을 살아가게 하는 범죄. 하지만 범죄자에게도 마음은 있고 반성과 용서를 구하며 갱생의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성범죄자 처벌과 범죄 이후 범죄자들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마저도 아깝다고 생각한다. 아니 전자발찌를 달아놓고 주변에 이러이렇게 성범죄자가 있습니다, 라고 알려주면 뭐 하나.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아저씨 한 분(이라고 칭하기도 아깝다)이 전자발찌를 끊고 초등학교 남학생을 노리다(?) 미수에 그치고 체포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는 더더욱 그렇다. 그 피해자들은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화 될 수도 없는 일이고 공감해서도 안 될 일이다. 개인적인 복수는 또 다른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사법제도에 맡기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역시 나에게 성범죄의 피해를 입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안일하고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종종 들려오는 성범죄와 그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상당히 분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들에 대한 처벌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본다. 무기 징역? 사형?

무기징역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가혹한 처벌이겠지만,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시원찮을 수 있다. 아니 뭐가 아쉬워서 범죄자라는 이의 목숨을 부지시켜줘야 하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사형. 사법제도로 심판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결정일지 모르지만 그저 마음 편하게 죽으면 그만이냐,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빼앗는 대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하고 또 반성하는 것이 가장 가혹한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결국 답은, 없다. 참 어렵다. 뭐가 가장 최선의 처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에게 무기징역이든 사형이든, 굉장히 엄한 처벌을 받게 해야한다는 건 사실이다.

대충 있다가 무마되고 다시 사회를 활보하는 성범죄자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아동 뿐 아니라 '강간'과 '합의'의 경계가 너무나도 모호해 언제나 얼렁뚱땅 넘어가버린다는 젊은 여성들의 피해사례도 있는데 아니 도대체 이렇게 놔둬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이런 측면을 살펴보면 참 살기 힘든 사회다.

 

리투아니아에서 다섯살 난 딸이 변태 성욕자에 의해 성행위를 강요당해 이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는데, 어이가 없게도 그 가해자는 결국 '무죄판정'을 받았다.

판정에 격분한 아버지는, 직접 자신이 나서 가해자를 살해함으로써 복수를 했다고.

무죄 판정이라는 어이없는 판결도 그렇지만, 이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이성적으로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지만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을 가해자를 생각하면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나는 어느 쪽일까. 경찰관으로서 이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만약 카나와 여동생 에미 같은 피해자가 줄어든다면 이대로 범인이 잡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p.188~189

 

 

야쿠마루 가쿠의 <어둠 아래>는 이처럼 아동 성범죄자와 그에 대한 처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딜레마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소설이다.

 

어린 소녀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과거 성범죄 전과가 있는 전과자들이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기 시작한다.

사체의 복부에 알파벳 'S'를 새기며 스스로를 '상송'이라 칭한 범인. 그는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자신의 학살은 계속될 것이라는 범행성명문을 경찰관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전국을 충격에 빠뜨린다. '그래도 사람을 또 죽임으로써 혼자 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는 반면, 딸아이를 둔 부모에게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범죄를 줄일 수 있다면..'이라고 상송을 옹호하는 여론 역시 거세지기 시작한다.

한편, 과거 자신의 여동생을 성범죄자에게 잃은 피해자의 유족이자 경찰관인 나가세는 성범죄 피해자인 소녀의 죽음을 수사하다 갑자기 성범죄자 연쇄살인범 '상송'의 검거를 위한 수사본부에 참여하게 된다ㅡ.

 

 

질서를 잃은 세계에서는 증오만이 꼬리를 물지.

가족이 살해당하면 살해자에게 복수한다. 그리고 그 살해자의 가족은 다시 그를 죽인 인간에게 보복한다.

그 반복이야. 증오만이 연쇄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올바르다 할 수 있을까?

-p.215

 

 

경찰관이자 성범죄자 피해자의 유족,이라는 나가세라는 등장인물. 야쿠마루 가쿠는 그렇게 절묘한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성범죄자의 처벌,이라는 어둠 아래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질서를 위해, 개인적인 복수를 막기 위해 상송을 반드시 검거해야 하는 경찰관의 입장과 이런 사법 제도에도 불과하고 사라지지 않는 범죄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는 피해자의 유족들의 마음. 이것이 성범죄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입장이 아닐까.

그렇기에 나가세를 중심으로 범인을 어떻게든 검거해야하는 경찰의 입장과 범죄자 뿐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에게 상송의 존재를 어필해 그들 마음 속 깊은 어둠 속에 공포를 심어놓으려는 '상송'의 입장을 함께 그려내고 있는 <어둠 아래>를 읽고 있노라면 양쪽의 마음이 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작가는 그렇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의문을 소설의 형태로 그려낸 것이다.

너무나도 이해되는 양측의 입장을 지켜보며, 나 역시 더더욱 답을 내릴 수 없다는 답답함과 아쉬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정말로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시미즈가 던진 질문은 궁극의 의문이었다.

나가세도, 경찰도, 아마 사회의 모두가 느끼는 의문일 것이었다.

그리고 절망적일 만큼 대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일 것이다.

-p.288

 

 

 

야쿠마루 가쿠의 전작 <천사의 나이프>, <허몽> 역시 미성년자의 범죄와 통합실조증, 즉 정신분열증, 심신 미약 등을 이유로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 문제에 의문을 던진 사회파 미스터리다. 그 밖에도 사형제도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만화 <교도관 나오키>, 비슷한 소재로 법이라는 칼날이 모두를 올바르게 심판하지는 못하는 것을 그려낸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등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는 이미 다양한 주제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들 역시 이러한 문제에 분노를 느끼고 미스터리를 그려냈겠지만, 그들 역시 결말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 고뇌가 느껴졌다는 것이 소설을 읽다보면 종종 느껴진다. 그리고 가능한 결말을 모두 상상해 봐도, 양쪽 모두 씁쓸함이 몰려오는 건 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어둠 아래>의 결말은 무엇일까.

끝내 상송은 잡히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바닥 모를 공포를 심어줬을까. 그리고 그 공포로 인해 성범죄는 근절되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했을까.

혹은 상송은 대대적으로 체포되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성범죄자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자라는 이미지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을까, 혹은 더이상은 '정의'가 아닌 연쇄살인마라는 '악'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았을까.

 

어찌되었든, 모두가 씁쓸한 결말임에는 틀림없다. 야쿠마루 가쿠 역시 하나의 결말을 선택했다. 고뇌 끝에 선택한 것은 그의 진정한 바람일까 좌절일까. 혹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을까.

 

진중한 주제를 '극장형 범죄'라는 형태로 그려낸 야쿠마루 가쿠의 <어둠 아래>. 자극적인 극장형 범죄를 소재로 그려낸 흡입력 있는 이야기는 그럼에도 읽는 내내 마음이 참담하고 씁쓸했다. 그리고 여전히, 답은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야쿠마루 가쿠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에 영향을 받아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이렇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주제로 사회파 미스터리를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다. 앞으로 그가 던져줄 문제와 의문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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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송 1 - 운명의 바퀴가 돌다
로버트 매캐먼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스완송, 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건 천계영씨의 만화 <오디션>이었다.



백조는 일생 동안을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딱 한 번 아름다운 소리로 울고 죽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명자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친구이자 탐정 부옥이와 함께 힘겹게 모은 네 명의 천재소년들은, 송송 오디션의 데모 테이프로 제출할 노래를 'Permanant Wave'라는 그룹의 '진짜' Swan Song을 선택한다. 실제로 마지막으로 앨범을 발매한 뒤 죽었던 그들처럼, 죽기 전 마지막 노래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음악을, 영혼을 카피해보자고(이 때 라디오 신청곡으로 이 노래가 쇄도했다고 한다. 작가가 허구의 그룹이라는 것을 밝히고 난 뒤에야 잠잠해졌다고:).

 

죽음을 앞에 둔 마지막 노래... '스완송'은 그렇게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있던 단어다.



로버트 매캐먼의 <스완송>은 세계의 종말을 그려낸 소설이라 한다. 세계의 종말. 세계는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그 노래는, 아름다울까 혹은 한없이 어두울까.

어쨌든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의 가제본 한 장에 네 페이지가 담겨있음에도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소설을 펼쳤다ㅡ그것도 1권에 불과한 것을.

 

소련ㅡ이 소설이 1989년에 출간되었다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의 세계는 여전히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ㅡ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대치를 이루고 있는 미국.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를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미 합중국 대통령의 갈등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끝내 제3차 세계대전은 벌어지고 말았고,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미사일과 함께 미국 전역은 폐허로 변하고 만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것을 막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사람들과 하늘을 뒤덮어버린 재는 한 줄기의 햇빛조차 땅 위에 다다르지 못하게 한다. 언제나 뜨거울 것만 같은 지옥이 그렇게 서서히 얼어붙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은 남아 있을까. 로버트 매캐먼은 살아남은 세 무리의 사람들을 그려냄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세상의 마지막 노래, 스완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식물의 마음을 읽곤 하는 신비한 소녀 수 완다(스완)와 거구의 '악당' 프로 레슬러였던 조슈 허친스. 뉴욕의 부랑자였던 '시스터'와 그녀의 용기와 강인함에 이끌려 서쪽을 향해 발을 내딛는 사람들.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맥클린 대령과 컴퓨터 게임광이었던 소년 롤런드. 이 세 무리의 사람들은 각자 폐허가 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같은 목적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 것이다ㅡ.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노스트라다무스와 마야인들이 쓸데없이 언제 종말이 온다고 말을 한 바람에, 그리고 또 아마도 꽤 상당한 신흥종교단체에서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이야기 덕분에 '뭐 설마 그게 진짜이기야 하겠어.. 그 때가 되어 보면 알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쨌든 한 번 쯤 상상해 본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경험이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정작 종말이 찾아왔을 때 그 종말은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꽤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들을 실현시킨 것이 수많은 종말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 그리고 소설이다ㅡ덕분에 어찌보면 익숙한 이에게는 어느샌가 진부한 소재가 되었을지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서서히 나를 압박해 오거나, 궤도가 틀어진 건지 어 수 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일단은 혜성이나 소행성 같은 것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인해서, 혹은 다시 찾아온 빙하기로 인해 지구 상의 모든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거나ㅡ이 둘은 공룡이 멸종한 근거에 대한 가설이기도 하다ㅡ, 가장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를,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세계를 파괴시킬 걸 알면서도 '이익'과 '힘'을 위해 핵미사일을 발사한다거나.

이 모든 시나리오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실현되었고, 그 종말에 앞서 어떤 모습과 메시지를 담아냈느냐는 것은 역시 작가 나름대로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좀 웃기는 예이긴 하지만 무한도전에서 가장 망했다고 일컬어지는 좀비 특집은 인도 여자 좀비로 재탄생되어도 멤버들의 이기심 때문에 전부 좀비가 되고 결국 지구 멸망! 그런 식이라는 거다.)



실은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은 SF, 스릴러로서는 꽤나 훌륭하지만 우울해지는 것 역시 어수 없다. 극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평소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동안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광기를 드러내며 인간으로서의 '이성'보다 살기 위한 '본능'을 드러내는 모습이 마냥 거짓과 과장만은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고 싶진 않아요.'(가제본이라 인용구의 페이지는 생략)라고 미합중국 대통령이 이야기했듯, 가장 어리석은 종말일지 모를 핵전쟁으로 인한 멸망은, 어디까지 사람이 욕심에 어리석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럴까, 로버트 매캐먼의 <스완송>도 역시 '아름다운 선율'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하로 대피한 사이 땅에서 솟아오른 핵미사일로 인해 어찌할 바 없이 옆의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한다.

건전지가 조금 남은 라디오를 하루에 딱 한 번, 주파수를 돌리며 누군가의 신호가 잡히기를 간절하게 염원하는 것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범죄자들이 갇혀 있던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빼내와 그들의 은신처에 누군가 찾아오면 잔혹한 게임을 하며 사람들을 죽이기도 한다.

먹을 것을 잃어버린 늑대가 살아있는 인간을 목표로 공격하는 것을 얼마 남지 않은 총탄으로 막아내야 한다.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들에 더이상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은 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넘어 한 발 한 발 앞서나가는 것 뿐이다.

 

게다가 서서히(가 아니라 실은 처음부터) 드러나는 '악의 세력'ㅡ물론 맥케인 대령 측이 선이 될지 악이 될지는 아직 짐작할 수 없다.ㅡ은 극한 상황 속에서의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어찌보면 조금 진부한 주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착한 등장인물을 좋아한다. 그리고 선과 악의 대결에서 끝내 선이 승리하는 것도 좋아한다. 아무리 뭐라 해도 나쁜 사람이 득세하는 이야기는 싫다.

그런 착한 등장인물들이 폐허가 된 세계가 몸부림치는 것을 담아낸,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지켜보라는 듯이 엄청난 페이지에 담겨있는 생생한 글자와 문장 그리고 그 속에 담아낸 '희망'이 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해 주었다.

'시스터'가 발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나는 고리, 식물의 마음을 읽는 스완의 능력, 스완이 누웠던 자리에 돋아난 새싹... 그리고 그 무엇보다 목적은 알 수 없어도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ㅡ이것은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 희망이 담겨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이런 점은 환영해줄만한 요소라 생각한다.

이야기 속의 세계는 초토화된 폐허였고, 그 위를 걷는 그들이 끝내 도달하는 것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과 의지는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난 여전히 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고,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얼어붙은 지옥'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밀레니엄 1권만 읽고 2권을 안 읽어 좀 찝찝한 마음이 한 작품 더 늘어버렸다, 큭큭.

'스완송'의 2절을 기다려본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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