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에 출간될 [황해문화] 가을호 권두언 올립니다. 


이번 호에서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을 특집으로 잡았습니다. 


독자분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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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황해문화 이번호는 지난 봄 호에 이어서 연속 기획 “21세기 인간의 조건두 번째 특집으로 꾸몄다. 지난 봄 호에서는 안전을 주제로 다섯 편의 글을 실었는데, 이번 가을 호에서는 노동을 주제로 역시 다섯 편의 글을 묶었다.


다른 사회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이라는 문제도 무매개적인 지각을 통해 그 특성이나 함의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문제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들 내지 재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회적 문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항상 이미 그 문제를 구성하고 감싸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표상들과 재현들, 더욱이 상연들을 문제 삼고 비판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노동이라는 문제는 다른 어떤 문제들보다 더욱 선행적인 비판과 해체의 작업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구조의 전환이라는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3차 산업혁명’(제레미 리프킨)이나 ‘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 같은 어휘들, 특히 후자의 어휘는 정부나 산업계, 언론계(특히 보수 언론계)에서는 마치 이미 확립된 정설처럼 확산되어 있으며, 각종 정책을 위해 고려해야 할 최우선 지침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통령 직속으로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4차 산업혁명은 제안자의 설명에 따르면 초연결지능혁명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무인운송수단,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블록체인, 유전공학, 합성생물학 등의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물리적, 생물학적 세계와 디지털 통신이 융합되는 기술혁신의 시대를 표현한다고 한다.


과연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기존의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대한 투자와 정책적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과장된 수사법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노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3차 산업혁명 또는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담론은 늘 노동의 종말에 관한 논의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곧 조만간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사물인터넷의 발전을 통해 생산과 물류, 유통 등과 같은 경제 영역 전체에 걸쳐 자동화된 시스템이 확산되고, 이에 따라 수십 년 안에 기존 일자리의 대부분이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4차 산업혁명론의 확산에 발맞춰 공론장에서 점점 더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여기에 패스트푸드점을 필두로 한 무인판매기(키오스크) 보급의 확산은 노동의 종말에 대한 대중적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동 유연화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경영계의 요구와 정부의 호응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노동의 종말로 인한 급속한 중산층의 와해를 막기 위해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는 정치권 및 언론의 논의와도 접속한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노동의 종말은 사실상 현재의 산업 및 노동정책의 기저에 놓여 있는 두 가지 핵심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1980년대까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노동은 모든 논의의 중심 화두였다. 정치경제학적 분석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회학적인 계급 분석에서도 노동자 계급이 항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정치학에서도 노동자 계급을 주체로 한 변혁운동의 연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늘 논의의 초점을 이루었다. 심지어 문화 분야에서도 민중문학, 민중미술, 민중음악, 민중무용 같은 표현이 말해주듯,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민중은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었다. 이것은 노동, 특히 (남성) 노동자 계급의 산업노동이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며, 또한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와 탄압이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의 뿌리를 이룬다는 데 대해 인문사회과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및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에 확산된 포스트 담론은 노동자 계급 운동에 중심을 둔 사회변혁운동의 퇴조를 낳았으며, 노동이라는 기표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은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이름 아래 경제주의와 환원주의로 지목되어 퇴출되었고, 계급의 정치학은 절합(articulation)에 기초를 둔 다양한 사회운동들 간의 수평적 연대로, 더 나아가 시민운동 및 자유주의적 연대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 필연성 및 인식론적 근거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변화를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노동의 인간학이 내포하고 있던 환원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난점들이 과연 노동의 인간학 전체, 노동의 문제 전체를 퇴출시켜야 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는가, 그것이 소통(communication)의 인간학’(또는 포스트 담론일반)과 대립하거나 이 후자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들이 충분히 토론되거나 논쟁되지 않은 채, 일련의 대체와 청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20~30년 동안 노동의 문제는 사회과학의 특정한 분야(노동경제학, 노동사회학 등)로 밀려나 있었다.


그 사이에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사회는 전면적인 신자유주의화의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노동의 문제는 비정규직이라는 네 글자로 요약되는, 불안정노동의 전면화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일자리라는 의미로, 따라서 외환위기가 지나고 구조조정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되고 나면 다시 정상적인고용관계로 회복되어야 할 임시적인 고용 방식으로 생각되었던 비정규직은 이제 어느덧 그 자체가 정상적인, 심지어 대표적인 고용관계가 되었다. 간접고용, 특수고용, 플랫폼노동 등과 같은 (무기계약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 분기(分岐)하고 재창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규직은 정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권적인 일자리가 되었다. 그것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자리이자, 언제든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끈질기게 버티고 지켜내야 하는 자리, 따라서 오히려 자신 대신에 희생물이 되어주고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해줄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어나기를 욕망하게 되는 자리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일어난 이른바 인국공사태는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다분히 과장된 수사법적 용어로 표현되는 경제적 전환은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산업 체계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며, 이는 기존의 산업 체계를 파괴적으로 변화시키거나 그것과 단절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양상을 가속화하고 심화한다는 의미에서 진화적인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집에 실린 장귀연 선생의 글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디지털 전환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와 단절하거나 그것을 파괴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더욱 가속화하고 창조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노동자들이 힘든 투쟁을 통해 획득한 노동권들은 점점 더 해체될 것이다. 플랫폼노동의 확산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노동의 종말이라는 문구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의 문제와 관련하여 적어도 이중의 측면에서 맹목적이다. 노동의 종말은 리프킨 이전에 이미 사회과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던 주제다. 1980년대 고전적인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하면서 나타났던 것이 노동의 종말 또는 노동사회의 종언내지 탈노동사회라는 주제였으며,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은 오히려 1980년대에 전개된 논의의 반향이라고 할 수 있다. 탈노동사회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주제는 고전적인 복지국가에서 가능했던 완전고용 하에서의 정규직 노동의 위기를 반영하는 주제였다. 곧 탈노동이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정규직 (남성)노동이 표준적이고 정상적이었던 사회의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을 노동의 종말 내지 탈노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따라서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 노동의 문제를 정확히 분석하고 인식하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은 종말을 고하지 않았으며, 노동에 중심을 둔 사회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정규직의 확산과 심화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노동은 훨씬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곧 세습된 자산을 갖추지 못한 채 근로소득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야 하는 대부분의 을들이 감당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은 그 노동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그만큼 그들의 삶 전체를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디지털 자본주의의 노동은 단지 비정규직 노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 노동이든 비정규직 노동이든 간에 오늘날의 노동은, 특집에 수록된 박제성 선생의 글이 명료하게 보여주듯이, 테일러리즘이라고 통칭되는 노동에 대한 과학적 관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알고리즘적 통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디지털 자본주의적 통제는 인간의 노동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를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알고리즘적인 노동 통제에서는 나의 행위와 동작만이 아니라 나의 사고와 판단, 심지어 나의 감정들까지도 나 자신의 본질, 나 자신의 정체성에서 소외된다. 이 경우 나의 본질, 나의 정체성은 아마도 간신히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사생활로 축소될 것이다(그 사생활이 정말 그 자신의 고유한 생활일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반면 노동의 종말이라는 문구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의 문제를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문제, 곧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숙고하고 고민해야 할 인간과 문명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다루기보다 오히려 기본 소득제와 같이(적어도 이 문제가 현재 정치적사회적으로 처리되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정치가들이 제안하는 이런저런 정책들에 의해 일거에 해결되어야 하고 또 해결될 수 있는 가공의 문제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의 종말이라는 문구는 돌봄 노동을 비롯한 재생산노동과 관련해서도 맹목적이다. 돌봄 노동으로 대표되는 재생산노동은, 특집에 수록된 윤자영 선생의 글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 인류 문명 전체가 유지되고 재생산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노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에서 엄밀한 의미의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제대로 수용되지 못해왔다. 따라서 정규직 (남성) 임노동만을 정상적인 의미의 노동으로 전제하는 탈노동사회나 노동의 종말 같은 문구들은 처음부터 돌봄 노동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돌봄 노동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만들 것이고, 그것을 여성이 전담해야 하는, 또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노동으로 젠더화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여성에게 노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신경아 선생은 디지털 전환에 더하여 코로나19 팬데믹이 초래한 위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상황을 고찰하면서 이 질문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듯이 인간은 실존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데서 생겨나는 취약성(vulnerability) 및 여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불안정성(precariousness)을 지닌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은 정치경제적 권력관계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경제적 불안정성(precarity)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구조적역사적으로 이러한 이중의 불안정성을 더 깊이 경험할 뿐만 아니라 성폭력이라는 젠더적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여성들이 직면한 이러한 취약성과 불안정성의 상황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이전 시기 못지않은 노동, 더욱이 이전 시기보다 더 불안정하고 더 위태로워진 노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노동의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 단지 경제 부문이나 사회 부문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문명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은폐하거나 축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동 유연화 및 긱 이코노미(gig economy)‘4차 산업혁명시대에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실로 받아들인 가운데, 노동의 문제를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일자리 창출의 문제로 전환하고 노동의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신성장동력의 발견이나 기본소득으로 답변하려는 자유주의 정치의 실천에서도 고스란히 구현되고 있는 일이다.


따라서 선지현 선생이 제기하듯이,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노동의 정치가 가능한지 질문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도 아니고,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 또는 정파에 한정된 질문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다. 특히 탈탄소사회로의 전환이 디지털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면서 오히려 또 하나의 새로운 자본 축적의 장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더욱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정당하게도 사회적 사실로서의 계급정치적 집단주체로 승격하는 일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서로 이질적인, 상이한 실천에 대한 관심과 투쟁의 목표를 지닌 다양한 개인들 및 집단들과 함께 계급의 정치로서 노동의 정치를 수행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어려운 길이지만 우리가 찾아내고 추구해야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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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집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비평에 수록된 김원태 선생의 글은 마땅히 특집 주제와 관련하여 읽혀야 하는 글이다. 헤겔에서 마르크스를 거쳐 한나 아렌트에 이르는 근대 서양 사상의 흐름 속에서 노동 개념의 계보를 그리고 있는 이 글은 독자들이 특집에 수록된 글을 읽는 데 필요한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토대를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노동에 관한 기존의 사회과학적 논의들이 경험적 연구와 실용적 정책 분야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안적 노동 개념을 사고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개념도를 제시하는 것을 글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선생은 먼저 존 로크에서 허버트 마르쿠제까지 노동의 긍정성을 강조한 사상가들과 한나 아렌트에서 악셀 호네트까지 노동의 부정성을 강조한 이론가들의 논의를 일별한 후, 이들이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꼼꼼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은 대안적 노동 개념을 사고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선생은 후기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청년 마르크스나 중기의 마르크스가 유적(類的) 본질의 활동내지 자기활동으로서의 노동이라는 긍정적 노동 개념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적 노동의 병리적 성격을 비판한다면, 후기 마르크스는 추상노동 개념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 및 물신성의 특성을 더 정교하게 해명하면서 자유로운 노동 또는 대안적 노동이 전개되기 위한 조건도 더 엄밀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생의 이 글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지만, 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논의하는 특집의 글들에 대한 보충적인 이론적 논의로서도 의미가 있다.


비평의 또 다른 꼭지에서 임재성 선생은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재판에서 재판부가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각하하는 것으로 판결이 난 지난 67일 재판에 관해 다루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피고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이번 판결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이 판결의 의미를, 흔히 비판하듯이 친일 판결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그것은 판사들의 과잉된 나라걱정에서 비롯한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징후로 읽어야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 무죄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대법원에서 이미 내려진 판결에 거스르는 판결을 하급심에서 내리기 위해서는 엄정하고 면밀한 법리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은 이러한 법리 없이,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릴 경우 미칠 정치적외교적 파장에 대한 판사 개인의 우국충정에 입각해서 내려진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 선생의 입장이다. 이는 결국 삼권 분립의 기초를 흔드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낳게 된 근본적 이유가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쟁점을 정치 본연의 영역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계속 우리에게 큰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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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문화비평 특집은 지역 문제를 주제로 구성했다. 이희환 선생은 문재인 정부 4년을 돌이켜보면서 여러 가지 공과 중에서 지방분권 정책과 관련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권력구조 개편과 더불어 지방분권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한 바 있다. 헌법 13항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조문을 명시한 이 개헌안은 지방 분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이루어진 3기 신도시 발표는 수도권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롤 초래했으며 부동산 문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선생은 수도권 1극 체제를 해체하고 위해서는 지방 분권 개헌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지주형 선생은 현재 대다수의 지방 대학이 겪고 있는 위기는 지방의 위기에서 비롯하며, 역으로 지방대의 위기는 지방의 위기를 가속화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현재 국가적 화두가 되고 있는 지방 소멸의 위험은 20대 청년층이 농어촌과 중소 도시에서 벗어나 수도권과 대도시로 이주함으로써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선생의 진단이다. 일자리 부족, 여성에게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부족한 문화여가시설 등으로 인한 청년 인구의 유출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더불어 진행된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 발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 대학들은 대학정원감축정책의 일방적인 목표물이 되어 고사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생은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국가의 최상위 정책으로 추진하는 것만이 이런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반 위에서만 일방적인 지방대 폐교정책 철회, 정원조정에 대한 적절한 재정 지원, 지방대 교육 여건 개선 등과 같은 지방대 발전 방안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선생의 제안이다.


나머지 문화비평 꼭지들에서도 조광희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과학소설, 조습의 사진미학 등에 관해 유익하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번 호 주제 서평에서는 류동민 선생이 마르크스의 저작 및 마르크스에 관한 다양한 저술들에 관해 유용한 길잡이를 제시해주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노동에 관한 학문적 관심이 줄어든 것은 마르크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역으로 노동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 문제로 제기될수록 마르크스에 관한 독서와 연구는 더욱 필수적인 요구가 될 것이다. 선생은 인간 마르크스의 삶에서부터 청년 마르크스’, ‘역사유물론’,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마르크스에 접근하는 것이 좋은지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에 관심이 있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반가운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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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천정환 교수의 경향신문 칼럼에서 따온 말입니다.


촌철살인의 표현이 아닐 수 없네요. 



"유지(Yuji) 논문과 연구 윤리"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71503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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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 21호, 2021년 여름호에 실린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하여 '안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해본 단상입니다. 


이후에 '포스트 코로나'에 관한 단상도 올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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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인간의 조건에 관한 단상 I 안전에 관하여

 

 

1. 코로나19 팬데믹의 시간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을 선언한지 1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 중국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했고 우리나라에 첫 번째 확진자가 생겨났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의 사스 바이러스(2003)나 메르스 바이러스(2014) 때처럼, 이번 바이러스도 다소간 피해를 주겠지만 늦어도 몇 달 안에 잠잠해질 것으로 생각했고, 그만큼 무심하게 대했다. 이것은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 등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방역 당국은 당연히 심각한 문제로 간주했겠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와 같이 평범한 시민들은 또 하나의 바이러스가 출현했군, 아 당분간 귀찮게 됐네 ...’ 이 정도의 반응이 일반적이었을 것 같다. 이미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를 경험했던 동아시아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랬으니, 수십 년 동안 본격적인 바이러스 감염증을 경험하지 못했던, 유럽이나 북미 대륙 사람들은 아마 훨씬 더 태평하고 무심했으리라. ‘동아시아에 또 바이러스가 출몰했다는군. 불쌍한 사람들.’ 이 정도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초기 예상과 달리 코로나19, 그 이전의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들과 달리 팬데믹으로 확산되었고, 2021423일 기준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는 15천만명을 넘어섰으며, 사망자는 300만명을 넘었다. 특히 코로나19 재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인도의 경우는 51일 기준 1일 코로나 확진자 수가 40만명을 넘어섰고, 1일 사망자 수도 3천명을 넘어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전문가들은 실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는 공식 기록의 몇 배 이상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2011월 예상과 달리 빠른 시간 내에 미국 제약사인 화이자(독일의 바이오엔테크와 공동 개발)와 모더나에서 m-RNA 백신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2021년 여름 무렵이면 집단 면역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는 섣부른 전망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영국 변이, 남아공 변이, 브라질 변이, 인도 변이 등과 같이 처음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감염력이 강한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m-RNA 백신이 이전의 백신들보다 변이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변이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백신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백신 개발 국가의 백신 독점으로 인해, 코로나19 백신이 방역 능력이 취약한 신흥국들이나 저개발 국가들에게 효과적으로 배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역시 코로나19 확산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네이처󰡕코로나19에 대한 집단 면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최근 기사에서 코로나19 집단 면역이 사실상 어려워 보이며, 코로나19는 계속 풍토병으로 남게 될 것 같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Five reasons why COVID herd immunity is probably impossible”, Nature no. 591, 18 March, 2021.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1-00728-2 (2021.5.7. 접속)] 또한 우리나라의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 역시 코로나19 집단면역이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며, 코로나19는 토착화되고,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처럼 주기적으로 백신 접종이 필요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코로나19 집단면역 가능불가능, 입장 선회 이유는?, 󰡔메디포뉴스󰡕 2021.5.4. http://www.medifonews.com/news/article.html?no=160172 (2021.5.7. 접속)] 성인만을 접종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백신으로 인구의 70% 이상에서 집단 면역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면역효과가 95%인 백신이 필요하지만, 현재 개발된 백신 가운데 이 정도의 면역효과를 보이는 백신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백신의 효과는 백신을 접종한 개인의 발병 가능성을 예방하는 효과이지,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가 아니기 때문에, 면역효과가 95%인 백신의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또한 집단 면역의 전제가 되는 코로나 재생산지수 3”이라는 기준 역시 임상적으로 가정된 기준일 뿐이며 실제 재생산지수는 훨씬 편차가 크기 때문에, 역시 집단 면역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앙임상위원회의 결론이다. 따라서 백신 접종 전략은 코로나19 근절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결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의 시간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 섞인 전망과 달리 올해는 물론이거니와 아마도 향후 몇 년간은 더 지속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볼 수 있다. 1918~19년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보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의학적 역량은 몰라보게 성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세계는 그 당시보다 훨씬 더 세계화되었으며, 또한 훨씬 더 생태적으로 파괴되고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해진 것이다.

 

2. 우리 시대 인간의 조건은 어떤 것인가?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은 우리 시대가 거대한 이행의 시기라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해방의 정치의 역사적 실험으로서 사회주의 체제의 종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 국민국가 체계의 쇠퇴와 난민의 일반화, 생태적 재앙의 예고와 탄소경제의 종말, 포스트 휴머니즘의 도래 등과 같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몇 가지 문구들을 열거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이행의 시대에 더해진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의 시대가 다중적인 변화와 위기의 시대라는 것, 또는 몇 년 전 작고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안토니오 그람시에게서 가져와서 사용한 개념을 빌려서 말하자면,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대,[인터레그넘에 관해서는, 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참조.] 낡은 것은 사라져 가는데, 아직 새로운 것은 탄생하지 않은시대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다.[얼마 전 출간된 낸시 프레이저의 팜플렛 제목 역시 인터레그넘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 참조.]


이러한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우리가 질문해봐야 할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주제가 아닌가 한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재로서의 인간은 불변적인 본질을 지닌 존재자가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를 재규정해온 생성과 변화 속의 존재자라는 점을 전제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거대한 이행의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본질이 이전과 동일하게 남으리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과 동물 사이에서 인간의 자리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처럼, 또한 고대 중국에서 공자를 비롯한 당대의 사상가들이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위치를 놓으려고 고심했을 때처럼, 또한 기독교 탄생 이후의 사상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새로운 본질을 탐색했을 때처럼, 그리고 17세기 과학혁명의 충격 속에서 근대 철학자들이 기하학적인 자연의 질서 위에서 인간에 대한 혁명적인 재규정을 모색했을 때처럼, 또는 19세기 말 제국주의적인 서양 문명의 충격 속에서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지식인들이 전통적인 세계관 대신 새롭게 부과된 세계관 속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인간의 모습을 다시 파악하도록 강제되었을 때처럼, 인간을 그의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재규정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이중적 가설: 타율적인 기업가 주체

 

나는 우리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설 위에서 제기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오늘날의 인간의 조건은 타율화의 조건 속에서 고도의 자율성을 강제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가설을 제기해볼 수 있다. 여기서 타율화의 조건이라는 말은, 근대적인 인간을 근대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던 조건이 이제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는 주체의 시대이고, 주체는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특성으로 지닌다. 근대적인 주체의 자율성을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제시했던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그는 인식론적으로는 초월론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가 아니라 주체에 근거한 인식의 가능성을 정초했으며, 스스로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렀다. 또한 칸트는 도덕적 행위의 기초는 신적인 초월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 본성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 권위나 관습에 놓인 것도 아니고, 오직 주체 자신의 선의지에 달려 있다는 원리에 의거하여 자율성 개념을 근대 실천철학의 근본 개념으로 정립했다.


하지만 칸트의 철학은 (아주 위대한 철학이기는 하지만)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그 산물이었다. 특히 칸트와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정치적 변혁은 칸트 철학을 가능하게 했던, 주체 발명의 혁명이었다.[Etienne Balibar, “Citoyen sujet”,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UF, 2011.]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하 인권선언으로 약칭)에서 천명된 근대성의 정치적이념적 약속은 신분적 예속, 정치적 예속, 인간학적 예속(인종적성적지적 예속)에서 벗어나 각각의 개인, 민족, 인종, 젠더가 자율성의 이념에 입각하여 평등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 위에서 수립된 것이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근대의 사회정치적 질서였으며, 그것의 가장 진보적인 표현이 20세기 후반의 복지국가 체제였다. ‘복지국가체제는 근대적 인간이 그 정치적이념적 약속에 걸맞은 인간적 자율성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제도적 조건을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체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였던 마셜에 따르면 시민권의 역사는 18세의 공민권 내지 개인적 시민권(사유재산의 자유, 신체의 자유, 계약 체결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에서 19세기의 정치권(선거권, 피선거권 등)으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사회권으로 진화해온 과정이다.[토마스 험프리 마셜톰 보토모어, 󰡔시민권󰡕, 조성은 옮김, 나눔의 집, 2014. 원서는 T. H. Marshall,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in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and Other Essays,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0.] 20세기 후반 복지국가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권들(무상교육, 의료보험, 실업수당, 양육비, 주거 보조비 ...)이 시민권 자체 속으로 통합되었으며, 각각의 시민 또는 국민은 개인적 권리와 정치권 이외에 사회권을 기본권으로 향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민권은 사회적 시민권이 되었다. 곧 사회권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시혜나 구제(이는 또 하나의 차별이 된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나라의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뜻한다. 따라서 사회적 시민권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진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는 모순적인 이중의 효과를 산출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적 자율성의 물질적제도적 조건으로서 복지체계의 기본 구조를 와해시키면서 사람들, 특히 하층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소수자들이자 약소자들이라는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로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적 사회는 노동운동가 김혜진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비정규사회.[김혜진, 󰡔비정규사회󰡕, 후마니타스, 2015.]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안정한 노동,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된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으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사실 착각일 뿐이다.[이정아, 김수현, 정규직의 허구적 안정성과 청년의 불안정성, 󰡔경제와 사회󰡕 114, 2017.] 평균 수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 정규직 일자리가 언제까지 보장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뿐더러, 정상적인 근로소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치솟는 집값은 기본적인 생활 여건에 큰 부담을 주고,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해 이른바 워라벨’(Work-life balance)을 적절하게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우리가 예전 복지국가 시대에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곧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워서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든 뒤, 적절한 시점에 은퇴하여 편안한 여생을 누리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 특권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추구하게 되며, 특히 을들은 권리를 빼앗긴 이등국민[김혜진, 󰡔비정규사회󰡕, 77.]의 삶을 살도록 강제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모순적이게도 사람들이 고도의 자율적 주체로서 행위하도록 강제한다. 이점을 특히 잘 보여준 사람은 바로 미셸 푸코였다. 푸코는 1978-1979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를 묶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의 두 가지 뿌리를 이루는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Ordo-Liberalismus) 학파 및 미국의 시카고학파의 주요 이론과 개념들을 분석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제시한 바 있다.[Michel 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Gallimard/Seuil, 2004;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2.] 푸코는 이 강의록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유래한 고전적인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차이점을 교환경쟁이라는 두 가지 개념의 차이에서 찾는다. 고전 자유주의는 시장을 특수한 국가 제도나 사회 부문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적인 체계로 간주했으며, 이 때문에 고전 자유주의에서 시장은 국가 권력을 재해석하고 비판적으로 한정하기 위한 토대로 작용한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교환이 아니라 경쟁에 초점을 맞추며, 교환 대신 경쟁을 경제적 인간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고전적인 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야경국가”) 국가와 구별되는 시장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반면 신자유주의에서 이러한 구별은 더는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장의 원리를 국가를 비롯한 사회 전체, 그리고 인간의 삶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국가 역시 최소의 비용을 통해 최대한의 효율성을 달성하려는 경영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며, 인간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인 관점(특히 미국의 시카고학파)에 따를 경우 경제학의 범위가 무한정하게 확장된다.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인 게리 베커의 정의를 원용하면서(“경제학은 인간 행동을, 목적들과, 양자택일적 용도를 갖는 희소한 수단들 사이의 관계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242.]) 푸코가 말하듯이 이제 결혼과 범죄, 아이 양육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는 행동이라면 모두 경제적인 비용 계산의 대상이 되며, 따라서 경제적인 활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제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 원리는 더 이상 사회의 한 부문이 아니라 사회 전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주체는 기업가”(l'homme de l'entreprise)가 되며, 인간의 활동은 인적 자본의 관점에서 재정의된다.


급변하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모든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기업가 주체로서 모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학업과 취업 내지 창업, 연애, 결혼, 양육, 이주는 물론이고 취미생활, 건강관리 같은 일상적인 생활도 모두 투자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그 성패 여부는 기업가로서 각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된다. 아울러 부동산투자, 금융투자는 신자유주의적 기업가 주체로서 각 개인의 필수적인 투자 활동이자 덕목이 된다. 고도로 자율적인 주체들만이 기업가 주체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한 바, 오늘날의 인간들은 타율성의 조건 속에서 고도의 자율성을 강제 받고 있다는 가설의 뜻이다.

 

4. 탈인간주의적인 정치적윤리적 규범은 무엇인가?

 

둘째, 탈인간주의의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규범을 발명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는 가설이다.

근대성의 시대는, 하이데거와 알튀세르가 각자 개념화한 바와 같이 인간주의(humanism)의 시대였다.[마르틴 하이데거, 휴머니즘에 관한 서간, 󰡔이정표 2󰡕,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5; 󰡔니체󰡕 2, 박찬국 옮김, 도서출판 길, 2012;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을 각각 참조.] 표준적인 철학사 이해에 입각하면, 서양 근대철학은 르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개념에서 출발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1637)이나 󰡔성찰󰡕(1641) 같은 그의 주요 저작에서 회의주의에 맞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확실한 지식의 기초를 발견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나를 뜻하는 코기토 개념은, 우주의 창조주로서 신과 자연적인 실체에 중심을 둔 중세철학과 단절하는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 되었다.


데카르트 이후 주체 개념을 근대 철학의 확고한 기초로 확립한 철학자는 칸트였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 앞에서 말했듯이 철학에서 코페니르쿠스적 전회를 이룩한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는 주체의 관념이나 표상이 진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주체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사물에 있었다면, 칸트는 그러한 기준을 인식 주체 자체 내에서 발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잡다한 인상에 대해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일관된 개념적 표상으로 구성하는 것은 인식 주체의 활동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칸트 이후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는 인식 주체의 활동의 소산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주체 중심의 철학은 헤겔 철학을 통해 완성된 체계를 얻게 된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욕구와 의지의 주체로서 근대적인 주체 개념을 정립한 것으로 파악한다. 곧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의 역사에서 근대성은 무엇보다 존재를 의지, 본질의 욕구(exigentia essentiae)”[마르틴 하이데거, 󰡔니체󰡕 2, 422. 강조 표시는 원문.]로 파악한 시대다. 근대에서 존재는 모든 의지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인 한, ‘자신에게로향해서’(Auf-sich-zu)라는 것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며, “이러한 자신에게로 향해서라는 것의 본래적인 본질은 자기성으로서의 이성에서 실현된다. 존재는 의지에의 의지이다.”[같은 책, 423.] 따라서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기체성(基體性, Subiectität)과 구별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체성(Subjektivität)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코기토가 단순히 표상들의 주어 내지 주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니체에게서 완성되는 의지의 의지로서의 주체성 개념의 개시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하이데거가 특이하게도 데카르트의 주관성 내지 주체성의 형이상학을 고대 소피스트 철학자였던 프로타고라스와 연결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곧 이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간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이것의 형이상학적 완성을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힘을 위해 힘을 추구하는 의지의 의지에서 발견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코기토, 소유적 개인주의, 예속적 주체화: 서양 근대에서 개인과 개인주의, 󰡔민족문화연구󰡕 89, 2020 참조.]

 

지구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를 위해 인류의 모든 능력을 최고도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으로 하여금 더 새롭고 가장 새롭게 발진하도록 촉발하고 그의 안전한 전진과 목표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지침을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은밀한 목표다. () 근대 역사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인간 유형의 역사에서 인간은 도처에서 그리고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과 척도로서 내세우면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려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니체󰡕 2, 132~33.]

 

다른 한편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자율적인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근대적 개인 또는 주체가 사실은 그가 예속화”(assujettissement)라고 부른 예속적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루이 알튀세르, ; 󰡔재생산에 대하여󰡕, 앞의 책 참조.] 알튀세르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인간주의’(humanism)에서 발견했으며, 주체 개념을 그것의 철학적 표현으로 이해했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관점은 사실 마르크스의 통찰을 더욱 확장하고 급진화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술인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1844)에서나 후기 저술인 󰡔자본󰡕에서 지속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모순적인 성격을 고발한 바 있다.[칼 마르크스,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 김현 옮김, 책세상, 2015; 󰡔자본󰡕 1-1,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인권선언에서 천명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법적정치적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하지만, 정치적 이념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법적 문구 속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가정되는 사람들은, 현실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같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들로 분할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선언이 내세우는 평등과 자유는 사실은 현실의 계급적 지배 및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1번은 법적 이데올로기이며, 법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자유와 평등이라고 주장할 때, 사실 그는 마르크스의 통찰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5참조.하지만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기능은 예속적 주체의 구성이라고 주장할 때, 그는 마르크스를 넘어서 새로운 이론적 발명의 경지에 도달한다. 유명한 호명 테제가 뜻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 ...

주체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이라고 말하자. 하지만 여기에 곧바로 다음과 같은 점을 추가해두자. 주체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구성적인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들로 구성하는것을 자신의 기능(이는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는 기능이다)으로 갖고 있는 한에서다. 바로 이러한 이중적 구성 작용 안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의 기능 작용이 실존하며, 이데올로기는 이 기능 작용의 실존의 물질적 형태들 안에서 자신의 기능 작용 이외의 것이 아니다.[루이 알튀세르, 같은 책, 287~88. 번역은 약간 수정했으며, 강조는 원문.]

 

알튀세르 호명 개념의 핵심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개인 또는 주체가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강한 의미에서, 개인 또는 주체는 이데올로기 바깥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다. 역으로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따위의 피상적인 작용의 중심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기능은 주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호명은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 양식, 개인성 그 자체가 계급 지배 및 권력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다면, 해방의 사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분석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이 그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서 인간주의는, 이처럼 인간 개인 내지 주체의 구성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체계의 성립, 따라서 계급적 착취 및 지배의 구성과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오히려 인간주의는 인간은 본성상 자유롭고 법 앞에서 평등한 존재자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중세의 신분적 예속의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의 해방을 표현하는 근대성의 핵심 이념이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던 것을 데카르트는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라는 말로 새롭게 변형했고, 그것은 다시 헤겔 또는 루카치에 이르러 인간은 역사의 주체라는 테제로 지양되었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율적 주체이며 각자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라는 테제의 이면에는 인간은 우주와 자연, 역사의 주인이라는 또 다른 테제가 놓여 있다. 인간주의는 바로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했던 근대성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다.


21세기가 거대한 이행의 시기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주의가 더 이상 자명한 해방의 이념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퇴행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뜻을 함축한다. “인간이 먼저다는 구호는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조차 진부하고 쓸모없는 문구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국가 경제의 발전’, ‘국제적 경쟁력 강화’, ‘성장 동력의 발견’, ‘디지털그린 뉴딜같은 노골적인 이데올로기적 표어를 얼마간 완화하거나 감춰보려는 자위적인 소심한 수사법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먼저다라는 말은 갑질에 대해서도, 여성이나 성 소수자, 장애인 또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효과를 산출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생태적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퇴행적인 측면을 지닌다. 자연 환경의 파괴나 동물에 대한 과도한 착취의 기저에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의 주인이라는 인간주의 이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기술에 대한 대중들의 양가적 반응, 곧 과도한 두려움과 전능함에 대한 환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 역시 인간주의의 이념이다.


따라서 근대성을 지배해왔던 인간주의의 이념에서 벗어나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을들이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발명할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주권적이지만 배타적인 주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어떻게 타자들과의 공존 및 공생의 규범을 창안할 것인가 하는 것이, 21세기의 인간의 조건을 사고하기 위해 우리가 출발해볼 수 있는 가설이다.

 

5. 안전의 이중성

 

이러한 두 가지 가설에 입각하여 안전의 문제를 사고해볼 수 있다. 안전이라는 주제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가장 널리 논의되고 또한 가장 널리 요청되는 주제 중 하나일 터이다.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 이래 근 100여년 만에 닥친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는 모든 사람이 안전이라는 가치에 주목하고 집중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별 철저한 위생수칙 준수는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시민의 의무이자 안전 규칙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자명하고 보편성을 띤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규칙으로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15천만명이 넘는 확진자와 3백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21세기 최초의 팬데믹 상황에서 안전이라는 가치야말로 가장 시급하면서도 보편적인 규범이라는 점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안전은 매우 모순적인 규범이자 구호.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19 팬데믹 선언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작년 1월 말부터 이미 국내에서는 중국 동포와 중국인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염운옥, 배제의 정치학: 인종주의, 국민주의와 불안전의 ()생산, 󰡔황해문화󰡕 110, 2021년 봄호 참조.중국 동포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서울 대림동에서는 작년 1월 말 한국 전체에서 확진자가 7천명을 넘어서는 시점까지 단 한 명의 확진자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중국 동포들이 마치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인 것처럼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시피 2020년 겨울~2021년 봄 사이에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 아시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한 증오범죄가 발생한 바 있다. 이는 무엇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방역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정치적경제적 경쟁에서 우월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china virus)라고 부르면서 중국에 대한 대중적 혐오를 조장한 데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자신의 실존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많은 개인들 및 대중의 공포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중국이 이러한 안전을 깨뜨린 원인으로 표상/재현되면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나고, 이것이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인종적 증오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미 2020년 상반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강력한 타격을 받은 유럽 지역에서 광범위한 동양인에 대한 대중적 혐오감이 발생한 적이 있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Made in China”라는 제목으로 표현한 독일 시사 잡지 󰡔슈피겔󰡕의 기사나,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의 원인을 중국의 비문명적인 야만성에서 찾는 유럽의 대중 담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이은정, 코로나와 아시아의 타자화, 󰡔황해문화󰡕 108, 2020년 가을호 참조.]


한국에서 일어났던 중국인과 중국 동포에 대한 혐오, 미국에서 발생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증오 폭력,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제기된 중국 및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중국인 및 아시아인들을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지칭하는 언어적 폭력의 현상이다. 대림동에서 중국인 및 중국 동포에 대한 호칭이 짱깨에서 다문화, 그리고 다시 코로나로 변모된 것처럼, 미국에서도, 독일 및 유럽에서도 중국인 및 아시아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바이러스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상상과 욕망 속에서 아시아인 =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존재론적 등식이 작용하고 있다. 아시아인의 존재론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과 사회경제적정치적 안전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와, 타자들, 특히 중국 및 아시아인들을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대중들의 분노가 사실 동일한 욕망의 두 가지 표현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동일한 하나의 운동의 앞면과 뒷면인 셈이다. 코로나 19 팬데믹과 같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의 집단 감염병의 유행에 직면하여 자신과 가족, 이웃의 안전을 도모하고 또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기본 권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명하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요구는 또한 불가피하게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일어난 한국 동포들에 대한 증오 폭력에 분노하면서, 한국인은 중국인이 아니라고, 제대로 구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의 쟁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및 증오와 동일한 작용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많은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곧 그 미국인들(상당수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상당수는 유럽에서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이 되어온 하층 계급이나 이민자 유럽인들)은 중국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가 사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의 상상적 배출구이면서 동시에 복제물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미국인 내지 유럽인으로서의 자신들과 혐오스러운 타자로서의 아시아인을 제대로 구별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안전이라는 규범 내지 명령이 이렇게 모순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잘 보여준 바 있듯이, 안전은 역사적으로 이중적인 면모를 띠어왔다.[에티엔 발리바르, ...... ‘안전과 압제에 대한 저항,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참조. 또한 정정훈, 안전의 변증법, 혹은 민주적 권리에 내재된 모순, 󰡔황해문화󰡕 110, 2021년 봄호 참조.] 한편으로 안전은 프랑스혁명 이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인권선언2조에 나오듯이 자유, 소유권, 압제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규정되었다. 또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도 안전은 행복과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인민의 권리로 제시된 바 있다. “어떠한 정부든 이러한 목표에 반할 경우, 그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지하고 인민에게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원칙에 기반하여 권력을 조직한 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정정훈, 앞의 글, 24~25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전은 치안의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안전에 대한 요구는 많은 경우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모종의 세력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요구로 표현된다. 이에 따라 안전에 대한 요구는 가령 작업장 안전, 쾌적한 환경, 편안한 주거, (여성의) 안심 귀갓길, (장애인의) 이동의 권리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혐오시설 철거, 불법이주자 추방,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요구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민원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많은 권리 요구는 사실 차별과 배제에 대한 요구들이다.


안전에 대한 요구를 특징짓는 이러한 모순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래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전에 대한 권리는 일차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차지함에 따라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줄어드는 몫을 둘러싸고 더욱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늘 피해자 내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당하는 성적경제적사회적 약소자들의 절박한 생존에 대한 요구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요구이자 정상성에 대한 욕망으로, 차별과 배제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인 각자도생의 논리가 삶을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만큼, 홉스가 개념화한 바 있는 전쟁상태로서의 자연상태에서의 삶과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만큼, 안전에 대한 권리는 더욱 더 배타성과 차별화의 권리의 모습을 띠게 된다. 국민이자 정규직 남성 이성애자이고 비장애인이자 수도권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안전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체성의 배타적 권리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생존이 경쟁의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전리품과 같은 것으로 인식될수록, 그것은 (잠재적 경쟁자들인) 타자에 대한 난폭한 혐오와 배제를 수반하는 것이다.

 

6. 전능한 자의 무기력과 배제의 논리

 

이는 안전의 담지자인 국가에 대하여 대중들이 경험하는 (무의식적인) 이중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전능한 자의 무기력증후군이라고 부른 바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141쪽 이하.] 세계화의 시대는 국민국가의 주권적 역량이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위축되고 감퇴하는 시대다. 국민국가가 과연 그것이 자처하는 주권적 자율성을 실제로 가져본 적이 있느냐 하는 문제와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적어도 대중들의 상상계에서 국가, 국민국가라는 것은 자율적이며 전능한 것으로 상상되어왔다. 그런데 세계화는 대중들의 이러한 상상계를 붕괴시켰다. 한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를 외상적으로 체험했던 사건이 바로 IMF 외환위기였다. 이 사건은 한국의 대다수 국민에게 국가가 전쟁 없이도 망할 수 있다는 것, 국가는 그것을 무너지게 만드는 타자의 공격(세계 금융 시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각인시켰다. 이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산출한다.

 

아마도 가장 역설적인 것은, 보호자로서의 국가가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다는 것, 또는 우리를 보호하는 국가의 힘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부터 이러한 감정이 더 강력해진다는 점일 것이다. 외관상 우리에 대해서는 전능한 왜냐하면 우리는 국가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자신이 실제로는 무기력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낳는 불안감은 때로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144~45. 강조는 발리바르.]

 

그리고 전능한 주권자에 대한 상상계가 균열을 일으키게 되면, 대중들은 더욱 더 집요하게 자신들의 안전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이 배제된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 받으려고 하는데, 이러한 입증은 배제된 이들, 배제된 타자들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들은 국가가 다른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선택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 나는 열등 인간이라는 말까지 쓰려 했었다 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 요구한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누구를 우선시하는가? 국가는 누구 편인가? 그리고 국가의 결정들은 누가 내리고, 누가 국가로부터 정확히 우선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선택된 이들이고 누가 버려진 이들인가?[같은 책, 145~46. 강조는 발리바르.]

 

7. 마스크 쓰기가 의미하는 것

 

그러므로 코로나19 팬데믹이 안전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를 자극할수록 차별과 증오가 분출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치안의 논리에 따라 표상/재현되고 제도적으로 구현되는 형태로서의 안전은 늘 차별과 배제의 상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치안의 논리에 입각한 안전 개념과 다른, 민주주의적 안전의 개념을 사고해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안전은 어떻게 실행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기는 어렵다. 그것은 또 다른 지면 전체가 필요한 복잡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다. 이 글에서는 이제 결론을 대신하여 마스크라는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제기해보는 데 그치겠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마스크다. 평소에는 독감이 유행하거나 봄철 황사가 밀려올 때 한시적으로 착용했던(또는 연예인들이나 착용하는 것이었던) 마스크가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에는 안전의 대명사가 되어 상시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트럼프 집권 시절 미국에서 마스크는 정치적 갈등의 상징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트럼프는 공적인 장소에서조차 마스크 착용을 거부했으며, 마스크 착용을 겁쟁이에게나 어울리는 소심한 짓이라고 비웃곤 했다. 그 결과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것은 트럼프를 지지하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의 상징처럼 되었다. 반면 새로 대통령이 된 조 바이든과 민주당은 마스크 착용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으며, 또 스스로 그것을 계속 실천하고 있다.


미국의 정신분석 연구자인 토드 맥고완은 마스크를 둘러싼 이러한 정치적 갈등을 단순한 당파적 싸움으로 이해하지 않고, 좀 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쟁점으로 제시한 바 있다.[Todd McGowan, “The Mask of Universality: Politics in the Pandemic Response”, Crisis & Critique, vol. 7, no. 3, 2020 참조.] 그에 따르면 마스크 착용은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단 이 때 그가 말하는 보편성은 모든 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보편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이가 소유하지 않음을 나누어 갖고 있음”(what everyone shares not having)이라는 의미의 보편이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편적인 것은 순응을 요구하며 상이한 주체들에게 자신을 부과하는 이로써 보편성의 비판가들이 두려워하듯이, 그들의 특수한 차이들을 제거하는 주인 기표가 아니라, 그것의 부재가 주체성이 생성될 수 있게 해주는, 결여된 기표다.” [Todd McGowan, Ibid., p. 231.]

 

맥고완의 분석은 마스크 쓰기에 함축된 한 가지 중요한 철학적 함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실 마스크 쓰기는 여러 가지 함의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기초적인 방역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미 사스 바이러스와 메르스 바이러스 또는 신종 플루를 경험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마스크 쓰기는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효과적이고 확실한 수단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반면 유럽 사람들이나 북미 사람들에게 마스크 쓰기는 큰 질병을 앓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처럼 간주되어 거부감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더욱이 공적 공간에서 마스크 쓰기는 정치적 주체의 자율적인 자기 표현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져 더욱 금기의 대상처럼 취급되었다. 하지만 마스크 쓰기가 코로나19에 대한 효과적인 방역 수단이라는 점이 임상적으로 입증된 이후에는 마스크 착용이 훨씬 더 일반화된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둘째, 마스크 쓰기는 개인의 자율성 및 독특성에 대한 제약이자 규율의 부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증가할수록 마스크 쓰기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행정 당국에 의해 요청되고 더욱이 치안을 통해 통제되는(곧 그것을 어겼을 경우 법적인 제재의 대상이 되는) 강요된 실천이 되었다. 한여름에, 그것도 냉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얼마나 성가시고 괴로운 일인지는 작년 여름 많은 이들이 경험한 바 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 착용을 준수하는 것은 감염을 피하려는 욕구에 더하여 치안의 강제가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유럽의 언론 매체에서 동아시아인들의 마스크 쓰기는, 디지털 장치를 통한 감염자 추적 방식과 더불어, 동아시아에 고유한 권위주의적 규율 문화를 상징하는 실천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셋째, 마스크 쓰기는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단지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욕구만이 아니라, 혹시 나도 모르게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나 자신으로부터 타인을 보호하려는 배려의 의도와 몸짓 역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맥고완이 말하는 마스크 쓰기의 보편성도 이점과 연결되어 있다. “보편성의 가면”(Mask of Universality)이라는 그의 글의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스크 쓰기가 (정치에서의) 보편성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보편성이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스크, 은폐 내지 가림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보편적인 것은 항상 은폐된 것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데, 맥고완에 따르면 그 이유는 보편적인 것(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로 하면 대타자(the Other))이란 실정적인 사실로서, 모종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스크가 은폐하는 것/마스크가 가리키는 것은 실체로서의 보편이 아니라, 사실 그러한 의미의 보편이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맥고완 자신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의 분석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우리에게 확고하게, 일의적으로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보편적 심급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마스크이든, 백신이든, 아니면 국가이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코로나19 팬데믹이 상징하는 감염의 위협, 건강과 생명에 대한 위협에서 절대적으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결정적인 장벽, 방어막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알베르 카뮈의 또 다른 교훈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사실은 페스트이고 우리 자신이 바이러스(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야말로 나의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바로 그 페스트와 싸운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고, 우리들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326~329.]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안전의 부재는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우연적인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우발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조건 자체(그것을 신자유주의로 이해하든, 파괴되어 가는 생태적 조건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좀 더 거시적이고 실존적으로 말해 이중 기생의 구조라고 이해하든 [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 김우영 옮김, 이산, 2005 참조. 맥닐은 인류 문명은 이중기생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각종 세균들이 인간을 숙주삼아 기생해온 것이 미시기생이라면, 각종 노역이나 세금 등을 통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기생해온 것은 거시기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에서 비롯한 필연적 사실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공동의 안전을 민주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하기 위한 일차적 조건일 터이다.


코로나19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 계기였을 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포스트 코로나라는 문구야말로 치안을 상징하는 문구, 따라서 코로나19의 교훈을 통찰하는 것을 방해하는 거짓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살펴보는 일은 다른 글의 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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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의 철학]에 부친 추천사 올립니다. 정보사회의 철학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정보사회론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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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에 관한 철학적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빅데이터, 인공지능, 4차산업혁명, 메타버스 ... 우리는 최근 이런 용어들을 언론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이 용어들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촘촘한 정보 네트워크의 그물망으로 짜인 정보사회로 전환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현란한 신조어들의 범람을 경험하다 보면 과연 우리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인지, 정보사회가 기존의 사회 구조, 사회적 관계와 어떻게 다른 사회이며, 그것을 어떻게 전환하고 있는지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렵다.


시중에서 숱하게 접할 수 있는 IT 관련 도서들도 이런 문제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책들은 특정한 기술, 예컨대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또는 메타버스 등과 관련한 기술적 동향을 이해하는 데나, 이러한 기술이 어떤 실용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지닌 사회적인간학적생태학적 함의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이고쿠 다케히코 교수의 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은 정보통신기술의 최근 동향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정보사회의 현황을 개관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이다. 특히 저자는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에스엔에스, 로봇 등과 같은 2010년 이후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진화를 소개하면서 그 특성과 함의를 일목요연하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더 중요한 의의는 이러한 기술적 진화를 평면적으로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근대 사회에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철학자들도 기술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논의해왔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전개과정에서 기술의 발전이 차지하는 역할을 비판적으로 논의한 바 있으며, 저자도 본문 중에서 언급하는 마르틴 하이데거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기술철학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 나온 하이데거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논의는 21세기 정보사회의 특성과 함의를 살펴보는 데는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독일의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이나 프랑스의 질베르 시몽동의 기술철학, 그리고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 사상에 기반을 둔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탈구축적 기술철학 등이 정보사회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한 유력한 이론들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해서 보통의 독자들이 쉽게 접하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정보사회의 철학󰡕을 읽으면서 내가 놀란 점은, 저자가 정보통신기술의 최근의 발전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와 루만, 데리다 등과 같은 현대의 대표적인 기술철학에 관해서도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저자는 복잡하고 난해한 여러 기술철학들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교양독자들이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게끔 간명하게 제시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기반으로 정보사회의 진화의 방향과 의미를 탁월하게 철학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국내에 소개된 정보사회에 관한 숱한 개론서들과 수준을 달리하는, 정보사회에 관한 최고의 철학적 입문서라고 평가할 만한 저작이다.


아마도 이 책의 백미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정보사회에서 어떤 윤리가 가능한가에 대해 매우 유익하고 통찰력 있는 논의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기술에 관한 많은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인간 중심주의의 관점에서 기술을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로 파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적 진화의 양상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근대 철학의 기초에 놓여 있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정보사회에서의 윤리의 문제는 더욱 더 시급한 과제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한편으로 여전히 인간중심주의를 고수하면서 기술의 발전을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무분별하게 학대하면서 또한 부의 독점을 위한 새로운 도구로 삼는 길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생태적 재앙과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가 낳은 문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택하기는 어려운 길일 터이다. 반대로 이제 인간을 더 이상 자연과 기술의 주인으로 상상하는 미망에서 벗어나, 탈인간주의의 관점에서 좀 더 정의롭고 호혜적인 기술적 진화의 경로를 따르는 길도 존재할 것이다. 저자는 결연하게 이 후자의 관점을 택하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철학은 오래 전부터 비판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아 왔다. 하지만 철학이 추구하는 비판은, 비판의 대상을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의미에서 철학적 비판은, 탐구 대상의 근거와 조건을 묻는 것이고, 그러한 탐구를 통해 철학하는 주체의 삶의 올바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기술에 관한, 정보사회에 관한 철학적 비판의 길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탁월한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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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제정 국민청원 만료일이 13일밖에 안 남았네요.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주소에서 청원에 동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C25F4B51E8D2312DE054A0369F40E84E




아래에 있는 글은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고 알기 쉽게 밝힌 글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https://brunch.co.kr/@yonseiji/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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