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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새길아카데미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각각의 철학 사상과 이론들이 '무엇을 문제로 설정하는가'(사유를 전개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화두의 방향)에 주목하여 근대 이후 사상(근대 이후라고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사실상 근대 이후 사상을 다루기 위해 플라톤에서 중세신학까지도 폭넓게 끌어들이고 있다)들을 유기적인 흐름으로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철학사가 결코 '독창적 사상들의 시대별 나열'이 아니라, '역동적인 기승전결이 유구하게 반복되는,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영원한 이야기'로서 비로소 와닿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신으로부터 독립해 그 위상을 떨치던 근대의 주체가 절정과 위기의 순간을 거쳐 마침내 해체되고, 해체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밤하늘에 터지는 폭죽처럼 외려 다양한 담론의 분수령이 되기까지, 이 책은 그 거대한 맥락을 조곤조곤 짚어가며 그야말로 한 편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철학자 각각의 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에만 골몰해 있던 차에 이 책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근대 이후 철학적 사유의 흐름과 맥락을 어느 정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한편, 이 책에서는 탈근대를 예견한 근대 철학자로서 스피노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예전에 학교에서 서양철학사 교양수업을 들을 때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막연히 들어서 '스피노자의 사상이 대단히 불교적이고 탈근대적으로 읽히는데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교수님의 답변은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스피노자는 근대인이었고, 그의 범신론은 기계론적 범신론에 가까우며, 따라서 그의 사상은 불교보다는 라이프니츠와 오히려 친연성이 있다'고 하셨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내가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교수님의 말씀에 재반박을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