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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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들을 읽어가겠다고 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 책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가난한 캐테와 프레드의 이야기다. 그들은 전쟁 이후에 가난해졌고, 비참해졌고, 회복이 좀 불능한 그런 부부이다. 그것은 물론 모든 소설이 관통해야만 하는 인간의 정신적인 결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끊임없이 그들의 상황을 '묘사'하기보다는 '보도'하고 있으므로 독자가 인물의 정신적인 결여따위를 진중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지켜보고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해야겠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걷고, 버스를 타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만나기위해 호텔로 향하고, 심지어 데이트를 하는 와중에(어쩌면 데이트를 하는 중에 가장) 전후 독일을 둘러싼, 광고문구들이 그들의 삶에 개입된다. 불쑥, 하늘에서 비행기가 연기로 하얀 광고문구를 그리고, 건물 벽에 글자들이 붙어있고, 갑자기 채소장수가 나타나 양배추가 얼마라고 외치는 식이다. 그 모든 것이 현실이 얼마나 기이하고, 소설이 얼마나 진지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잡음이 많다고 해야할까. 지금 내가 이 소설에 대해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어느 거리에서건 그런 소리들이 누군가의, 진지해져보려는, 좀 더 행복해져보려는, 아니면 불행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여기는 이들의 귀를 뚫고 이미 그 삶 속에 추가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오늘 거리를 나간 동안 분명 그런 소리들을 혹은 광고문구들을 지나쳤을 테지만, 그것들 때문에 내가 어떤 타격을 입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그것대로 살아있고, 나는 나대로 살아있다. 다만 소설에서 그 소리들은, 너무나 눈에 띈다. 그 소리들은 끊임없이 다른 목소리로 반복되지만, 같은 목적을 가진 것들이다. 소설이 그들의 시간-소설의 내용상 2일에 불과한 시간-을 보도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것 때문이다. 이전에 읽은 뵐의 <카타리나 불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임에는 분명해보인다. 

  

아이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이 두 부부에게서, 몹쓸 느낌을 받는다면, 아마도 그들이 가난이 아닌 불행을 그 자식들에게 물려주려하기 때문이다. 측은하게 바라보고, 측은하지 않아보이는 아이들을 걱정하고-너무도 정상적인 미소를 짓는 그들을 걱정하고-, 내심 아이들의 얼굴이 어둡기를 바라는 캐테가-그러나 소설에서 이런 식의 노골적인 정서 표현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무서웠다. 캐테는 다른 이의 불행을 통해 보상받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소설과 현실의 맥락을 잇는,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약100년 쯤 전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시몽을 바라보면서 했던 생각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일 뿐이다. 아마도 캐테가 그런 여자로 보였던 것은, 갑자기 사강의 소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캐테를 아이들을 끔찍히 사랑하는 그저 어머니인 여자로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에게는 욕망이 좌절된 채로 남아있고, 어떤 삶에 대한 갈급증이 보인다. 어쩌면 그 삶은 프레드와 단 둘만 남아있는 상황이 연속되는 그런 삶이었을까. 그토록 자신을 아프게 하는 프레드-아픈 만큼 계속 사랑하고, 버릴 수 없고, 품을 수도 없고, 불행을 나눠가질 수도, 함께 행복해질 수도 없는 그 프레드-와 유보된 상태의 사랑을, 지속하고 싶어하는 캐테가 읽혔다. 그를 위해 더 예쁘게 보이고 싶고, 매춘부로 오인될지라도 꼬박꼬박 그를 만나기 위해 호텔을 찾는 것이다. 캐테는 이미 너무 많이 초라해진 여자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레드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반하는 남자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프레드는 남편이나 아버지로 불리기에는 다소 부족한 사람이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불행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분명히 해피엔딩이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끝이었다. 다시 처음, 첫 페이지로 돌아가 소설을 다시 시작하고 싶게 만들었다. 아주 단순한 끝이지만, 단순하지 않으면 어떻게 끝냈을까 싶은 소설이었기에 이런 끝이 좋았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쩌면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있는 소설인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아직도 프레드가 캐테와 한 침대에 누워,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그녀가 누워 있다는 이유로 상처받았던,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불을 끈 방에서 보이지 않는 그녀가 등을 돌리고 누웠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어보는 프레드.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약해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를 견딜만큼은 힘이 있기에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이 소설을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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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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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복도에서 놀고 있다. 그 애들은 조용히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떠들고 놀도록 해줘도 더 이상 시끄럽게 놀지 못한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 애들은 이제 마분지 상자를 끈으로 연결하고는 복도의 끝까지 닿는 기차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다. 역을 만들고, 양철통과 나무토막을 싣고 다니고, 저녁 먹을 때까지 그렇게 놀 모양인 게 분명하다.-28쪽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던 탁자에서 눈을 떼자 싸구려 복제 그림이 걸려 있는 방의 벽이 눈에 들어온다. 르누아르의 감미로운 여인 얼굴이다. 그 그림은 낯설게 느껴지는데, 너무나 낯설게 느껴져서 30분 전에 어떻게 그 그림을 견뎌 낼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정도다.-34쪽

내가 느끼는 고통은 어떤 안도감, 두 아이가 삶으로부터 보호받았다는 안도감과 뒤섞여 있다.-53쪽

그리고 프레드의 얼굴이 보인다. 내 마음에 삶을 불어넣어 주는 사랑이 없다면 쓸모없을지도, 쓸모없었을지도 모르는, 사정없이 늙어가며 삶에 파먹힌 얼굴. 다른 남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모든 것을 일찍부터 무관심하게 여기는 남자의 얼굴.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간 이후로 그의 모습이 자주, 정말 자주, 더욱 자주 보인다.-58쪽

나는 전화를 거는 데 드는 돈을 아끼기로 결심하고, 방을 찾기 위해 천천히 시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방을 구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대규모 축제 행렬을 보려고 외지인들이 시내에 와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그냥 관광차 시내를 찾은 사람들이 계속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각종 회의에 참석하느라 국내 지식인들이 시내로 들어왔다. 외과 의사들과 우표 수집가들, 카리타스회는 매년 관례처럼 성당의 그늘 아래 모이곤 했다. 그들로 인해 호텔이 붐볐고, 물건 가격이 올랐으며, 부대 비용이 낭비되었다.-66쪽

말끔하게 솔질한 그의 수단, 잘 손질된 그의 손, 깔끔하게 면도한 뺨, 이러한 것들이 초라한 우리 집을, 맛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하얀 먼지처럼 우리가 10년 동안 들이마신 가난을 생각나게 했다.-68쪽

나는 아이들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애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나는 내게 지워진 낯선 삶을 들여다보듯 내 삶의 그러한 일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손에 초를 들고 천천히 엄숙하게 내 좁은 시야를 지나고 있는 내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알게 된 사실, 즉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74쪽

나는 아이들을 잊을 수 없었다. 두 눈을 감아도 아이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 아이들, 사내애는 벌써 열세 살, 여자애는 열한 살이다. 판에 박힌 일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창백한 두 아이.-77쪽

"애들한테 줄 초콜릿이 있어. 풍선도 사줄 거고, 아이스크림도 사줄 거야. 애들한테 줄 돈도 가져갈 거고. 애들한테 때려서 미안하다고 말해 줘.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는 말 못해요, 프레드."
"왜 못 해?"
"애들이 울 거예요."
"울면 어때서. 내가 미안해한다는 걸 애들이 알아야 해. 이건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이야. 제발 그 점을 잊지 말아 줘."-82,83쪽

"좀 꾸미고 다녀요." 주인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랑을 위해 꾸미도록해요."-87쪽

지금은 지독히도 우울한 일요일 오후의 몇 분, 무한히 긴 몇 분이다. 기진맥진한 숨소리와 담뱃불 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나서 시작되는 침묵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반죽을 식탁 위에 내리치고, 가능한 한 많은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굴리고 다시 그것을 두드린다. 나는 사랑을 나눌 공간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백만의 남녀들을 생각해 본다. 반죽을 넓게 펴고 가장자리를 높게 개고는 케이크 반죽 속에 과일들을 다져 넣는다.-89쪽

"가끔씩," 소녀가 입을 열었다. "얘가 무슨 경험을 할지, 어떻게 살지 상상해봐요."-119쪽

어떤 직업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려면 진지한 태도가 필요한 데 내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전쟁 전에 오랫동안 약방일을 했는데 지루해서 사진관으로 옮겼다가 곧 또 싫증을 냈다. 그다음에는 책 읽는 취미도 없으면서 사서가 되려고 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책을 좋아하는 캐테를 알게 되었다. 캐테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그곳에서 일했고, 우리는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132,133쪽

"내게 좋은 점이라곤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 밖에 없어."-155쪽

신은 이런 구역질 속에서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인 듯 했다.-166쪽

당신은 전쟁이 얼마나 지루한 지 모를 거야.-171쪽

이해해줘야 해.

당신이 정말 임신했다면 난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만큼 부드러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173쪽

그 집은 정말 크고, 휑하고 아름답고 운치있어.
난 그런 운치 있는 집이 싫어-183쪽

그녀가 자기 손을 쥐도록 놔둬서 기뻤다.-184쪽

이제는 그녀가 내 손을 찾아 꼭 쥐었다.-184쪽

"가끔 자기 아내랑 잠을 잔다고 해서 그 여자랑 결혼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전쟁 때 당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군인으로 사느니 더러운 지하실에서 나랑 사는 게 더 낫겠다고요. 그런 편지를 썼을 때 당신은 청년이 아니라 이미 서른여섯이었어요. 가끔 전쟁이 당신을 이상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요. 전에는 당신도 달랐어요."
나는 정말 피곤했다. 그녀의 견해가 옮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나를 슬프게 했다.-187쪽

당신 마음을 감동시킨 여자들이 또 있어요?-191쪽

나는 그녀의 다리와 초록색 치마, 초라한 갈색 재킷, 초록색 모자를 보았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부드럽고 슬픈 옆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두 개의 유리벽 사이로 보이는 그녀는 옷을 바라보면서도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고, 그 여자의 옆모습을 계속 바라보았고, 불현듯 그녀가 캐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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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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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전에 산 책.

매일 조금씩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종류의 책은 잘 읽지 않아 좀 헤맸다. <88만원 세대> 이후로 사회과학서적이라고 불릴 만한 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으니.

 

나에게 이 책은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인간인지를 자각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자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했다. 이 책의 긍정적인 효과라면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클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내가 감동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책이 지금 나에게 강요된 그것이 '열정'이고 그 열정은 '착취'된/될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는데도, 왜 이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안도하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으며,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함을 더욱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왜 일까?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여전히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이 세상이 가장 원하는 열정노동자 인지도 모르겠다.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권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의 참여라면 참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소비자로 인식한다(지그문트 바우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 결국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상당히 자율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자율이 아니라 언젠가 닥칠 노동으로부터 유보된 삶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 신분을 감추는 사회,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노동'으로 환원되는 어떤 것일 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며 창조적이지 않으며 늘 누군가에 의해 조종받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국 부끄러운 것이며, 그 수치심의 이면에는 '노동자' 신분으로 전락-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결코 상승이 아니므로-할 수 밖에 없었던 '열정'의 부족이 있다, 는 그 스토리가 사실은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 역시 내가 '노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대학원을 다니는 시절까지, 결코 '일=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노동'으로 벌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노동이 아닌 '창작'으로, 말하자면 '꿈'으로, 그러니까 근본적으로는 '열정'으로 벌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열정=창작=노동의 구조로 가게 되리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사회구조라는 것을 단순화해서, 내가 편할 대로 생각했고, 그 편한 생각 덕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난 계속 공부하고 싶어, 라고 부모님한테 말씀드리고 '그럼 네가 벌어서 해라' 라는 말을 들을 때, 겨우 그 정도가 내 현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공부할 처지가 될 수 없게 되자, 공부하고 싶어라는 말이 단지 변명이었고, 그저 나의 안이한 생활을 연장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맹렬한 공부가 시작되었고 내심 이 열정이 언젠가 보상받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에 부딪칠 수록 그것이 얼마나 깜깜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더 공부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거의 노동에 가까운 공부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지 않고서는 결코 어디서도 생존할 수 없으며-그것은 꼭 생계만이 아니라 정신적 열등감으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에서도- 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라도 해야하고, 우리 부모님의 노후를 잠깐이라도 생각하면, 지금 내가 하루에 12시간은 아니어도, 못해도 6시간 정도는-일 외에-공부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나도 어른이란 것이 되야 하지 않나..그런 생각) 그런데 이게 잘못 된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책에서 언급한대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정규직 취업을 목표로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공부하는 시스템으로 내재화 되어 있으므로, 나는 또 그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열정노동'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렇게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몰아가는 구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얼마전 배우 김여진 트윗에서 가장 강력한 반값등록금에 투쟁은 새 학기가 시작 될 때 단 한 명의 학생도 대학에 등록하지 않는 것, 이라는 식의 글을 올린 것을 봤다.(정확한 것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것은 단 한 명도 대기업/공사/공단/외국계기업에 입사원서를 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원한 말이지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싶고, 아마도 내가 고등학생이라면 대학에 가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나마) 희망적인 미래란, 나라는 개인을 책임져 줄 수 있는 튼튼한 회사에 들어가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입고 싶은 거 입고 사는 삶이다. 지금 여기서는 달리 다른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런 나도, 책을 읽고 나니 어떻게 해서든 열정노동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한다. 그렇지만 굉장히 소심한 편이고, 실천력도 없어서, 광장에 나가 피켓 들고 서 있는 그런 것은 용기가 없어서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은, 돈을 벌어서, 돈 주고 사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그런 것은, 설령 접근성이 용이하더라도 하지 말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그런 '오타쿠'가 되는 것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그래서 유일한-방법이었다. 한정된 돈으로 한정된 문화를 누리더라도, 너무 많은 문화를 접할 수 없더라도/ 제 값을 주고 즐기면서 창작노동에 열정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이 안 죽게 하는데 0.0000001%라도 도움이 되자는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가 나에게는 진짜 '열정'이고, 내가 지금 '열정노동'으로 착취되어야 할 미래로 나아가는 이유이고, 약간의 대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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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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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는 이렇게 온갖 문화적 실험과 시도들이 시작되었다. 이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절대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된 뒤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었으며, 집단에 매몰되어 있던 개인성을 '문화'를 통해 구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향유는 어느 정도 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67쪽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지식으로 부르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들을 신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농업, 어업, 임업, 중소기업, 특허, 근로, 교육, 문화 예술, 금융, 가정 (농어민, 경영인, 공무원, 자영업자, 기타 분야는 현재 폐지) 등의 분야에 걸쳐 총 3580명을 신지식인으로 선정하였다.
'신지식인 선정'과 '문화 산업 육성'은 지식과 문화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고자 했다는 면에서 같은 맥락이었다. 한국 사회의 지식과 문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상품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상품화될 수 있는 것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뒤로 한다고 하더라도-지식과 문화를 기반으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우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는 물론이고 '성과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 영역들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책들은 당장의 '부가 가치'만을 고려했을 뿐, 문화의 기본적인 토대에 대한 성찰은 전무한 것들이었다. -172쪽

제2의 빌게이츠나 이찬진을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지만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이 시대의 명제를 따라 '한 우물만' 팠던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제야 '이제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의 시대'라며 인식을 전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애써 팠던 우물에서 기어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회는 그들에게 '젊으니까 괜찮아'라는 공허한 위로만 던졌다.
-181쪽

당신은 지금 마시멜로를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달콤한 위로,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면 언젠가 얻을 수 있다는 조언, 그것들의 진짜 의미는 사실 '그러니까 혼자 알아서 하세요'라는 냉정한 외면이다.-185쪽

열정 노동의 확산은, IMF사태라는 국내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창궐이라는 전 세계의 상황을 근간으로 한다. 국가와 자본은 사람들의 열정을 필요로 했다. 동시에 신자본주의는 '불안정함'이라는 운명을 새 시대에 부여했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요구되었다. 면접장에서도, 구직자가 열정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인사 담당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널 대체할 사람은 많아'라고 이야기했다.-187쪽

'일도 많이 시키고, 돈도 안 주어도 되는'-착취에 최적화 된-상황이 펼쳐졌다-190쪽

영국의 문화 이론가 테리 이글턴은 "신기하게도 이 세계는, 구성원 대부분을 쫓아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선택 가능한 항목은 단지 두 가지이다. 착취당하거나, 그조차도 당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세계는 넓어졌으나 갈 곳은 없어진 역설적인 상황,-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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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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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도서관에 갔다가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읽었다. 하인리히 뵐은 굉장히 유명하다는데, 나는 그의 책을 처음 읽는 것이었고, 다른 도서관에서 <9시 반의 당구>를 슬쩍 본 이래로, 그의 소설을 모두 읽고 말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그래서 그 토요일의 오후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 갔다가 하인리히 뵐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나는 본의 아니게 이 얇은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정말로 하루만에 먹어치우듯이 다 읽어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단지 눈을 뗄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잠깐 눈을 뗄 틈도 주는 그런 소설이었지만-그런데 이거 말하자면 소설 같다는 느낌보다 여기 저기서 오려내서 사건을 이어 붙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았다.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조심하세요. 소설 내용이 약간 들어가 있습니다.)간단히 이야기하면 카타리나 블룸은 평범하고 성실한 여성인데 살인자가 된다. 왜냐면 황색언론이 그렇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언론은 거의 독재적이고 자기 나름대로 객관적이라서 굉장히 주관적일 수도 있다. 진실은 편집되고 사람의 인격은 추락하거나, 어쩌면 완성되기도 한다. 읽으면서 ..진짜 사람이 사람한테 질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카타리나의 아픈 어머니를 찾아가 카타리나가 범죄자와 연관이 있으므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겠다고 추궁하는 기자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참 나쁘네, 했다. 의사가 면회를 거절했는데도, 페인트공으로 위장해서, 거의 죽을 것 같은 사람한테 가서 그 딸의 심각한 상황 혹은 오해되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진실을 왜곡하거나 탈락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들이댄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죽고 만다. 카타리나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카타리나는 총을 손에 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 역시 그녀가 총은 단지 분노의 표현이었을 뿐, 누군가를 살해할 생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총을 숨기고 있는 그녀를 향해 기자가 노골적으로 그녀를 무시했기 때문에, 게다가 그녀를 인격이 아닌 잡년으로 취급한 것에 대해 순간적으로 화가 났기 때문에, 총은 쏘아지고 말았던 것이다.   

 <카타리나 불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기 일주일 전에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는데, 내 안에서 두 소설이 비슷하게 섞여버린 감이 있다. 둘 다 총이 나왔고, 어떤 이유로 의도치 않게 살인자가 되었고, 무고하다면 무고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더욱 설명하기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방인>이 뫼르소 자신에 대한 기록이고, 자신에 대한 정당방위적인 고백이라면, <카타리나>는 외부에서 비춰지는 대로 진행되는 것이고, 가해자가 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되고야 마는 상황인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그러나 결국 둘은 같은 길 앞에 당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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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6-0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안읽어봤어요. 그런데 9시 반의 당구라는 제목은, 전에도 한번 들은 것 같은데, 언제들어도 참 서늘하게 감각을 찌르네요. 단지 9시 반의 당구, 일 뿐인데.

김토끼 2011-06-08 16:53   좋아요 0 | URL
전 당구가 뭔지 잘 몰라서, 그 '감'이 잘 안오지만 ㅋ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