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비평은 다면적인 fact를 쓰는게 아니다. 
  비평은 순간의 정확한 확신을 쓰는 것이다."


1. 
 어떤 것이 속도를 취하게 되면 그것을 감각으로 붙잡기 힘들어지게 되고, 그 정체가 모호해지는 것이 물질계의 법칙이라면 때론, 멈추어도 알쏭달쏭한 것들이 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전시가치에만 쓸려들어간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닌 게 돼버린다. 최후의 속도 뒤에 본연의 모습을 잘라 먹어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권태가 멈춤의 정서이고 허무나 고통과 슬픔 끝의 메마른 기분도 멈춤의 감정 현상이라 치면 그것들 사이에 가름막을 세우는 일은 쉬운가? 가름막을 멈추어 둘 수가 있나? 한 가정의 여주인이 된 '나'는 "텔레비전을, 드라마와 게임 쇼를 많이 보았고, 나보코프의 소설을 죄다 읽는다거나 이어 발자크의 소설을 죄다 읽는다거나 하는 식의 나만의 프로젝트를 마련"(125면)하며 쭉 뻗은 낮잠같은 중년의 시간을 산다.


 2.
 「오스카 와일드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번은 그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화제는 권태(지루함)에 관해서였다.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다. 와일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기대에 찬 시선으로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그가 말했다. "나는 지루하면 좋은 소설을 한 권 집어서 벽난로 가에 앉아 그것을 읽겠소."
 실제로 그 두 가지, 즉 불타오르는 벽난로와 펼쳐진 소설은 서로 잘 어울린다.」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길 펴냄,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발터 벤야민 선집 9』,463면)


 3. 
 권태는 무의미의 노동이다. 노동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권태도 의미 있는 무의미다.


 4.
 앤드루 포터의 이 소설집 속 단편 소설은 모두 1인칭인데, 자고로 소설은 독백과 어울린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설은 인쇄된 글자로 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에 고립돼 있다. 자연법칙이다. 소설은 고독한 개인이 쓰고 읽는다. 소설이 연거푸 골똘히 말하는 것은 죽음인데, 고독에게 죽음만큼 가까운 것도 없을 것이다. 포터의 소설(나는 수록작 중 앞의 네 편만 읽었다) 속 1인칭 나의 기억 속 주인공들은 죽거나 죽을 뻔하거나 죽어간다. 혼자 말하는 입과 마음, 머리가 늘어놓는 글자의 짜임이 독자를 장례식자에 들어선 자로 만든다. 고독이 참기 힘든 건 부분들이 불협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독이 멈춤이고 존재의 중심이 된 근대인에게 빠깥 세상의 급하고 빠른 질서는 영원히 낯설다. 어쩌면 소설만이 근대인에게 있어 하나뿐인 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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