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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 겨울 들판은 나에게 연 싸움의 즐거움을 주던 행복한 공간이었다.
가오리연과 방패연을 멋스럽게 잘 만드는 형이 뒷마을 친구들과 연 싸움을 하던 풍경들이 그림처럼 밀려온다. 장갑 하나 없어서 추위에 부르튼 손을 호호 불면서도 오로지 힘 싸게 솟아 오른 우리의 연이 상대방의 연줄을 끊어버리기만을 기대하며 파이팅을 외치던 내 어린 시절은 정말 행복했었다. 30년 쯤 흘러가 잊혀져 버린 바로 그 기억을 되살린 것은 엉뚱하게도 아프카니스탄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 그 풍경 그대로 아시아의 저 서쪽에 자리한 나라 아프카니스탄에서 펼쳐지는 그림같은 풍경들이 이 소설에 녹아난 것이다. 글이 정말 그림과 같은 감동을 준다.
소설 '속죄'와 같은 분위기로 과거의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미르가 있다.
바바와 함께 자란 하인 알리, 바바의 아들 아미르와 함께 자란 알리의 아들 하산...
연 날리는 풍경은 어린시절 하산과 아미르의 뜨거운 우정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용감하고 헌신적인 하산 덕분에 늘 편안했던 아미르는 바바의 마음에 들지 않는 유약한 아들이었다. 그런 바바를 설득하는 것은 친구 라힘 칸이다.
"자식이란 스케치북이 아니네. 자네가 좋아하는 색깔로 채울 수는 없어." (38쪽)
아미르는 언청이 하산에게 성형 수술도 시켜주고 많은 애정으로 돌바주는 바바 때문에 질투심이 생긴다. 세상에 부자집 도련님이 글도 읽을줄 모르는 하인의 아들에게 질투를 하는 것이다.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할게요." (105쪽)
연날리기 대회에서 하산의 도움으로 우승한 아미르는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지만 보이지 않는 하산의 희생이 있었고, 그 씻을 수 없는 상처 가득한 희생을 애써 외면하는 아미르는 불쌍한 하산을 점점 궁지로 몰아 넣으며 자신의 죄의식을 벗어나려 한다. 알리는 하산을 데리고 집을 떠나고 이 아픈 추억이 정리되기도 전에 변명할 틈도 없이 세상은 아미르와 하산을 영원히 떼어 놓고 만다.
이 소설에서 나는 아프카니스탄의 고통을 개인사와 더불어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산과 아미르의 이별 뒤에 찾아오는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모든 것을 버리고 고국을 떠나야 하는 바바는 그 험난한 피난길에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기를 보인다. 소련군이 함께 피난가는 여인을 강간하려 하자 벌떡 일어선 것이다.
"전쟁은 품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평상시보다 품위가 더 필요하오. (중략) 이런 추잡한 짓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총알을 천 개 맞아도 괜찮다고 그에게 전하시오. (중략) 첫발로 날 죽이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전하시오. 내가 쓰러지지 않으면 저 사람과 그 아버지까지 갈가리 찢어 놓을테니까!" (177쪽)
고아가 될뻔 했던 그 순간,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험난한 일정을 이겨내고 바바와 함께 미국으로의 망명하는 아미르... 아미르는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사랑하는 여인 소라야와 결혼한다. 죽는 날까지 용기와 사랑을 보여준 바바... 바바가 세상을 떠난 뒤, 미국에서 살아가는 동안 까맣게 잊혀지는 고국에서의 기억들... 결혼 15년 동안 자식은 없었지만 소설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하는 아미르... 그런 그에게 소설가의 자질마저 발견시켜 주었던 하산의 추억을 다시 불러 일으키게 한 것은 파키스탄에 망명 중이던 라힘 칸의 전화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미르가 믿고 따르던 아버지의 친구 라힘 칸이 죽음을 앞 두고 그에게 파키스탄으로 와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 바바가 아미르의 나약함을 못마땅해 할 때 라힘칸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으니 아미르는 곧바로 파키스탄을 찾아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여행은 하산의 추억과 아프카니스탄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된다.
두껍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읽혀지는 이 소설에는 수 많은 명언들이 나온다.
어린 아미르에게 세상에 죄는 한 가지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바바의 가르침은 강렬하다.
"네가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한 생명을 훔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아내에게서 남편에 대한 권리를 훔치는 것이고 그의 자식들에게서 아버지를 훔치는 것이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그것은 진실을 알아야 할 다른 사람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다. 네가 속임수를 쓰면 그것은 공정함에 대한 권리를 훔치는 것이다. 알겠니?" (32쪽)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아미르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존중했던 바바가 도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바는 도둑 중에서도 가장 나쁜 도둑이었기에 충격적이다. 바바는 신성한 것을 훔친 아주 악질의 도둑이었던 것이다. 아미르에게는 알 권리를 훔쳤고, 하산에게서는 신분을 훔쳤으며, 알리에게서는 명예를 훔쳤던 것이다. 바바는 오로지 자신의 명예와 긍지를 위해서 그 많은 도둑질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도둑질의 진실을 자신의 입이 아닌 자신이 죽은 15년 뒤에 친구 라힘 칸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가 나한테 한 말이 기억난다.'라힘,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는 아이는 커서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어.' 그런데 네가 지금 그런 사람이 된 거니?" (331쪽)
그 순간, 아미르는 다시 태어난다. 그는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산의 아들 소랍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하산과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의 아내는 떠났지만 도둑의 아들로서 그 자신 도둑으로서의 과거를 참회하며 소랍을 찾아 잃어버린 고국의 아픔을 찾아 떠난다.
어린시절 위험에 처한 아미르를 구하기 위해 새총으로 아세프를 겨누는 하산...
"맞아요. 도련님, 그런데 새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저라는 것을잊으셨군요.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도련님 별명이 '귀 뜯어 먹은 아세프'에서 '외눈박이 아세프'로 바뀔걸요." (68쪽)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탈레반이 되어 나타난 아세프가 아미르를 죽이려 들 때, 소랍이 그를 향해 새총으로 겨누며 그만두라고 눈물을 흘린다.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아미르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아세프...결국 총알이 새총을 쉭~ 떠난다.(435쪽) 결국 아세프는 소랍의 새총에 의해 소랍의 아버지 하산이 30년 전 예언했던 외눈박이 아세프가 되고 만다.
소랍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여행을 떠났다가, 오히려 소랍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지는 아이러니... 어쨌거나 가까스로 탈레반으로부터 소랍을 구해서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아미르... 그가 소랍을 미국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는 아미르에게 소랍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에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나무에 올라가서 파란 신 사과를 따먹은 적이 있었어요. 갑자기 배가 부풀어 오르더니 북처럼 딱딱해졌어요. 엄청나게 아팠어요. 사과가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면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정말로 바라는 것이 있으면 어머니가 사과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을 기억하려고 해요." (510쪽)
그리고... 미국...
1975년 아프카니스탄의 추억을 회상하며 샌프란시코의 하늘에 연을 띄우는 아미르... 아미르의 도움을 받아 연을 날리는 소랍의 손은 언청이 입술을 한 남자아이의 손톱이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클로즈업 된다. 하산이 아미르를 위해 그랬듯이, 아미르는 하산의 아들 소랍을 위해 끊어진 연을 찾아 달려 간다. 연 싸움의 패배자가 된 꼬마도 알지 못하고 소랍도 알지 못할 큰 소리를 외친다.
"너를 위해서 천 번이라도 해주마." (5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