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의 책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 이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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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하는 독자, 생성되는 사상사"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산 펴냄)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대표작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 b)에서 말한다.


"나는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아나키스트이며, 맑스주의적인 정당이나 국가에 공감을 지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맑스에게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 내가 젊었을 때 읽은 '국민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자본』이라는 책에 품었던 경탄은 해를 거듭하면서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1985년 문고판 후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1978년 이 책을 출판할 때 후기에서 '서설'이라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일본문학의 평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본론'에 상응하는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을 썼지만,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 대해서는 아직 쓰지 못했다."


『트랜스크리틱』은 그가 "아직 쓰지 못했다"는 책일 것이다. 다만 10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사이 마르크스만의 집중적 독해에서 칸토로의 횡단이라는 운동이 더해졌다. 

 '1978년판 후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왜 마르크스를 읽는가? 모든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의 '문제'가 필요한데, 그것이 내게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본질적인 사상가의 텍스트는 다의적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사상가로 변모해가는 데는 항상 마르크스라는 중핵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은 그가 말했듯이 '서설'이라고 볼 수 있다. 사상가 고진의 최초의 태도는 별것 없이, "텍스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 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의 선언도 이런 것이었다. 그렇지만 루터와 그 이후의 '텍스트 중심'에는 계속 때가 끼기 쉽다는 문제가 있었다. 루터의 그 싸움이 순수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뭇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말할 때도 여전히 앞선 이해의 틀이 잠복해 있음을 보곤 한다. 복음에 대한 회고적이고 전투적인 순혈주의 말이다. 그렇게 보면 독자가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 텍스트를 압도해 버린, 텍스트가 단지 그것의 일부를 표시하는 데 불과한 듯이 보이는 의미체계"(23면)를 탈피해서 "읽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폭력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사적유물론이라든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외재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본론』을 읽는다. 그것은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작품' 이외의 어떠한 철학이나 작자의 의도도 전제하지 않고 읽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작품을 읽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상가 고진은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도약해서 그의 『트랜스크리틱』으로 건너간다. 나는 그의 마르크스 이해가 궁금한 것이다. 내가 다시 그의 텍스트로 간 데에는 사적 의미 구조가 없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활달한 사상가'는 아니다. 그 도약 사이에서 가라타니 고진에게 변한 것이 있을까? 


"마르크스의 문체가 현저하게 변한 시기는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이다. 사상가가 변한다는 것은 그의 문체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적 내용이 변하여도 문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상가는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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