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머무는 밤
현동경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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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디로 여행을 떠난 것일까?

분명 '여행 에세이'라고 들었는데, 전혀 '여행 에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디를 여행하는지 여행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정보도, 묘사도 없는 '여행 에세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행 에세이는 처음 만나봅니다. 

분명 그녀는 낯선 땅을 걷고 있고,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녀가 진짜 여행을 떠난 곳은 어떤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공간, 밤이라는 시간 속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기억 속에, 밤이라는 시간 속에 머물며 찾지 않으면 사라질 것들을 찾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한 저마다의 방법이 있는데, 이 책 <기억이 머무는 밤>이 여행 에세이인 것은, 그녀의 기억을 붙드는 그녀만의 기억법이 바로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떠나왔을 때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어딘가를 응시하며 사색하고 그림을 그려 가며 노래에 기억을 담고 냄새에 추억을 담아 오래 보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을 구태여 만들기 시작했다"(119).

그녀의 여행은 그렇게 기억의 창고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일상을 그대로 짊어지고 떠난 여행(27)

<기억이 머무는 밤>은

도시에 살고 도시에 살고 싶지만,
여행 중에는 도시에 가는 일이 그리 달갑지 않은 여행자의,
무거운 도시와 거대한 자연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유난히 신발이 빨리 닳는,
두 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자의, 
낡은 신발에 먼지와 함께 묻어온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쓰는 건 좋아하지만
읽는 건 좋아하지 않는 여행자의,
밤의 감성을 담은 일기장 같은 책입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찍을 수 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매일 같은 장면을 반복해 담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하는 여행자의,
빛바랜 사진 같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진첩 같은 책입니다. 


세상만큼이나
스스로에게 관심이 없는 여행자의,
자신을 위한 작은 위로 같은 책입니다.

뒷모습을 좋아하는 여행자가
자신의 뒷모습을 스스로 더듬어 본 이야기입니다.

서로 책을 바꿔 읽기 위해,
종이책을 좋아하는 여행자가 
교환을 목적으로 종이 위에 써 내려간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눈이 떠질 때 눈을 뜬다는 여행자가
어디든 바라보고 싶은 대로 바라보고
여행 에세이입니다. 

혼자 여행하는 여행자가 
할 거라고는 생각밖에 없을 때 했던 생각을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친구들이 놀러 오는 걸 좋아하고,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걸 좋아했던 외로운 여행자가의 
자신의 은밀한 외로움을
고백하는 이야기입니다. 

"기껏 채워 놓은 일상을 비워 내기 위해" 여행을 떠났으나
"결국 그렇게 일상을 그대로 짊어지고" 떠나는 바람에
언제나 고되었던 여행길의 기록입니다. 



부모님을 대신하여 저자를 키워준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
별거 아닌 우연의 연속이 나를 들뜨게 하는 그런 날(58).
별거 아닌 우연의 연속을 기대하게 하는 날 
열정을 강요 당하다가
대충 사는 게 당연시되는 세상에 
배낭 메고 먼 길 따나 온 한국인들의 마지막 대화가 끝끝내 한숨일 수밖에 없는 이유(43)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는 버릇이 없다는 속설이 있다(49)
나는 거꾸로 알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맡에서 자란 아이들은 예의가 있다. 
그녀가 가진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프지만 따뜻한,
그녀가 흘리는 후회의 눈물, 후회의 기억에 나도 울다.


"시간 위에 시간이 덮여 갈수록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변해 간다"(84).

<기억이 머무는 밤>은 세상만큼이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서, 변해 가면서도 변해가는 것을 모르고, 괜찮지 않으면서도 괜찮다고 믿는 당신에게,
"누군가의 능력은 부러워하면서 내가 뭘 잘하는지는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타인의 일에는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지만 정작 나를 위한 위로는 없"(91)는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입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나의 기억이 소환되는 순간, 그리하여 그녀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겹쳐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 당신은 괜찮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의심하고, 정말 괜찮은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읽지 않도록 합시다. 밤의 감성은 위험하니까요. 밤에 감성이 잘 못 터지면 오히려 자신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마흔일곱 번째 밤           시간

목적지가 없으니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길을 찾지 않으니 길을 잃을 이유가 없다.
길을 잃지 않으니 조급해 할 이유가 없었고
조급해 하지 않으니
그제야 시간이 곁에 머무르기 시작했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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