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5
이소호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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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시집의 시각적 인상은 이번에 더욱 본격적이다. 하나의 미술관 전시실을 차용한 시집의 레이아웃은 의도된 여백과 '도슨트의 해설을 받아 적은 것'이라는 설정으로 짜여진 각주를 선보인다.


시인은 핸드폰의 자동완성 기능으로 시를 쓰기도 하고(<소호의 호소>), 여성 공중화장실 칸 사진으로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기도 하며(<공존 화장실>), 2020년 2월 1일부터 29일 동안 일어난 여성 대상 범죄 기사를 모아 시어를 건져올리기도 한다.(<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 자해의 고통처럼 느껴졌을 언어 폭력들을 나열해 손목 위 차오르는 피처럼 표현하고(<일요일마다 쓰여진 그림>), 아스키 아트를 활용하고(<결말의 목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우리는>), 11세기 말 한 가톨릭교회 화장실 담벼락에 적힌 낙서를 각색하고(<쉽게 읽는 속죄양>), 음탕하고 미련하고 어리석고 모함하고 추하고 경솔한 등등등으로 낙인찍힌 '여자'인 나를 들여다 본다.(<위대한 퇴폐 예술전>)  


이소호 시인의 시를 읽으면 항상 어디까지가 시인의 진짜 경험담이고, 어디까지가 문학적인 허구인지 궁금해진다. 《캣콜링》의 경진이가 그랬듯 이소호의 뉴 뮤지엄 전시실도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언어 폭력, 여성 폭력을 고발하고 자해를 드러내고 고통을 호소한다. '경진'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소호 시인의 개명 전 이름인 데다, 시인이 경진이 연작시를 쓰게 된 계기("‘경진’이는 과거의 ‘나’지만 더 이상 내가 아닌 인물이잖아요. 또 중성적이고. 엄마 세대부터 제 세대까지 오랫동안 흔하게 사랑받은 이름이기도 하고요. 이만한 게 없다고 판단했던 순간부터, ‘경진이네’라는 소제목을 얹어 놓고 연작시를 쭉 써내려 나갔어요."-채널예스 출처)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시인의 내밀한 속내와 경진이가 가진 보편성 사이에서 의식하며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것까지 봐도 될까,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도 될까, 그런데 왜 이 이야기들은 이토록 낯익고 내 것처럼 사무칠까 하는 기분. 시인은 이것을 '소호'의 '시뮬라크르'("하나이면서 다수인, 영원히 반복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보려다 가려진 감추다 벌어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텍스트의 전시가 끝나면 이소호 시인의 짧은 에세이 <완벽한 실패를 찾아서>가 이어진다.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 정식 무용단원이 되지 못한 채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뉴욕을 헤매던 무용수 프란시스처럼 등단하지 못한 채 시를 쓰는 시인 과거의 이소호가 그려진다. '여성'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매일 실감하며 버티는 가난한 뉴욕 생활은 예술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예술을 향한 회의가 되기도 한다. 감자 한 포대를 사서 끼니를 때우고 사람이 그리워 교회에 가고 우정은 사치가 되며 위협은 일상이다.


가난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가난하면 꿈조차 꿀 수 없다. 예술의 중심이라던 이곳에서도 시는 노숙자들이 쓰는 것이었다. 그들은 벽에 시를 전시해두고 적선하는 이에게 답례로 자신이 쓴 시를 적어 준다. 문학은 적선의 대가다. 그럼 돈이 되는 예술은 무엇일까. 즐비한 갤러리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그림을 집 안에 걸 수 있다면 저만한 벽이 집에 있다는 이야기겠지. 광활하다는 말밖에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 캔버스와 거기에 낙서처럼 그려진 그림들. 그리고 연주자보다 나이 든 악기를 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것이 생각난다. 음계를 짚는 손가락은 얼마나 진지한가. 목소리는 결국 넉넉한 자본과 세월에서 흐르는 것이었음을, 나는 생각했다.


시인은 당시 옆에 있던 '그'와 뉴욕 곳곳에서 전시를 감상하며, 자신은 진실을 전시하고 거짓말이라고 말할 거라고 그게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한,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자전적 예술을 하는 방법은 재료를 '나'로 쓰는 방법뿐이라고 예술가의 작품에 공감한다. 시인이 현재 하는 창작 활동이 이때의 다짐과 공감을 재현하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뉴욕 생활이 담긴 에세이까지 읽고 나니, 시인이 텍스트로 펼쳐보인 전시실은 어쩌면 이 시집의 필연적인 구성일지도 모르겠다. 질문을 던지는 삶은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질문을 던지는 미술관의 경험은 인생의 파편으로 녹아들어 또 다른 예술의 자양분이 된다. 상호 호환 혹은 상호 교환되는 예술과 삶의 데칼코마니를 이소호 시집이 압축하여 표현해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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