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반장 추억 수첩 - (13)
: 98년 12월
요즘 대외적으로 군 사고가 많이 일어나 떠들썩하다.
나이키 미사일이 엉뚱한데 떨어져,
사병이 불발탄 가지고 놀다 사고나,
해병대에서 조명탄을 잘못 쏴서 민가에 떨어져...
오늘은 또 수류탄 폭발사고가 났다 한다.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줄줄이 잘리고
국회의원들은 연신 군을 비난한다.
군 기강이 헤이 해졌다느니, 국방부 장관을 사임시켜야 한다느니...
제기랄
그 작자들 중에서 군대 제대로 갔다 온 사람이 몇이나 되고
그 작자들 아들들은 또 군대에 가기나 했을까?
자격도 없는 것들이 사람 열 받게 해서 겨울을 따뜻하게 한다.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우리들 사기는 뚝 뚝 잘도 떨어진다.
절대로 우리 군대를 우습게 보지마라!
/* 대한민국 군대가 세계 최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날고 긴다는
국회의원 아들
연예인
재벌3세
언론사 사주 아들
스포츠스타들도
통과 못하고 떨어진 '신검'을 가소롭게
통과한 국군장병 수가 60만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_-;)
국방부에서 모든 육해공군을 특수부대화 하는
작업에 들어갔나 봅니다.
요즘 야구선수들과 연예인들 병역비리 때문에
많이 시끄럽습니다.
그러게 남들 다 갈 때 같이 갔다 왔으면
요즘 같이 얼굴 붉힐 일이 없었을 텐데
괜히 꼼수 부리다가 독박 썼지 않습니까! 꼬시다 짜슥들!!!
얼마 전에 국회에서 발언을 하다가 쓰러진 의원이
한명 있죠? 국가보안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애국자(?) 아저씨요...
그렇게 나라를 사랑하고 안보를 걱정하는 분한테
어째 군면제를 받은 아들이 3명이나 있는지... (면제율 75%).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자식을 사랑했나 봅니다 그려~~
정승화라는 장군님은 빽을 써서(?) 장남을 월남전에
참전까지 시켰는데... 쩝...
하긴 정승화 장군님 같은 경우도 진짜 별난 경우이지요.
언제쯤 우리는 사회 지도층(솔직히 이런 표현 쓰기가 싫지만...)을
존경하고 믿고 따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대한민국 해병대가
당나라 부대라는 소리 듣는 게 더 빠를까요??? --;
아무튼 그 당시 국회의원들이
J랄 지R 하는 거.. 정말 싫었습니다.
쒸파 자식들 군대나 보내고 그런 헛소리를 했나 모르겠습니다. */
: 자대 전입 와서 98.12.17까지 받은 편지를 통계 내어 봤다.
아버지 6통, 주희 15통, 큰 누님 4통, 작은 누님 1통,
범장이 7통, 동우 1통, 진혁이 4통, 태길이 1통
총 39통....
/* 편지 하니까 생각나는군요.
군 입대 하기 전이였죠.
제 위로 누님이 두 분 계신데
이런 말을 자주 했죠.
"니 입대하면 우리 학교 여학생들을
총 동원해서 편지 써줄께..." 라고요.
그런데.. --; 제대할 때까지
큰누나는 4통 작은 누나는 2통이 전부였습니다. (-_-;)
그나마 군대있는 저를 챙겨준 건
하나뿐인 여동생 밖에 없었죠. T-T
뭐 편지 내용이야
'오빠 보구잡다'
'오빠 뭐해?'
'오빠 뭐 필요한 거 있어'
거의 이런 내용 이였지만...
무관심한 누님들보다는 훠어얼씬 예뻐 보였죠.
아무튼 군인한테 제일 큰 선물은
첫 번째가 '전역증'이고
두 번째가 '휴가증'이고
세 번째가 '편지'인 것 같았습니다. ^^; */
: 98년 12월 중순경...
야간 보초 근무를 나갔다가 부사수로부터
여자에 대한 이런 저런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1. 여자의 눈물에 정말 속으면 안 된다!
여자는 아무 때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동물이라나?
내 부사수도 눈물에 많이 속았다고 한다.
조심하자
2. 진정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랑 자지 말아라!
이 이야긴 다른데 서도 들었던 것 같다.
: 무소유는 모든 번뇌(?)의 해결사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군 생활 가운데 휴가가 가진 의미는
모든 번뇌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휴가 생각을 접어두고 생활할 땐 군생활의 모든 것이 순조롭다.
시간 잘 가겠다. 의식주 걱정 없겠다.
무슨 애로 사항이 있으랴...
그런데 요놈의 휴가란 놈이 슬슬 고개를 들라치면
그 때 부터 군 생활은 꼬이기(?) 시작한다.
우선 그렇게 잘 가던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간다.
휴가 가는 전날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 고대하며 위병소를 나가도
별다른 감흥은 없다. 그저 담담할 정도...
기대에 비해 결과가 취약해서 사람을 실망시킨다.
또 한 가지...
뭘 한다, 한다 하며 계획을
잡았건만 제대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예전의 나태했던 내 모습 그대로이다.
돈 씀씀이도 무시 못 한다.
무엇보다 복귀할 때 받게 되는 정신적 타격이 정말 크다.
위병소와 가까워질수록 느끼게 되는
그 이상야릇한 압박감과 답답함...
마치 군 입대 할 때 바로 그 느낌!
그러면서도 막사와 가까워 질 때 느끼게 되는
꼭 일 마치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서는 느낌은
정말 사람을 혼란, 황당하게 한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계속되는 '한 턱 내야해...'라는 의무감(?)
마지막으로 다시 군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
결코 즐거운 일만 있는 휴가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많은 이들은 휴가에 목숨을 걸고 자기 자신을 얽매이게 한다.
마치 많이 가진 자들이
더 많이 소유하려고 자기 자신을 얽매이게 하는 것처럼…….
차라리 모든 걸 잊고 군 생활에 충실한 것이 행복하지 않을까?
: 98년 12월 24일 자정이 좀 안될 즈음...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건빵과 자판기에서 뽑은 생강차 들고
담배 피는 계단으로 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건빵 봉지를 뜯어 의자에 놔두고
제사(?)를 지냈다
3년 전 먼저 하늘로 가버린 '야속한' 성중이 형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고 슬픔,
아쉬운 감정들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서 성중이 형에 관한 것들이
잊혀질까봐, 잃어 버릴까봐 두렵다.
나한테 친형 이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던 성중이 형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지만...
지금 나한테 시간은 해결사가 아닌
동화 속에서 기억을 잃게 하는 마술약 같은 일만 할 뿐이다.
기억을 덮어 버리기엔 성중이
형은 나한테 너무 나도 크나 큰 존재였다.
가끔 가다 꿈속에서라도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내가 어른이 되어 가는지,
나 자신과 현실만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 가는지,
이젠 성중이 형을 생각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 친하게 지냈던 형님 중에 성중이 형이라고 있었습니다.
9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고로 그만 돌아가셨지요.
그 형님 장례식에 가보지 못했던 게
정말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습니다.
"저 세상"이라는 곳이 정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다시 만나죠.
제가 군대에 별 탈 없이 잘 갔다 온 것도 아마
성중이 형님이 저를 보살펴 줬기 때문일 겁니다. */
: 98년 12월 25일.
군대에서 2번째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지만
크리스마스 기분은 전혀 나지 않는다.
나야 뭐 기독교를 믿지 않으니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매달릴 것은 없지만 그래도 좀 그렇다.
뭐 작년 크리스마스 때
신교대에서 관물대에 다리 올리고
한 시간 동안 얼차려 받았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양호한 거지만.... --;
내년에도 크리스마스를 군대에서 보내야 하니... 쩝...
/* 97년 12월 25일이었죠. (^^;)
신교대 6주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
롤링 페이퍼라나요?
종이 한 장에 돌려가면서 그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거 있잖아요...
내무실에 있는데 기간병이 A4용지 2장을 주면서
그간 조교랑 내무실장한테 하고픈 말이 있으면 적으라고 하더군요.
동기들 전부다 서로 눈치를 보더니 틀에 박힌...
"그동안 저희 가르친다고 수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항상 몸 건강하세요."
"광주로 놀러 올 일 있으면 XX를 잊지 말아주세요"
라고 아부성 글을 적고 있었죠.
지극히 현명한 판단 이였는데... 허 허 허
그런데... --;
조교 중에 제일 막내 조교가 와서 바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야! 다 끝나는 마당에 뭘 눈치보냐?
이럴 때 욕 안하면 언제해?
안 그래?
그리고 너희 그거 아냐?
너희 계속 그런 식으로 적으면 내무실장한테 '벌점'받는다.
괜찮으니까 욕 적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마음껏 적으라고.. (^o^)/
다른 조교들도 다 이해해 주니까"
그 말을 듣고 순진하게 믿어버린 동기들.
"야! 사회에서 만나면 아는 척 하지마라. 죽는 수가 있다."
"야이 XXX들아 내가 좀 참았기에 망정이지. 썅!!!
사회에서 만나면 칼부림 날지 알아라!"
"부산에 내려왔다가 부산 앞바다에 둥둥 떠 댕기는 수가 있다."
"제대하고 몸조심해라"
"머리를 갈아 마시겠다..."
(요건 조교들이 저희한테 자주 썼던 말이죠.)
등등등
아무튼 욕이란 욕은
다 적었습니다. 서로 신이 나서 말이죠.
그런데....
그날 점호 시간
조교들 전부다 내무실로 쳐들어와서 한바탕 하더군요.
"이 개XY들 뭐 어째? 그래 이 씹XY들아 해보자 엉?!"
"이 쌕이들 잘해주면 안돼
기껏 생각해서 좀 봐줬더니
무서운 게 없지??? 앙?
너희 아직 퇴소 안했어 이 쌕이들아~~~"
"사회에서 만나면 조심해라고?
그래 이 쌕이들아 우리집 주소랑
전화번호 알려줄게
인천시 ~~~~~~
XXX - ABCD - EFGD이다
이색이들아 빨리 받아 적어!! 빨리 받아 적으라고!!!"
"업퍼 씹돽이들아!
주먹 쥐어!!!
다리 관물대에 올려!!! "
흘 흘 흘
그날 밤 정말 따뜻하게 잤습니다.
사람 체온으로 실내를 뜨겁게 데워 보셨습니까?
사람 체온도 무시 못 합니다.
내무실장이 그 때 얼차려를 시키며 소선(훈련병 반 대표 같은거..)한테
저희가 썼던 걸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흘 흘 흘 얼차려 받는 중이었지만 정말 골 때리더군요.
소선은 그 때 얼차려 받으랴, 쏟아지는 웃음을 참으랴
정말 죽을 맛이었다고 했습니다. 웃음 참는 게 보통 힘든 일입니까?
조교들끼리 짜고 한건지 아니면 그 때
그 막내조교가 벌인 단독 범행인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입니다 ^^;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그래도 퇴소식할 땐 서로 서로 웃으며 헤어졌습니다.
그 당시 저희 내무실장이
결혼을 했는데 동기들이 스스로 돈 걷어서
부조금도 냈구요 ^^;
그 때.. 퇴소식 마치고 자대로 가기 전에
내무실장이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만약 너희들이 전쟁터에서 다리가 다치게 되어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 너희들을 끝까지
끌고 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평소 너희를 가장 갈구고 가장 못 살게
굴었던 고참일거다.
자대가면 고참 말 잘 듣고 열심히 생활해라.
.....
그리고 한 가지 더!
누가 뭐라고 해도
육군 조교가 제일 힘들어 씨발...."
정훈철 내무실장님...
지금은 뭐하고 계시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