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거기에 곰이 있었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뱅상 소렐 글 그림, 김희진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콧 맥클라우드 왈, "카툰화에서의 단순성은 동일시의 기폭제"라는데, 뱅상 소렐의 <곰: 그리고, 거기에 곰이 있었다>(미메시스)는 그림의 단순성이 도리어 거리감, 관조성을 불러일으킨다. 동일시는 이야기의 단순성에서 온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이 증폭되는 이 한 컷에서 사제의 저 얼굴이 섬찟하다. 그는 무엇이 좋아서 저리 웃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66 세트 - 전5권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6일에(은근한 라임?ㅋㅋ) 도착했다.


내년 초에 읽기로 하고, 일단 만듦새에 대한 평을 남긴다.


(사진을 클릭하면 책의 질감을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1. 매우 가볍다. 내지를 부티 나지 않게, 소설의 폼에 맞게 적절한 무게(과장해서 깃털같다)의 종이로 설정한 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2. 북디자이너 야후벨이 전담한 한글판 볼라뇨의 커버 디자인은 열린책들 작가 전집 가운데 가장 창의적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절판된 무선제본의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을 완성도면에서 가장 좋아하고, 표지 디자인만 놓고 본다면 프로이트 전집:개정판과 이번 볼라뇨가 넘버 원이다) 이번엔 말과 저승사자의 그림자를 이어서 책의 전체를 감싸는 내용의 그림으로 권마다 색을 달리했다. 




3. <buzzbook vol. 1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를 보면 <2666> 출간기획서가 있는데, 거기엔 총 3권으로 예정돼 있던 것을 다섯 권으로 확정했다. 챕터 분류를 위해 수정이 된 것 같다. 4, 5권이 가장 두껍고 2권이 가장 얇다. 2권은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떠올리게 하는 볼륨이다. 앞서 말한대로 책이 전체적으로 매우 가볍다. 지금까지 나왔던 열린책들 소설 가운데 가장 가볍다. 그래서 4, 5권도 두께에 비해 이동중에 읽는다해도, 가방에 넣을 때 공간차지야 하겠지만 무게로 인한 부담은 없다.





총평: 개인적으로 양장보다 무선제본을 좋아하는지라 그 부분은 열린책들 책에서 늘 아쉬운 부분이지만, 내가 느끼는 그 한계를 커버해낸 이번 책은 근래, 그 물질적 특질만으로 본다면 Best of best 구매 도서가 아닐까 싶다.


 다만, 이건 인터넷으로 박스를 살 때 자주 생기는 문제이긴 한데, 또 상자 한 쪽이 짓눌렸다... 뭐, 난 관대하니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의 책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 이산 / 199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약하는 독자, 생성되는 사상사"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산 펴냄)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대표작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 b)에서 말한다.


"나는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아나키스트이며, 맑스주의적인 정당이나 국가에 공감을 지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맑스에게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 내가 젊었을 때 읽은 '국민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자본』이라는 책에 품었던 경탄은 해를 거듭하면서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1985년 문고판 후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1978년 이 책을 출판할 때 후기에서 '서설'이라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일본문학의 평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본론'에 상응하는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을 썼지만,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 대해서는 아직 쓰지 못했다."


『트랜스크리틱』은 그가 "아직 쓰지 못했다"는 책일 것이다. 다만 10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사이 마르크스만의 집중적 독해에서 칸토로의 횡단이라는 운동이 더해졌다. 

 '1978년판 후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왜 마르크스를 읽는가? 모든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의 '문제'가 필요한데, 그것이 내게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본질적인 사상가의 텍스트는 다의적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사상가로 변모해가는 데는 항상 마르크스라는 중핵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은 그가 말했듯이 '서설'이라고 볼 수 있다. 사상가 고진의 최초의 태도는 별것 없이, "텍스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 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의 선언도 이런 것이었다. 그렇지만 루터와 그 이후의 '텍스트 중심'에는 계속 때가 끼기 쉽다는 문제가 있었다. 루터의 그 싸움이 순수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뭇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말할 때도 여전히 앞선 이해의 틀이 잠복해 있음을 보곤 한다. 복음에 대한 회고적이고 전투적인 순혈주의 말이다. 그렇게 보면 독자가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 텍스트를 압도해 버린, 텍스트가 단지 그것의 일부를 표시하는 데 불과한 듯이 보이는 의미체계"(23면)를 탈피해서 "읽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폭력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사적유물론이라든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외재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본론』을 읽는다. 그것은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작품' 이외의 어떠한 철학이나 작자의 의도도 전제하지 않고 읽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작품을 읽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상가 고진은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도약해서 그의 『트랜스크리틱』으로 건너간다. 나는 그의 마르크스 이해가 궁금한 것이다. 내가 다시 그의 텍스트로 간 데에는 사적 의미 구조가 없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활달한 사상가'는 아니다. 그 도약 사이에서 가라타니 고진에게 변한 것이 있을까? 


"마르크스의 문체가 현저하게 변한 시기는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이다. 사상가가 변한다는 것은 그의 문체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적 내용이 변하여도 문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상가는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와 모더니티 - 영화는 어떻게 가장 독특한 예술이 되었는가
자크 오몽 지음, 이정하 옮김 / 열화당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던?: 영화는 어떻게 가장 독특한 예술이 되었는가"

 영화와 모더니티 

(자크 오몽 지음, 열화당 펴냄)




‘모던’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복잡하다. 우리에게 ‘모던’은 시대 안에서 체계적으로 의식화되기 전에 총칼과 외교적 톱날 사이에 끼여 상처의 질곡과 무너진 기억의 연장선 안에서 영영 비완결될 것 같은 ‘모던’의 지끄러기를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몸의 뒤에 붙이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크 오몽이 영화와 모더니티의 문제 선상에서 모던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말할 때 토로하는 모호함은 우리 앞에서 한 번 더 꼬인다. “‘모던’이란 개념보다 더 불명료하고 성가신 것은 없는 것 같다.” 저자는 모던의 이 속좁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던의 문제와 함께 탄생한 것과 진배없는(시간적으로 그렇단 말이다) 이 독특한 기계-예술에 있어 그것(영화)이 성사될 수 있었던 근본 고지를 탈환하려면 모던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불명료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일을 겪어 이제는 “예술처럼” 되어버린 영화가 가진 흐릿한 정체성에 선연하게 부합하는 지도 모른다.


 ‘예술’부터가 기만적이다. “예술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불분명한 개념이자, 아주 빠르게 진화한 개념이다. 예술의 개념은 일관되고 확고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은 정의, 즉 19세기 부르주아 시대가 만들어낸 정의를 채택함으로써만 오로지 분명하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유연하게 살아 온 진실을 포획하여 산출해 낸 어휘의 집합장에 살고 있는 ‘예술’의 끝머리에 잔뜩 곯아있는 고상함의 몸짓은 투정과 고집으로 “당신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 힘, 혹은 당신의 영혼을 강탈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위험스러운 어리석음. 이 사소한 이유로 사람들은 영화를 예술로 인정하는 것에 저항했던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 되려고 하지 않았지만, 영화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영화 초창기의 주변부의 반응과는 달리 또한 영화는 예술적이었다. 예술이 될 필요는 없었지만 예술적일 수 있는 자유, 나는 그것을 오몽의 책에서 채색한 모더니티의 풍경의 저의라고 읽는다.


 “시네마토그래프는 모던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를 알 수 없었다면, 당시에 모더니티는 학자나 예술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이 말은 언제나 새롭고 현재에 와 닿는다. 어떤 일(바디우식으로 말해 ‘사건’이라고 하는 게 나을까?)이 우리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의 내부에서 누구도 모르는 일이 계속 벌어지면서 구성체를 이루어 간다. “영화는 바로 모더니티와 합류하면서 자신의 모더니티를 발견한 것이다.” 영화는 모더니티를 취함으로 누구나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것이 되었다. 이것이 완결성으로 일단락되지는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모던으로 서기 시작한 영화의 시간에서 오몽은 두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 케인>의 오손 웰즈(그가 초기 영화의 종말을 알리고 “형식적 해답의 창안과 이데올로기적 질문의 해소”를 가능케 한 선두주자였다)와 로셀리니(모던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크 리베트의 강력한 선언을 통해 모던의 기수로 서게 된 ‘반고전주의자’). “웰스의 영화와 로셀리니의 영화. 그리고 이 영화들이 낳은 것들은 앞선 것들, 특히 양차 세계대전 동안 모더니티를 사유하려 한 노력들과 단절한다. 이런 의미에서 위 영화들은 모던한 시도들로 볼 수 있다.”


 이 책이 모던의 계보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던에는 계보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의 분량으로도 그것은 과하다. 단순하게 말해 이 책은 모더니티의 질문은 아직 미완성이고(그래서 계속 진행되어야 하며) 완성을 꿈꾸는 미완성이라고 말한다. 단순하게 말해(적은 분량의 이 책은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제 2의 모더니티에의 열림으로 개안하자는 것이다. 동의하면서 공감하긴 어려울 수 있지만, 그가 이렇게(“‘모던 영화’에 대해 재차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독실한 신앙의 맹세 뒤의 희미한 뒷맛을 풍길 뿐이다.”) 말하거나 저렇게(“우리는 영화가 사라질 것이라는 데 설복됐다기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영화, 우리가 사랑했던 그대로의 영화가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데 설복됐다. 디지털 이미지가 도래하고 있었고, 질주하는 테크놀로지를 논하는 카산드라들의 예언이 경청되고 있었다. 영화는 계속되었지만, 은밀히 변해 버리지 않았는가.”)말할 때는 동의도 되고 공감도 된다. 그 씁쓸한 뒷맛 때문에 그의 어려운 낙관을 경청하게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3-12-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반갑네요. 자크 오몽 책 의외로 깊이가 있어서 ( 그냥 멋모르고읽다가..) 감동한 책입니다.

무이 2013-12-10 22:3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두께 보고 우습게 여겼다간 큰코 다치죠~ 뒤에 실린 역자와의 인터뷰가 더 강렬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따뜻한 서글픔"

 섬 

(장 그르니에 지음, 민음사 펴냄)




나는 편애에 능한 속 좁은 독자다. 나는 카뮈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카뮈의 유작이자 미완성인 『최초의 인간』을 그의 최고로 꼽는다. 나는 노골적으로 철학적이자 정치적인 그의 소설을 별로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 『섬』에 카뮈가 실은 긴 분량의 서문은 그르니에의 본문보다도 좋다. 『최초의 인간』과 『섬』의 서문을 나란히 놓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카뮈의 글은 선대에 대한 애정으로 쓴 것들인가보다. 어머니(아버지)와 스승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그의 글들은 내가 프랑스인 특유의 문장이라고 어리석게 명명한 그 따뜻함이 있다. 


 그르니에의 이 책은 꼭 그 제목처럼 군도의 구성을 이룬다. 제 각각의 독자적 미학세계에 침잠해 있는 몽환적인 사유가 미노스의 미궁같은 자태를 이루며 심비의 보관이 되어 문을 닫고 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겉태의 그르렁거림을 통해 문장 내면의 침묵을 감추고 저만의 겨울잠으로 독자를 유혹하고 애무한다. 공감의 순간을 자아내는 문장들도 시크함으로 덩그러니 서 있을 뿐, 더 머물다 가라고 사정하지 않는다. 이 책은 프루스트가 음악적 순간으로 묘사한 스완의 사랑같은 것으로 축조된, 완성이 곧 허물어짐인 것으로 완성된 유물(遺物)론적 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