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웃고나서 혁명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세계 시민이여, 모든 불의에 혁명적 유머로 답하라!"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이라는 이 책의 제목 위로 무수한 인터넷 댓글들이 겹쳐졌다. 분노에 차서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고, 욕설을 퍼붓는 대중들의 '화', 그 화의 기운에서 혁명의 싹이 태동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일단, 웃고나서 혁명>하자는 저자의 발상이 신선하다. "서슬 퍼런 계엄령 하에서도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글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터키 문학사의 거장다운 '여유'가 속된 말로 "쩐다!" 풍자소설의 해학을 극대화한 제목이겠지 생각했는데, 아니다! 이 사람, 정말 웃으며 혁명한 것은 아닐까. "세계 시민이여, 모든 불의에 혁명적 유머로 답하라"는 표지의 빨간 글귀가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내 안의 화를 좀 누그러뜨리고, 건설적인 혁명의 기운을 부여하는 듯 하다.

<일단, 웃고나서 혁명>은 마치 <이솝 우화>를 읽은 듯한 기분에 젖게 만든다. '교훈적'인 성격 때문일까. 이 책은 정치 사회의 부조리, 결점, 모순, 불합리 따위를 검은 웃음으로 그려내며 조롱한다. 신랄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화살은 정치세력을 향해서가 아니라, 대중을 향해, 바로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은 마지막 이야기 <황소가 승자다>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첫 이야기를 보자. <우리는 외메르 영감을 뽑지 않겠다>고 수없이 약속하고 서로 굳은 결의를 다졌으면서도, 결국은 약삭빠른 외메르 영감에게 넘어가 외메르 영감을 다시 이장에 선출하고 만 마을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외메르 영감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일단, 웃고나서 혁명>은 위정자, 국가 관료와 공무원들, 언론의 코미디 같은 행태를 코믹하게 풍자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비상식적 행위가 용납되어지는 것은, 끊임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매한 '나' 때문이라는 자각이 화들짝 나의 뇌리를 강타한다.

마지막 이야기 <황소가 승자다>를 보자. "동물들 사이에 빨리 달리기 대회가 열릴 참이었습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장 빨리 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거북이조차 말이지요.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발이 가장 빠른 동물은 사냥개와 토끼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모든 동물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어디서나 그렇듯이, 가장 뛰어난 강한 존재를 질투하는 누를 수 없는 적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냥개와 토끼가 가장 빨리 뛴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둘이 대회에서 우승하기를 바라지 않았지요"(183).

맞수에 대한 적의, 가장 뛰어난 존재에 대한 질투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동물, '우리'의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합리성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앗아가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만 우승하지 않는다면, 아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황소'가 우승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된다.

"모든 동물둘이 왕이 될 자격도, 능력도 없으면서 저마다 동물의 왕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뛰어나고 능력을 갖춘 이들은 질투의 대상이 되는 법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사자와 호랑이를 질투했고, 곱게 보아 넘기지 못했지요. 그렇게 해서 동물의 왕 후보로 황소가 지목되었습니다"(191).

작가는 분명 터키 상황의 체험을 글로 풍자한 것일텐데, 이 책의 말대로 "오늘 대한민국의 9시 뉴스"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회의 부조리를 조롱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 '통쾌'하지 않은 것은 시대와 문화와 국가를 초월하여 가진 자들의 횡포와 기득권층의 부조리와 결점과 모순이 바뀌지 않는 사회를 통탄함이며, 그들을 용납하는 비겁하고 우매한 시민이 바로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풍자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옮긴이의 말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잃어버릴 것'이 족쇄만이 아닌 우리에게 '혁명'은 이미 낡은 이슈일지도 모르고, 귀찮은 주제일지도 모르고, 맥이 빠져버린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어린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한숨보다 이를 악물고 토해내는 뜨거운 결의가 더 힘차게 터져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일반 풍자소설과는 달리 '그들'을 향한 비판적인 조롱보다 '나'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일단, 웃고나서"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혁명"을 조용히 되새겨보면 어떨까.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라 해도, 아무도 모르는 혁명이라 해도, 가능성 없는 혁명이라도 해도, 그래도 언제나 존재해왔던 저항 세력의 작은 정의가 이만큼이라도 우리 사회를 지탱해왔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이 참에 "모든 불의"에 파괴적인 분노만이 아니라, 좀 더 유연하고 활기찬 "혁명적 유머"로 대응할 수 있는 내공을 기르는 것도 뜻깊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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