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피앤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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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유배자의 신학: 


에티카」(황태연 옮김, 피앤비)




기하학적 구성의 틀 안에서 제한된 어휘로만 축조된 이 책은 고갈되지 않는 태풍을 머금고 잇는 것 같다. 스피노자의 이 글은 난해하지는 않지만 전경을 담은 투시도를 그려서 읽지 않으면 도구적 인용으로만 쓸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명명백백한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의 빛 아래서 세부적인 것들의 유기성을 배우고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같잖은 쓸모의 책으로 남을 뿐이다. 스피노자의 목적의식은 직관으로 풀어 말할 수 있는 제 3종의 인식(가장 높은 단계의 지식)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에 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민음사)의 제사로 소설을 인용하는데, "얼마 후 몇 쪽을 읽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마치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에 접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마치 요술쟁이 빗자루를 타게 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강조는 인용자)은 마참하다. 내게 스피노자의 진가를 포괄적으로 인식시켜 준 매튜 스튜어트의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교양인)에는 "언뜻 보기에 그의 『에티카』는 고색창연한 용어들과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들이 난무하는 고통스러운 가시덤불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적인 장벽을 관통해 들어감으로써 얻게 되는 보상은 엄청나다. 미적인 체험도 결코 적지 않은 유혹이다. 왜냐하면 정의, 공리, 그리고 명제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거미줄은 어떻게 보면 산문체로 써진 시가이자, 눈부신 지성의 조각품"이라고 써 있다.

 스피노자의 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이성적인 신인데, 스피노자의 신에게 은총이나 인격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오류이며 착각이다. 그것은 고래로 사람들이 신에 대한 사유의 시작점을 신 자체가 아닌 인간으로 잡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스피노자는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한다. 이것이 불경했기 때문에 그는 파문 당하고 사회적으로 유폐됐지만, 나는 그의 신이 비정한 신으로 비추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왜 이 책의 제목이 '윤리학'이고 윤리가 신을 사유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는 지점일 것이다. 

 여기서는 매튜 스튜어트의 도움을 받아볼 수 있겠다. "의인화된 신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완강한 거부에서 우리는 그의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깊은 연결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처음 전개한 정치적인 분석에 따르면, 정통의 신 개념은 전제정치의 대들보 중 하나이다. 신학자들은 미신에 갇힌 군중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심판하고, 처벌하는, 무서운 신에 대한 믿음을 조장한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300) 이를 통해 신(성)에 대한 개념과 사유를 그 안에서 초극하여 그 외연을 넓히는 일은 유물론적 무대인 정치와 결코 밀접하다. 지금 와서 나는, 물리계와 물질계의 우리의 이 생활-현실에서 신의 자리는 손톱 끝과 같다고 본다. 연한살과 헤어져 하얗게 죽어 이제는 깎아버려야 할 그만큼의 손톱 말이다. 

 매튜 스튜어트의 전기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상의 삶이 무익하다는 느낌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철학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니체가 말했다시피 모든 철학은 개인적 수기일 뿐이다. 하지만 니체가 철학을 비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 않을까? 철학이 복권되고자 한다면 철학은 진리가 되기를 그쳐야 한다. 비참해진 뒤에야 철학은 장수할 수 있다. 비참은 산 자의 주제이지 죽은 자 또는 노예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학제 연구에 갇힌 오늘날의 철학은 비참하지도 않다. 니체의 지적에서나 그 근원에서나 철학은 동시에 철학자이다. 나는 그런 철학(자)들에게만 끌린다. 스피노자나 소크라테스, 그 이전의 철학자들(그들은 글을 쓰지 않았기에 철학 자체가 될 수 있었다) 등이 그렇다. 






나는 앞서, 스피노자에게는 은총이 없다고 했는데, 그에게도 은총의 희구는 있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적 신의 은총이 없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기술한 바니타스(Vanitas, 허무)의 감정은 단지 덧없는 불만족의 느낌이 아니다. 마니타스는 그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그랬듯이, 자신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서 ... 만일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음이 확실히 예견된다.'고 뼈에 사무치게 느낄 때, 비로소 철학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바니타스는, 절대적 무로 굴러 떨어질지 모를 가능성, 즉 아무런 의미 없이 무의미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 삶과의 비참한 조우이다."(매튜 스튜어트, 98) "철학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영구적인, 신성한 행복의 기반을 찾고자 하며,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저인 『에티카』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그의 완성된 철학의 주된 목적, 그러나 실제로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은총이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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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도 좋아
김병년 지음 / IVP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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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도 좋아』(김병년, IVP) 

讀後感思(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



인생이 어느 날 문득, 고통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돌연히 삶에 처 박혀 들어오는 것이 맞으리라. 고통의 대지가 삶의 구석에 붙박여 있는데, 거기 찾아가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낙타처럼 떠돌던 고통의 두 발이 약속 없이 내 삶의 문을 두드리거나 돌진해 들어오는 것이리라. 여기서 ‘문득’과 ‘약속 없이’에 내 응시는 오래 처한다. 

 고통과의 접점에 섞여 들어가게 되면 누구나 존재의 궁극 또는 존재의 결국이라는 타점을 잡게 된다. 거기엔 허무의 무미(無味)가 일정량 이상은 배음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동시에 희망의 좌표가 재설정되기도 한다. 내 정신에 박아 넣은 말 하나, “영화감독에게서 불안이 없다면 그려낼 이야기가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며, 희망이 없다면 형식이 없을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감독) 그리고 곁붙여 들여오는 인용...... 어쩌면, 신음. “삶의 불안과 우울은 내면의 거룩은 고사하고,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어둠을 불러내고 있었다.”(『바람 불어도 좋아』, 19면)

 김병년 목사의 『바람 불어도 좋아』를 거칠게 일독한 후, 1부 1장까지 다시 읽어봤다. “2005년 8월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리고 아내는 도무지 일어날 줄을 몰랐다.”(17면) 고통은 철저하게 몸의 이야기다. 몸에 뿌리 내려 정신에까지 몸피를 불린 검질긴 것의 이야기다. 이 책 역시 몸에 끼쳐 온 전면적인 난항으로 물큰해진 언어가 흘러나와 수렴된 ‘그 이야기’다. 부부라는 몸의 반쪽이 완전히 마비된 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남은 반쪽이 가족이라는 한 몸으로 살아냈고 살고 있는 ‘생활의 이야기다. 절반의 신경과 손으로 그려내는 자화상 연작이다. 

 거듭된 부정의 끝에 긍정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긍정의 경지가 아니라 긍정의 ‘순간들’이다. 삶이 계속되는 한 그런 밝은 순간은 박하나마 온다. 이 책은 “그 순간적인 종합”(리 호이나키)에 제련된 언어로 쓴 저자의 두 번째 책이다. 더욱 솔직해졌다. 부박한 예의는 버리고 진중한 경의를 담아 쓰여졌다. 우리는 신 앞에 던지는 투정에 있어 동시대의 언어를 너무 적게 갖고 있다. 『바람 불어도 좋아』는 그 빈약한 자산의 곳간에 더할 만한 책이다. 왜인지, 언제부터인가 나는 책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유사 착취와 같다는 절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저 배우고자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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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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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괴롭다. 위로는 우주가 아래로는 바다가 허공을 집어삼킨 오묘한 검은 빛으로 존재의 안쪽을 길게 잡아당기고 있다. 한 때, 우주는 기하학적인 상상력과 신학적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어둠이었다. 불가해한 동시에 물리적으로 가닿을 수 없는 광막함이니 무릎 꿇고 섬기면 되었다. 하지만 바다는 육지를 향해 악다구니를 놓지 못하고 사이렌의 노래 소리처럼 모험심과 정복욕을 부채질하는 용광로였다. 이전의 배움과 코 아래 깔아놓고 봤던 미래의 환영을 까무러트리고 휘저어 잡탕으로 섞어버리는 존재의 시험장이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신을 만나고 누군가는 악마에게 사로잡혔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장사 수완을 발휘해 돈을 벌어 부자가 됐다. 거룩한 잡탕! 경건의 먼지와 세속의 주춧돌이 거리낌 없이 몸을 버무려 이성을 압도하는 새로운 야만을 창조해냈다. 흰 고래는 그런 바다의 맹아였다.

 

 작가 멜빌은 의도적으로 흰 고래와의 대결을 마지막에 위치시킨 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줄창 늘어놓는다. 화자 이슈마엘은 고고학자가 돼 예부터 내려오던 고래에 관한 단편과 일화들을 수집하다가 메스와 확대경을 들고 고래 해부학자가 되더니 이내 신학자가 되어 신과 자연, 인간에 관한 장황한 토론에 끼어들기도 한다. 영탄조의 서사시적 어조와 황홀하게 난립하는 무수한 은유와 언어의 실험들. 호손의 소설에서 접하기 쉬운, 약간 정신 나간 듯한 청교도 정신의 예언자적 어투들 하며, 총 13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어디든 펴서 얼굴을 파묻고 읽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거기에 ‘소설’이라는, 정말 소심하게 조어된 이, 차라리 바늘로 찌르고 쥐어짜고 입으로 물어뜯고 싶은 허접한 말풍선을 붙여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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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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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은 다면적인 fact를 쓰는게 아니다. 
  비평은 순간의 정확한 확신을 쓰는 것이다."


1. 
 어떤 것이 속도를 취하게 되면 그것을 감각으로 붙잡기 힘들어지게 되고, 그 정체가 모호해지는 것이 물질계의 법칙이라면 때론, 멈추어도 알쏭달쏭한 것들이 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전시가치에만 쓸려들어간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닌 게 돼버린다. 최후의 속도 뒤에 본연의 모습을 잘라 먹어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권태가 멈춤의 정서이고 허무나 고통과 슬픔 끝의 메마른 기분도 멈춤의 감정 현상이라 치면 그것들 사이에 가름막을 세우는 일은 쉬운가? 가름막을 멈추어 둘 수가 있나? 한 가정의 여주인이 된 '나'는 "텔레비전을, 드라마와 게임 쇼를 많이 보았고, 나보코프의 소설을 죄다 읽는다거나 이어 발자크의 소설을 죄다 읽는다거나 하는 식의 나만의 프로젝트를 마련"(125면)하며 쭉 뻗은 낮잠같은 중년의 시간을 산다.


 2.
 「오스카 와일드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번은 그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화제는 권태(지루함)에 관해서였다.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다. 와일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기대에 찬 시선으로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그가 말했다. "나는 지루하면 좋은 소설을 한 권 집어서 벽난로 가에 앉아 그것을 읽겠소."
 실제로 그 두 가지, 즉 불타오르는 벽난로와 펼쳐진 소설은 서로 잘 어울린다.」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길 펴냄,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발터 벤야민 선집 9』,463면)


 3. 
 권태는 무의미의 노동이다. 노동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권태도 의미 있는 무의미다.


 4.
 앤드루 포터의 이 소설집 속 단편 소설은 모두 1인칭인데, 자고로 소설은 독백과 어울린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설은 인쇄된 글자로 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에 고립돼 있다. 자연법칙이다. 소설은 고독한 개인이 쓰고 읽는다. 소설이 연거푸 골똘히 말하는 것은 죽음인데, 고독에게 죽음만큼 가까운 것도 없을 것이다. 포터의 소설(나는 수록작 중 앞의 네 편만 읽었다) 속 1인칭 나의 기억 속 주인공들은 죽거나 죽을 뻔하거나 죽어간다. 혼자 말하는 입과 마음, 머리가 늘어놓는 글자의 짜임이 독자를 장례식자에 들어선 자로 만든다. 고독이 참기 힘든 건 부분들이 불협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독이 멈춤이고 존재의 중심이 된 근대인에게 빠깥 세상의 급하고 빠른 질서는 영원히 낯설다. 어쩌면 소설만이 근대인에게 있어 하나뿐인 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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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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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죽고, 그의 생을 반추하는 식의 '소설'이라는 외양. 하지만 저자는 허구적인 이야기는 자기가 쓰고자 하는 글이 아니라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난 소설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20면)


"그것은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휑해져 버린 얼굴 한가운데 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헐렁하게 느껴지는 진청색 양복에 감싸인 그는 누워 있는 한 마리 새 같았다."(12면)


 외양과 식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삶을 써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한 사람의 결심의 단락이 아버지의 죽음 다음에서 시작된거라면, 식마저도 사치일 수 있습니다. ("월요일이 되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 했던 냄새였다. 썩은 물이 고인 화병에 꽂혀 방치된 꽃들이 발하는 은은하면서도 끔찍한 악취였다.":13면) 지나친 사유와 세밀함이 본질을 가리기도 합니다. 모든 글쓰기는 사적인 것일진대 거기서 식을 꾸역꾸역 챙기다보면 볼품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에르노는 자기 글쓰기의 본령을 일찍이 간파하고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갔습니다.


"좀처럼 독서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그 두꺼운 책의 어느 부분에 이르면 아버지는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을 터였다."(122면)


 책을 읽는다거나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을 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의 완전한 주의 안에서 산만한 모든 것들은 지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독서와 집필이 버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지연시키지 않고 앞당기는 것만 같습니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다른 우선순위들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데, 추락에의 강박적인 즐거움(사회성 안에서 문자적 쾌락은 모두 추락입니다)은 내 정신과 육체의 급소들을 정확하게 투과합니다. 무한한 황홀함과 천재지변같은 공포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늦은 봄날, 활짝 핀 쥐똥나무 꽃의 향기, 11월에 개들이 낭랑하게 짖어 대는 소리, 바깥 날씨가 차가운지 여기까지 들려오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 그래, 아마 그랬으리라, 세상을 이끌고, 지배하고,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래도 이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나요>라고 말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누렸으리라."(84면)




<외울 대목>


"어느 일요일, 열두 살이었던 나는 미사가 끝난 후 아버지와 함께 시청의 커다란 계단을 올라갔다. 우린 시립 도서관의 문을 찾았다. 둘 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난 너무나도 신이 났다. 문 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은 조용했다. 교회보다도 조용했고, 마루는 삐걱거렸으며, 특히 뭔가 오래된 듯한 이상한 냄새가 우릴 감쌌다. 서가에로의 접근을 막은 아주 높직한 카운터에서 두 남자가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질문하는 동안 아버지는 가만히 있었다. 「책을 대출하고 싶어요.」 남자 중 하나가 곧바로 대답했다. 「어떤 책을 원하죠?」 집에서 우리는 빌리고 싶은 책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제목들을 비스킷 이름을 말하듯 쉽사리 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우리 대신 골라 주었다. 내게는 『콜롱바』를,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모파상이 지은 어떤 가벼운 소설을. 우리는 두 번 다시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그 책들을, 아마 반납 기한이 지난 후에, 반납해야 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125~1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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