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 충격과 이라크 사태

 

삶을 향해 절규하는 고 김선일씨의 마지막 모습은 일본에서도 되풀이 방영됐다. 같은 아시아인이며 비슷한 상황에 있기 때문인지 일본 사회도 충격과 더불어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 주도의 ‘유지연합’(有志聯合)의 일원으로 파병한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이제 누구라도 테러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라크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지 않는 한, 더 큰 비극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주말의 참의원 선거를 목전에 두고 일본 사회도 테러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총선거 사흘 전에 열차 폭파 테러가 일어난 스페인의 악몽에 대한 경계다. 전철역마다 삼엄한 경계태세가 펼쳐지고, 중동이나 남아시아 계의 외모를 한 외국인에 대해 집중적인 검문도 행해지고 있다. 안전이라는 명목 아래 벌어지는 인권 침해가 별다른 저항이나 비판도 없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도 또다른 우려다.

“일본 정부는 3명의 인질을 구출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속수무책이고 수수방관했는가” 당연한 문제제기다. 보도된 것 이외에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외교통상부를 비롯한 관계기관의 초기 대응에는 많은 의문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일본의 인질사건과 김선일씨의 경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본인 인질의 경우는 팔루자의 저항세력의 행동이었다. 당시 미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고 있던 팔루자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미군의 공격을 중지시키려는 명백한 현실적 목표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질 살해를 위협하면서도 국제 여론과 일본 사회의 반응을 보면서 ‘교섭’에 응하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인 인질사건도 하나의 계기가 되어 팔루자에 대한 미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둘러싸고 국제적인 비판이 고조되고 ‘휴전’이 일단 성립됐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선일씨를 살해한 그룹은 알카에다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인질의 잔혹한 살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국제 사회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섭’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전시효과를 노린 살해 그 자체가 인질로 삼은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큰 비극, 나아가 한국 내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이라크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새로운 체제의 형성을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테러의 위협에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도, 이라크에서 즉시 철수하라는 주장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이며,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편 지금 이라크에서 각 국이 전면 철수할 경우,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과 분쟁이 뒤따를 것도 거의 확실하다.

사실상의 미군 점령체제를 대신할 명실상부한 국제적 지원체제를 형성하는 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 국이 연계한 외교노력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시점이다. 궁극적으로는 유엔의 주도 아래 유럽연합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중동 이슬람 각 국, 나아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립적’이며 중동지역과 호의적 관계를 유지해온 한·중·일 등 동아시아가 포괄적으로 관여하는 체제 구축이다. 우리 정부도 또한 일본도 이제까지 이라크 전쟁에 대한 협력을 에너지 확보나 대북정책 등 너무나 좁은 ‘국익’ 차원에서만 설명하고 행동해 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공통의 과제로서 이라크의 부흥과 안정이라는 새로운 시각과 실천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

이종원/일본 릿쿄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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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가 못하면 시민들이 나서서 해야죠. 동아시아 평화연대의 구축은 정말 절실한 과제입니다.
 

오마이뉴스

 

[주장] "대통령은 물러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노무현 퇴진' 구호와 다시 부르는 '너흰 아니야'

 

이봉렬 기자

 

지난 탄핵 정국 당시 광화문에서 가장 널리 불렸던 노래는 노래 운동가 윤민석이 만든 '너흰 아니야' 였습니다.

'채권에 사과상자에 이제는 아예 트럭째 차떼기로 갈취하는 조폭들'과 '천황을 위해 죽으라 전두환이 영웅이라 선동하고 찬양했던 찌라시’를 향해 ‘나라를 걱정할 자격이 없다’고 일갈했던 그 노래는 당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하고픈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 낸 가사와 익숙한 가락 덕분에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들에 의해 결정된 대통령 탄핵은 기각되었고, 대통령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거리에서 외친 '민주수호' 구호가 현실이 되었다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전 다시 이 노래를 부릅니다. 전에는 ‘그래도 너흰 아니야’로 시작하는 노래의 뒷부분을 말하고 싶어 이 노래를 불렀지만, 지금은 ‘너희들의 말’인 앞부분을 말하고 싶어 이 노래를 부릅니다. ‘너흰 아니야’를 이야기 하기 위해 내세운 역설 정도로 여겼던 노래의 앞 부분이 이제는 더 이상 역설로 여겨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 너희들이 말하는대로 대통령은 물러나야 할지도 몰라 / 일가친척 측근 가리지 않고 검은돈 받아 챙겼을지도 모르지 / 노동자 농민은 죽음으로 외치고 서민은 카드빚 때문에 목을 매는 / 이 개같은 세상 거꾸로 된 이 나라 누군가는 바로 잡아야 하겠지만….'

서민들 스스로 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목을 매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목을 매는 것을 못 막는 정도가 아니라 그토록 ‘살고 싶다’며 절규하던 제 나라 국민의 목숨도 챙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죽음의 땅에 우리 군인 3000명을 보내겠다는 주장도 꺾지 않고 있습니다.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동안 ‘대통령은 물러나야 할지도 몰라’라는 가사가 자꾸만 목에 가시가 됩니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습니다.

전 한 때 노사모 회원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개혁당이 만들어 질 때 지역에서 당원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무슨 위원이라는 감투를 쓰고 당원들을 모으고 연락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는 노란 티셔츠 차림에 회사에서, 거리에서 희망돼지를 나눠주는데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게 어떻게 진보냐?"는 벗들의 질책에 "세상을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게 진보다"라는 변명을 늘어 놓으며 ‘국민참여운동본부’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가 '대통령은 물러나야 할지도 몰라'라는 대목을 되뇌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광화문에서도 '노무현 퇴진'구호가 논란거리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논점을 흐린다'고도 합니다. 파병은 반대하지만 노무현 퇴진이라는 구호 때문에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선일씨를 살릴 수 있고,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있고, 우리나라가 전범국이 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노무현 퇴진' 역시 고려의 대상에서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퇴 여부보다는 이 나라 국민의 안위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논점을 흐리는 것은 '노무현 퇴진' 구호가 아니라, 그 구호에 시비를 거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현실성 없는 것으로 치자면 파병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겠다는 것만한 게 있겠습니까.

탄핵정국이나 총선기간 동안, 심지어 지자체장 보궐선거기간 동안에도 제 휴대폰에 수 많은 참가 독려 메시지가 날아들었습니다. 때론 노사모의 이름으로, 때론 열린우리당의 이름으로. 하지만 이번 파병반대 집회기간에는 단 한건도 날아들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그들이 보여준 열심은 이 나라를 위한 게 아니라, 서민들의 삶을 위한 게 아니라, 다만 노무현 개인을 위한 것이었던가요.

제가 노사모에 가입했던 것은 노무현 개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노무현이 만들고자 한 이 나라의 모습이 제가 바라는 모습과 닮아서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집권 후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제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파병 결정은 제가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너흰' 아니지만, 우린 맞습니다. 우리는 제 나라 국민의 목숨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퇴진을 이야기 할 자격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 섰던 사람들일수록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지금의 노무현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주거나, 지금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겁니다.

예전에는 역설로만 이해했던 ‘대통령은 물러나야 할 지도 몰라’라는 구절에,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파병결정이 철회되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퇴진’이라는 현실성 없는 구호에 공감하게 될 겁니다. 파병에는 반대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촛불을 들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전범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도, 이 나라를 위해서도, 우리 모두는 파병반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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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8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씨를 지지하는 분들이 모두 이런 각오로 파병철회에 나서준다면, 정말 파병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 좀더 힘냅시다. 화이팅!!!

비로그인 2004-07-0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통령은 물러나야 할지도 몰라’라는 가사가 자꾸만 목에 가시가 됩니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은 노무현 개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소위 개혁과 진보를 원하는 사람들 모두가 지금쯤 느끼고 있기 때문에 씁쓸할 말입니다. 아직도 노무현'만'을 믿는다면 그것은 외사랑이지요.
참으로 위기의 시기입니다. 시계는 거꾸로 돌려져서는 안되고, 간신히 잡고 있는 주도권(?)의 끈은 놓쳐서는 안되지만 선봉에 세운 위인은 모자라기 짝이 없는 그런 시기. 말이나 조심하고 얌전히나 있어준다면 고맙겠습니다만, 오늘도 한 마디 하더군요.

balmas 2004-07-0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우당이 앞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는 건 그들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그저 그들이 자신들의 판단과 행위의 책임을 다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할 뿐입니다.
 
 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금동반가사유상....그 힘없는 미소를 머금은 금동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반가사유상은 비슷한것이 우리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2개, 그리고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등 현재까지 알려진것은 모두 3개 입니다. 그런데 3개의 반가사유상이 모두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유사한 형태이면서도 결코 같은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두번째는 3개 모두의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양식적 특성으로도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다른 불상과 비견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문헌이나 출처를 근거로 하여 어느시대의 조성물인가를 판단해야 하지만 그 마저도 일관성이 없어 지금은 그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라고 명기하여 이 불상의 출처로 인한 갑론을박을 애써 피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 78호(좌)와 국보 제 83호(우)로 지정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입니다. 좌측 불상의 높이는 83.2cm,우측 불상은 93.5cm로 우측 불상이 10cm가량 높이가 높습니다. 이 두개의 비슷한 반가사유상을 자세히 눈여겨 보신다면 똑같은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 두 불상의 미술사학적 고찰과 아울러 출처에 관한 문헌과 관계자의 증언, 그리고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반가사유상에 관하여 각각의 특성을 설명하므로써 어느 시대의 불상으로 판단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실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과연 백제의 불상인가? 또는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신라불상으로 봐야 하는가? 일본의 불상을 일본인들은 비조시대의 불상으로 바득바득 우기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주장하듯 정말 일본 불상일까?  아니라면 우리의 두 개의 불상과 매우 비슷한 양식이어서 우리것인데 일본으로 건너갔던가, 또는 적어도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나라 사람이 제작한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을 해 보는것도 바람직할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와 일본 사이에 문화교류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는 실정으로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불상이 갖는 미적 감상기준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웃옷을 입은 단정한 불상과 웃옷도 훌러덩 벗어버린 불상....과연 이 불상은 어느시대의 불상일까요?  앞으로 2차례에 걸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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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2)

 금동반가사유상이 갖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선은 반가사유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유'란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 반가사유상은 과연 어떤 고뇌에 빠져 있는것일까요? 사유상의 출현은 출가하기전의 태자의 신분이었던 '싯다르타'가 인간이 갖는 4가지 고뇌, 즉 生老病死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고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4가지 고뇌속에서 번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을 느꼈기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턱을 괸것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가 얼굴과는 닿은듯 만듯 정말로 손가락 전체도 아닌 점으로써 뺨과 닿아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채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한마디로 오묘하다고 표현되는 얼굴표현에는 나름대로의 중생 구제의 방법에 대해 수만가지의 말을 뱉어낼것만 같습니다. 즉, 오랜 고뇌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중생구제의 방편을 알아냈다는 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왼 무릎위에는 한 쪽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엄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 잔뜩 힘을 주고 있읍니다만, 미사려구를 구사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달리 보이는지 발가락의 구부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합니다만, 자연스럽다는 말은 힘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냥 힘을 주지 않고 오른 발을 왼 무릎에 올려놓으면 전혀 지금의 모습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자세히 보면 입가의 살포시 웃는 모습과 어울리게 지그시 내려깔고 중생을 굽어보듯 하는데 바로 미소와 더불어 이런 눈매가 미륵보살로서의 위엄을 한껏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것임에 틀림없다" 고 하였습니다. 아주 점잖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치켜세웠지만 다른말로 이야기 하자면 모나리자도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면 울고 간다는 말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이 반가상의 머리에는 도교사상에서 나온 삼산관이 얹혀있어 간단하게 "삼관미륵"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반가사유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12년 입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일본인이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에 대한제국의 황제칭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조선 임금의 가계를 <왕가(王家)>로 낮춰 부르게 되었습니다)이 이 반가사유상을 입수할때는 중계인이 '경주 근처의 폐사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기에 신라의 작품으로 알았었으나 한일합방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고적을 조사해온 일본인 학자 이네다(稻田)가 '1910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바람에 신라것이냐 백제것이냐를 놓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세키노(關野貞)는 "조산 삼국시대의 조각"에서 두 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고신라의 유물로 단정하여 '후치가미 사다스케가 총독부에 기증한 것으로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도에서 발견한듯 하다'고 기록하여 경상도 출토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후 1915년 바로 이네다의 충청도 출토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그체적인 높이(2자9치7푼)가 제시되어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동, 석불, 마애불 등 모두 3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지만 1945년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발굴된것 이외에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의 것인지 또는 신라나 백제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상이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궁이나 법적 책임이 두려워 대부분은 오랜 동안을 숨겨 두었다가 내다 바는 악덕 골동품상(거의 일본인)들로 인하여 유물이 갖고 있는 족보가 멸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네다의 주장대로 이 반가사유상은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온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돌아가신 김원룡, 최순우 두분은 이 불상이 백제의 작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있는 두 구의 불상이 어디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고 갑론을박 하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에서 더 애써 원산지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금동반가사유상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국보 83호인 '삼관미륵'의 복제품이나 마찬가지로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일본의 고류지(광륭사)에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상의 원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 불상의 원적도 덩달아 원적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일본에 있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또는 "한반도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대부분의 일본학자 주장)"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주로 우리 학자들은 위의 두 가지 학설을 추종하고 일본의 학자는 자존심 때문인지 자기네 조상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에 있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1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보다 후대인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중반의 비조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똑 같이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언뜻 보아도 똑같은 목제임에도 국보 1호보다 상당히 조형미가 떨어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1호를 본뜬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조각 기법이나 제작기법이 국보 1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것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불상은 당연히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반도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라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일본의 비조시대의 제작품으로 인정을 하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계의 불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박사였습니다. 황수영 박사는 1959년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  원래 이 불상이 경상도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세키노의 발언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에 판매시 거래된 금액은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2900원이었는데 중간의 악덕 상인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구입을 했기에 원산지는 알 수 없는것 처럼 했기에 지금까지도 어디에서 출토가 되었는지 잘 모르게 되었지만, 최초에 이 불상에 대해 언급한 세키노의 말 처럼 "경상도"지방에서 출토되었다면 신라 땅 어디에선가 이 불상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상도 신라땅을 수소문하여 이 불상이 정말로 신라의 옛 절터에서 나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박사(현 단국대 박물관장)와 더불어 경주지역에서 수소문한 결과 드디어 원래 이 불상이 있었던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옷칠이 된 위에 회분을 칠하였는데, 대부분의 목불이나 금동불은 칠을 하기전에 옷칠을 하는데 원 소유주는 옷칠 위에 다른 칠을 하지 않고 회분을 칠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되자 경주 오릉 근처에 있던 불상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고 이소문을 접한 두 사람은 1964년 경주 남산의 산방谷에 있는 산방사라는 절의 할머니가 당시 4원(또는4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판매를 하였다는 사실과 원래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차례 방문하여 노보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분명 신라의 불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이 불상의 족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까요? 한동안은 <미술사학>에 이 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게제되고 맞느니 틀리느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원래 그 장소에 있는것을 본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지 노보살(이 노보살은 그후 사망하였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입장이었고,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의 정확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계다 백제계다를 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라계라는 확신을 가진 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측은 신라의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김원룡박사, 최순우 선생 등의 계열은 백제계의 불상으로 보는 것이며 두 학설간에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울고가게 할만한 이 위대한 공예품은 그저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처가 애매모호한 반가사유상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발표논문은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불상은 우리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아져서 미처 제대로된 연구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사찰에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화사상을 주로 하여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성종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미륵반가사유상을 수입을 해 왔기 때문인데,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는 매우 흡사하지만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불상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유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 속에 묻어두고 거름을 주거나 화학 성분을 부어 1~2년을 묻었다가 마치도 오래된 금동불에 녹이 슬은 모습으로 수입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중국인들은 이런 모조품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수출할 생각을 다 하게 되었는지 기가막힐 따름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확인을 해볼 요량이며, 그 불상이 단순하게 비슷하게 만든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은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불상에 대한 에피소드를 겻들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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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rim > 7월 10일 이라크파병 결사저지를 위한 평화대행진

 

파병강행 노무현정부 규탄! 파병압력 미국 규탄!

이라크 파병 결사저지를 위한 평화대행진

 

- 일시 : 2004년 7월 10일(토) 오후 5시 30분
- 장소 : 종묘

* 각 단위에서는 조직에 만전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 행진시 시민 선전 등 참가계획을 갖고 참가해 주십시오.


<사전행사>
- 상징 퍼포먼스
- 대시민 선전전

<1부-대회>
- 민중의례
- 대회사 (통일연대 한상렬 상임대표)
- 정치연설 1. 민주노총
- 정치연설 2.
- 실천단 결의및 문화공연
- 이라크 파병 결사저지를 위한 투쟁결의문 낭독
- 상징의식

<2부-평화대행진>
- 행진 : 종묘~광화문
- 구호 만장을 앞세우고 상징물, 참가단체별 각종 선전물 들고 행진
-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종교인, 여성, 의료인 등 특색있는 복장과 다양한
단체 특성을 살려 행진

<3부-마무리집회>
- 행진후 상황에 맞게 대오 정리
- 각 단체 향후 투쟁발언

* 구호
- 파병철회로 김선일씨 한을 풀자!
- 가자, 청와대로! 파병을 막아내자!
- 파병강행 노무현정부 규탄한다!
- 파병압력 미국을 규탄한다!
- 살인동맹 한미동맹 필요없다!
- 미국은 당장 이라크를 떠나라!
- 파병철회! 전쟁반대!

7월 일정

1. 광화문 촛불집회 매일 진행
 - 책임단위를 정확히 구성하여 투쟁의 상징적 구심역할을 하게 함.
 
2. 7월 10일 ; (가칭)‘파병강행 노무현정권규탄, 파병압력미국규탄,
이라크파병결사저지평화대행진’ 
- 일시 장소: 7월 10일 오후 5시 30분 종묘공원-광화문
- 행진을 통해 노무현정부와 미국에 대한 강력한 규탄과 파병결사저지의 의지
표출

* 7월 9일 : 콘돌리자 라이스 방한 반대 집회 (2시 30분, 청와대앞 / 5시 30분
외통부앞)

3. 7월 12일- 15일; 파병강행 청와대 열린우리당 항의 행동기간
- 파병강행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 규탄
- 파병중단결의안채택 및 국정조사 범위확대
- 선박출항 및 선발대 파병일정 즉각중단

- 7월 12일 파병강행 노무현정부, 열린우리당 규탄 및 파병중단 결의안 채택촉구
기자회견 (국회앞)


4. 7월 15일 :  파병중단결의안 관철, 파병결사저지를 위한 국회항의투쟁
 - 7월 15일 7월 임시국회 폐회에 맞추어 국회 안팎에서 강력한 항의 및 결의안
채택 촉구 투쟁전개
 - 7월 14- 15 철야투쟁으로 강력한 투쟁의지 결집 (오후 7시 국회앞 결집)
 - 7월 15일 파병강행 노무현, 열린우리당 규탄 추가파병 결사저지대회 (10시,
국회앞 / 2시, 국회앞)


5. 7월 17일 : 광화문 촛불집회

6. 7월 24일 : (가칭) ‘이라크파병결사저지를 위한 총궐기의 날
청와대인간띠잇기대회’ (전국집중)
- 일시 : 7월 24일 오후 6시  장소 : 서울시청광장
- 참가단 모집을 통한 전국총력집중대회
- 각계각층의 다양한 행동전(행진)과 청와대인간띠잇기 대회 결합
- 평화적이면서도 완강한 투쟁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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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7-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예전에 촛불집회 등의 다수는 노사모 등인가보죠? 그만큼 다수가 안보이는 걸 보니... 그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힘있는 다수가 되어야할텐데, 걱정이군요.

balmas 2004-07-0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병반대 집회는 좀더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하니까, 아무래도 탄핵반대 촛불집회보다 인원수가 적겠죠.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는 분들이 좀 혼란스러워하고 망설이는 것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