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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일놈 잡종' 저주받은 아이들, 입 열다: [프랑스 화제 신간] 피카페가 담은 전쟁 기록 <저주받은 아이들>

박영신 기자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이 지난 6월 6일 오후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은 자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필두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참했던 연합국은 물론, 패전국인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등 16 개국 지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시라크 대통령은 여기서 '화해의 시대'를 역설했지만 그러나 끝내 침묵했던 이야기가 있다. 지금까지 애써 덮어왔던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 그 사이 다가온 불-독의 화해 분위기마저 이들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다.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정치인들은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저주받은 아이들> 입을 열다

▲ 피카페의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 독일과 영국에서도 곧 출판 예정
ⓒ2004 Syrtes
나치 독일이 전쟁에 패하고 물러난 1944년의 여름, 해방된 파리에서는 해괴한 장면이 연출됐다. 머리를 박박 깎인 여성들이 거리로 내몰려 이른바 '조리돌림'을 당했던 것.

거리에 모여든 시민들은 민머리를 한 이 여성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거나 침을 뱉었다.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점령 프랑스에서 독일인 병사를 사랑한 이 여성들은 해방 조국에서 '국가의 수치'로 내몰렸으며 그래서 간단히 '더러운 창녀'로 치부됐다.

해방과 동시에 꼴라보(collabo, 대독협력자)들조차 너나 없이 레지스탕스(resistance)로 둔갑하는 마당에 어디서도,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여인들은 매를 맞아야 했다. 해방의 기쁨과 '배신자' 처벌로 들뜬 분위기에 휩싸인 군중은 이렇게 가장 나약한 자부터 응징했던 것이다. 프랑스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끄러운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던 그 때, 독일인이 '독일놈'이었던 바로 그 시절, 프랑스인 어머니와 독일군 병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른바 '독일놈의 잡종(bâtards de boche)', '기생충(parasites)'으로 불리며 어머니의 업보를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했다.

독일 점령 시기, 젊은 프랑스인 여성과 독일군 병사의 금지된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20만에 이른다. 이제는 58세에서 63세의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들'로 불리는 이들이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일간지 르피가로의 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했고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 장-폴 피카페(Jean-Paul Picaper)가 이들의 증언을 담아,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Enfants maudits)> 을 펴냈다.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하는데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금기"라고 진단한 피카페는 저서에서 60년 동안 이들이 '두터운 침묵 속에 버려져 있었다'라고 말한다.

전후 정체불명의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그 자체가 죄가 됐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벌을 받아야 했던 것. 어머니에게 내린 징벌만으로 아이들까지 용서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아버지 자리를 메우기 위해 결혼을 하기도 했으므로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혈통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 모두가 오랜 기간, 수치와 죄의식의 나날을 보냈으며 딸의 잘못을 속죄하는 가족들도 학대를 견뎌야 했다. 또 몇몇 아이들은 어머니가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동안 남의 가정에 맡겨지기도 했다.

피카페의 붓끝으로 쓰여진 충격적이고 한편 비극적인 이들의 삶을 소개한다.

'독일놈 잡종' 손자, 닭장에 가두고 자물쇠 채우기도

1950년대 초,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메그리에서는 매주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나면 시청 서기관이 마을 광장에 주민들을 모으곤 했다. 어느날 서기관은 10살난 소년을 불러 제 옆에 세우고는 주민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독일놈과 제비의 차이를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서기관은 다시 말을 잇는다.
'제비는 프랑스에서 자기 새끼를 치면 떠날 때도 데려가지만, 독일놈은 새끼를 버려두고 가지요.'


이것은 당시, 이유도 모르면서 눈물만 흘리며,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던 10살난 소년 다니엘 룩셀의 회상이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구경거리였다. 할머니는 내가 밖으로 나도는 것을 금지시켰고 밤새 나를 닭장에 가두고는 자물쇠로 잠궈버렸다. 나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에 떨어야 했다.'

독일군 병사와 프랑스 여성의 딸로 추정된 미셸은 1941년 출생과 동시에 버려졌다. 1945년, 연필조차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나이에 유모로 부터 '나는 독일놈의 딸이다'라고 공책에 쓰도록 강요받았다고 미셸은 회고한다.

현재 62세의 스페인어 교사가 된 미셸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애시당초 영원한 고통에 저당잡힌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독일놈의 잡종' 앙리에뜨의 기억도 여기서 멀지 않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과 오락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학교를 찾아와 "선생님이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독일인과 잔 것은 앙리에뜨가 아니라 바로 나예요, 누군가를 욕하고 싶다면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 제게 하셨어야죠"라는 해명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죽어야 '독일놈 잡종'이라는 오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독일인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용서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앙리에뜨 어머니의 말은 그간의 고통을 잘 말해 준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독일군 병사를 사랑했던 까닭에 해방 후 뭇매를 맞고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독일인 연인을 돕고, 숨겨줬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은 다름아닌 친오빠였다.

이 책에는 13세가 돼서야 자신이 독일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쟈닌의 이야기도 있다.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던 쟈닌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자신이 그저 '독일인'이 아니라 '살인자의 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두 달 동안 벙어리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할아버지에 의해 수녀원에 맡겨진 쟈닌은 10살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몸무게는 18kg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리고 아무도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유럽판 '이산가족', 이름만으로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

1945년 1월, 독일군은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 땅에서 대부분 쫓겨났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2차 대전 당시인 1943~1946년 즈음 프랑스에서 프랑스인 여자와 독일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가 적군이라는 이유로, 혹은 프랑스 역사의 수치라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며 숨겨졌다.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정체불명인 아버지의 이름만이라도 알고자 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베를린에 있는 WASt라는 관청을 찾았다. WASt는 독일군 참전 및 전몰 용사 친족 전문 기관으로서 2차 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병사와 민간인의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 때문에 WASt에는 독일이 점령했던 유럽 국가를로부터 혈육을 찾고자 하는 편지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기관을 통해 가족을 찾은 몇몇은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고, 또 몇몇은 관청이 주선한 단체 방문이 성사돼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애니 프리드 링스태드도 그녀의 나이 32세때 WASt를 통해 아버지를 찾은 경우다. 링스태드는 자신의 이야기로 'Knowing me, knowing you, that's the best we can do'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만으로 독일에 있는 가족을 찾고 있는 이들도 많으나, 만난다 하더라도 오랜 이별 기간의 공백을 단번에 메꾸기란 역부족. 간혹 의붓 형제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80이 넘은 아버지들은 잊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혹은 유산을 노리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다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찾아온 자녀들을 부정하는 일도 있다고.

<저주받은 아이들>, 전쟁의 고통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본격 첫 보고서

피카페에게 이들의 절절한 사연을 알린 사람은 바로 WASt의 자료 담당 직원 루드비히 노즈였다. 노즈와 함께 써내려간 피카페의 저서는 이런 이야기를 담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출판됐다.

1993년 마르탱 브로사는 여성의 삭발식을 가리켜 '야비한 카니발'이라는 책을 써서 항의한 바 있고, 2000년 파브리스 비르질리는 '씩씩한 프랑스, 해방으로 삭발된 여성들'이라는 책에서 역설적으로 못난 프랑스를 조롱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마침내 프랑스의 민영 TV < TF1 >이 다니엘 룩셀의 일기를 담은 '아이들'이라는 첫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후, 2003년 3월에 프랑스3 TV가 '독일놈 잡종'이라는 프로그램을 특별 편성 방송한 일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며 집단 따돌림과 비극의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본격 보고서는 피카페의 <저주받은 아이들>이 처음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 독일인 병사들이 젊은 프랑스 여성들을 강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차 대전 동안 수백만의 독일군이 유럽을 장악했지만 1942~1943년까지 독일군 병사들과 점령국 민간인들의 관계는 차라리 친숙하기까지 했는데, 군복을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종종 징병된 군인이었으며 나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간이나 약탈 등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엄격히 처벌됐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하여 점령군과 그 아래에 있는 국가의 젊은 여성들의 위험한 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프랑스인 연인의 가정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은 테러와 포로 숙청 등으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에 의한 프랑스 거주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 집단수용소에서의 죽음 등으로 표면화됐다.

이런 가운데, 당시에는 피임이라는 것이 부재했고 아이가 생기면 출산을 해야 했지만 당시의 도덕으로 볼 때 사생아는 '악'이었으므로, 그리고 치욕적이었으므로 그들의 많은 수가 버려졌다.

이 아이들은 이른바 '매국'의 열매인 '저주받은 출생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1945년 5~6월, 러시아군의 베를린 여성 집단 강간으로 태어난 '러시아군 아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상황이었다 하니 '러시아군 아이들'의 경우는 상상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오늘의 독일은 전쟁의 포화 뒤에 죽음과 끔찍한 기억만을 남겨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고 쓰고 있는 피카페의 이 저서는 머지않아 독일과 영국에서도 출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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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에 관한 몇 가지 의문...(2)

 (1)편에 이어 (2)편에서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왜 그러한 것이 의문점으로 대두되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을 살펴보면 그 시대에 나타난 탑의 조성양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탑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가 일반적인 탑의 석재와는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특히 일반형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왜 다른 탑과는 다를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면

 1.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는 왜 다른 탑과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을까?

 2. 탑의 몸돌은 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층마다 받침이 모각(돌에 새겨진 형태)되어 있으나 유독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 갑석에는 탑의 몸돌을 받치는 받침이 없을까?

 3. 탑의 기단석에는 용의 문양이 있는데 발톱이 다섯개로 이는 당시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사용할 수 있는데 어떻게 발톱이 다섯개인 용을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4.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찰이 전소되었을 때 이 석탑도 그 피해를 보았는데 탑신석은 불길이 닿은 흔적을 보이나 유독 용문양이 새겨진 기단석에서는 불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까?

 5. 기단의 귀퉁이에는 죽절형(竹節形)의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음에도 탑신에는 단순하고 간략하게 날카로운 칼로 판 것 같이  선으로 우주의 형태만을 나타내고 있을까?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신륵사 다층석탑을 고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왜? 대리석을 이용하여 탑을 조성하였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신륵사 경내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물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층 전탑이 바로 그 탑입니다. 전탑은 주로 안동지방과 칠곡의 송림사 5층 전탑, 제천의 장락동에 있는 전탑과 같이 경상북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에 건립되었었는데 경기도 땅인 여주에 조성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한강의 지류를 타고 전래된 것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신륵사가 위치한 지형은 鳳尾山입니다. 뜻풀이를 하자면 봉황의 꼬리처럼 형성된 산입니다.그리고 이 산에는 바위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신륵사 주변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석재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전탑을 조성하게 된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전탑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그 입자가 굵고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서는 신륵사 인근에서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여 탑을 만드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리석이라는 석재를 그 재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리석은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양질의 대리석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산량이 적은것은 물론이고 대리석의 크기 또한 대형이 아니어서 대리석을 이용하여 큰 탑을 조성하기는 불가능 하였고, 이에 따라 탑은 크기가 크지 않는 3m 내외로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매 탑신이 옥개석을 포함하여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탑신 받침석이 모각되어 있으나 유독 상층 기단의 갑석 위에는초층 탑신을 받치는 받침석이 없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신륵사가 중창된 시기는 기록에 의하면 1467년입니다. 중창 당시 이 절은 세종 영릉의 資福寺로 중창된 절입니다.  만일 당시 왕실의 명령에 의하여 조성된 사찰의 탑이라면 과연 이렇게 부분이 결구된 형식의 탑으로 조성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탑은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부처님을 대신하는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功力을 필요로함은 물론이고, 탑을 조성함에 있어서도 온 정성을 다함은 당연하다 할것인즉 탑의 기단석위에 있는 1층 몸돌 받침석을 빼먹고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세번째의 의문은 문양에 관한 의문입니다. 조선은 明과 淸이라는 거대한 중국의 두 황제국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었습니다. 매년 조공을 바쳐야하는 형제의 나라로서 중국 황실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용의 발톱이 5~7개인 것은 바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황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륵사가 당시 아무리 임금의 원찰이었다 해도 황제를 상징하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문양으로 넣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발톱 5개를 가진 용의 문양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대를 전후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라 칭한 이후에나 도자기 등에 발톱이 5개인 용의 문양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륵사 다층석탑에는  제가 (1)편에 올린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용의 문양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용의 문양에서 발톱이 5개로 표현된 경우는 드문 예로 이에 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의문은 탑신석에서는 화재에 의한 그을음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유독 아랫쪽인 기단석에서는 왜 그 흔적을 찾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륵사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석재로 만들어진 탑은 그 와중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석재라서 다른 목조건물 처럼 화재에 견딜 수 있었지만 화재의 피해를 입었으며 사찰을 복구할 때 이 탑도 손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탑을 닦아 내었을것인데 유독 용문양이 조각된 기단석 부분만 닦았을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부처님을 대신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불탑을 관리함에 있어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닦고 다른 부분은 방치한다는 것은 불가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화재로 인한 석재의 그을음은 아무리 닦는다고 해도 열에 의한 피해로 석재의 재질이 변함으로 인하여 화재의 잔재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현대의 신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임을 비추어 볼 때, 화재 당시에 이 탑의 기단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피해가 없었거나 또는 화재후 다른 대리석재로 바꾸었다는 등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섯번째의 의문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 문양과 탑신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이 너무 극단의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래 사진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인데 영락형(목걸이형)의 장식으로 조성되어 있음에 비해 탑의 몸돌 모퉁이 기둥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단순하게 얕은 선으로 모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단과 탑의 몸돌이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단석에는 매우 섬세하고 공을 들여 용의 문양과 더불어 귀기둥에도 세심한 조각을 했음에 비해 탑의 몸돌에는 겨우 흔적만 알 수 있도록 모각을 한것에는 분명히 어떤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단지 조각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였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다른 여타의 탑도 신륵사 탑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탑은 선대의 탑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신륵사 탑에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석탑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탑을 조성하고 있는 석재는 대리석으로 일반 화강암과 같이 입자가 굵지 않아 조각하기에는 비교적 수월한 편임에도 일부에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또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제작 공정이라 궁금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점은 문헌기록이 있다면 자세히 풀어갈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이 의문점을 풀수 있는 단서가 없어 아쉬움을 남김니다. 조선시대의 이형석탑의 하나로,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탑은 그 제작 시기부터 재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초기의 조사 결과에 따라 중창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만, 나옹선사가 입적한 절로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탑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절의 조성과 동시에 조성됨을 비추어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이 절의 탄생과 관련지어 볼 필요가 있다 할것입니다.

 <에필로그>

  제 스승께서는 제가 제기한 다 섯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일단의 제자를 대동하고 신륵사 탑의 간략한 재조사에 임하셨었습니다.  주로 5가지의 의문 사항을 확인하는 조사였는데 대부분 제가 제시한 의문점에 동조를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30여년전 다리가 없어 강나루에서 신륵사로 건너가서 조사를 하였으며 당시 그런 깊이 있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제가 제기한 5가지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시면서도 편년(제작년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노 학자의 조사결과를 번복한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기에 그러셨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륵사탑의 기단석은 처음부터 같은 탑의 부속 석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외부(혹은 외국)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문양으로 보아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도입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신륵사에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기단부가 심각한 손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왕실의 원찰로서 기단부를 새롭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탑의 정확한 편년을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엇을 것으로 판단되는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던 대리석과 원래의 탑의 석재였던 몸돌 대리석에 대한 재질 분석을 통하여 원산지를 확인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할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조급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탑의 건립연대를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지속적인 연구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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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연금개혁이 우리의 모델(?)

-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국민연금 기사를 보고

 

강동진

 
 
국민연금에 대한 불만이 광화문 촛불 시위로 이어지고, 연금폐지론, 기초연금도입 주장 등 연일 연금관련 논쟁이 불을 붙는 가운데에 '관점이 있는 뉴스'를 지향하는 인터넷 신문 6월 9일자 '프레시안'에 국민연금 관련기사가 실렸다. 내용의 핵심은 멕시코에서 공적연금 적자의 누적으로 파산위기에 몰리자 '칠레형 민간연금'으로의 대대적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이다. 칠레형 모델은 '세계 최고의 모델'로서 영국 등 공적연금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모범 모델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기사 말미에 '자신이 납부한 보험료 원금과 기금의 운용 이자에 따라 결정될 뿐 아니라 세금 혜택이 주어지므로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동기를 크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하경제를 제도권 경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도 거두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칠레의 연금제도는 기사에서 소개하는 바대로 '개인구좌식 적립방식'이다. 1974년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하고 등장한 군사독재정권인 피노체트 정부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시장경제체제 도입, 민영화, 자유화 조치 시행을 통한 국제 금융시장에의 접근을 기본 방향으로 삼았다. 1980년대 초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강타한 외채 위기에서 칠레도 예외가 아니었고, 위기 극복을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연금개혁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81년 신연금법을 제정하여 정부가 관리하던 연금제도를 민간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유치, 운용하는 '개인구좌식 적립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외채 위기 극복의 방안이라는 등의 사적연금을 찬양하는 각종 논리가 동원된 것은 물론이고, 세제혜택 등 사적연금으로 유인하기 위한 동기도 정부 차원에서 제공되었다. 그 결과 신연금법 발표 이후 8개월 만에 전체 노동자의 80%가 사적 연금으로 전환하였고, 1994년에는 기존의 확정급여형 공적연금을 완전히 대체하여 민간이 운영하는 강제방식의 확정기여형 연금저축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델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델인가에 대해서는 의심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칠례의 사적 연금 개혁은 결코 외채위기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지 않았으며, 칠레의 연금시장에 진출하려는 외국자본은 자유화와 탈규제를 요구했고 'IMF 구조조정협약'을 이행할 것을 강제했다. 그리고 이렇게 적립된 자금은 금융시장을 통해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은퇴 이후 받는 연금액수도 매우 불안정하다. 민영화된 연금체계에서 은퇴시기에 받는 연금의 액수는 개인이 기여한 것에 투자수익률을 더한 액수이다. 물론 여기서 관리회사에 지급하는 수수료가 빠져야한다. 그리고 투자가 언제나 플러스 수익률을 내지는 않을 수 있으므로, 투자에서의 손실분은 개인이 감내해야한다. 대다수의 저소득층은 기여할 수 있는 여유소득이 없기 때문에 연금의 혜택에서 제외되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사적연금의 극성 속에서 아무런 조치조차 취해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관리회사들의 수수료는 계속해서 증가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규제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기사에서 언급하는 '자발적으로 참여할 동기'란 다름 아닌 퇴직 이후 '노후의 생존'을 개개인이 책임져야 할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극심한 경쟁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길 밖에 없다'는 상황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정부는 6월 중으로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율은 낮추는 연금법개정안과 주식투자 비중을 자유롭게 하는 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태세이다. 아울러 이와 동시에 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한다는 명목하에 '기초연금'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시민단체와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는 퇴직금제도를 없애고 기업연금을 도입하는 주장마저 나온다. 그리고 현 제도에 대한 불신을 빌미로 '사회적 연대'를 해치는 주장마저 스스럼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국민연금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비판의 기능을 제공하기 보다, 특정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선전하는 수단과 무기로서 기능한 지가 오래이고, 또한 그것이 속성임을 요즘 들어서 더욱 자주 드러내고 있다. 특히나 국민연금관련 논란과 보도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 '이슈'에 끼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일부 '여론제기 집단'이 기본 원칙과 방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 없이 '설 익은 주장'을 함부로 내놓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사실 '연금개혁'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정부의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노동자 총파업투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의 출발에는 세계은행과 OECD의 '연금개혁 권고안'이 자리잡고 있다. 그 권고안의 목적은 노동자의 소득(임금소득이든, 노후소득이든)을 주식·금융시장의 체계속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국민연금 논란의 해법은 다소 추상적이고 원론적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글은 보건복지민중연대·사회진보연대가 공동으로 펴낸 '연기금 금융화저지 자료집 - 국민연금개악·기업연금도입 반대투쟁을 위하여'를 참고하였습니다)
2004년06월09일 21:53:08

*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 퍼왔습니다.

http://cast.jinbo.net/news/view.php?board=new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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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보도 속보 경쟁보다 ‘질’ 택해야

 

'질’ 좋은 서평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지한 독자라면 내용을 줄줄이 축약해 주기보다는 책의 장단점을 명확히 밝혀주는 서평, 서평자의 시각이 분명한 서평을 좋은 ‘질’의 서평으로 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게 ‘책의 됨됨이를 따진다’는 서평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기도 하거니와, 요새 같은 정보홍수의 시대에는 바로 그런 서평만이 경쟁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용만을 요약할 거라면 아까운 지면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 서점,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에 넘쳐나는 게 그런 자료들이니 말이다. 게다가 요새는 웬만한 출판사들도 다 홈페이지를 갖추고 있다. 그저 간추린 내용만 궁금한 사람이라면 출판사 홈페이지의 자료실에 들어가 신간 보도자료만 봐도 자기가 원하는 내용은 다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의 ‘책과 사람’은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내 직업 경험상 그 책이 신간이고 서평자가 기자라면 거의 90%, 서평자가 외부 필자라면 50% 정도가 출판사 보도자료를 참조해 책의 내용을 단순 요약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물론 그대로 베낀다는 말은 아니다. 기자들도 머리말, 결말, 옮긴이 후기(그리고 개인적으로 흥미 있거나 더 필요한 부분) 정도는 읽은 다음, 보도자료의 구성도 바꾸고 살도 더 붙일 테니까. 물론 달라질 것은 없다. 내용만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따지고 보면, 이것은 〈한겨레〉뿐만 아니라 주요 일간지 모두의 문제이다. 그리고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여러 문제 중 ‘시간’ 문제만을 예로 들어보자.

〈한겨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일간지들은 토요일에 서평란을 싣는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늦어도 월요일 오전까지는 신간을 배포하는데, 그 수많은 신간들을 하루 반나절 만에 거른다고 해도 원고마감이 금요일 오전일 테니 기자들이 책을 읽고 기사를 쓸 시간은 3일 반나절 정도밖에 없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2003년 출판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나온 책들의 평균 두께는 251쪽. 서평 전문기자가 별로 없는 국내 일간지 사정으로 보건대, 3일 반나절 안에 이만큼의 분량을 다 읽고 생각을 정리한 뒤 원고지 5~10장 분량의 글 하나를 쓰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일례로 6월5일치 ‘책과 사람’을 보라. 한 기자가 〈마틴 루터 킹〉(443쪽), 〈야만의 시대〉(304쪽), 〈독립신문, 다시 읽기〉(467쪽), 〈선물〉(135쪽) 총 4권의 서평을 썼다. 마지막 책은 신간이 아니니 제외하더라도 총 1214쪽 분량이다. 상황이 이런데 하물며 됨됨이를 따진다니!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출판사들이 신간과 함께 보내주는 보도자료는 기자들에게 가뭄의 단비다. 출판사들도 좀 귀찮긴 하지만 손해볼 일은 없다. 약간의 수정이야 있겠지만, 큰 틀에서는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책이 소개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난하든 부자든 출판사들로서야 일간지 서평란이 알아서 광고판이 되어주니 금상첨화다. 그러나 서평란도 광고판이기보다는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어야 더 재미도 있고 멋도 있지 않을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서평란을 타블로이드판(24면)으로 낸 지 한 달이 더 넘어간다. 개인적으로야 〈한겨레〉도 서평란을 증면했으면 좋겠으나, 꼭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굳이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지금의 형태로 ‘질’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만약 시간이 문제라면, 시험삼아 서평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보는 것은 어떨까 정말 소개할 만한 책이라면 서평까지 ‘속보 경쟁’의 희생물로 만들지 말고, 한 주 늦게 소개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정말로 ‘신속성’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신간을 ‘잠깐독서’ 형식으로 9권(지금은 3권이다)까지 소개한 뒤, 이 중 한두 권만을 골라 다음주에 심층적으로 다루든가. 아니면 ‘왜냐면’의 형식을 빌려와 ‘책과 사람’ 지면을 부분적으로 혁신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어떤 형태가 됐든지 간에, 주어진 한계 속에서도 ‘책과 사람’을 바꿔볼 방법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그동안 ‘책과 사람’을 사랑해온 독자들을 배신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

이재원 <도서출판 이후> 전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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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항쟁 17돌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학계평가 회의적

1987년 6월 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를 그 적자로 여긴다. 얼마전 청와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진 것이 상징적 예다. 이제 ‘6월 정신’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과제는 노무현 시대를 통해 그 결실을 맺은 걸까.

학계의 평가는 회의적이다. 김상곤 교수(한신대)는 그 이유를 현 정부에게 주어진 과제의 성격에서 찾는다. 김 교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10일 개최한 6월항쟁 17주년 토론회 발제문에서 “지금까지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게 오늘의 민주주의 과제라고 짚었다. 그것은 “경제적 민주화와 경제과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연관지어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방안”이다.

그 핵심은 이른바 ‘87년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것이다. 박영호 <동향과 전망> 편집위원회 소장은 최근호 머릿말에서 “상업적 이익이 유일한 선택이자 생활방식인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해진다”고 밝혔다. 이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새로운 ‘적대적 상대’는 군사독재가 아니라 세계화다. 그것은 기왕의 민주적 성과마저도 위협한다. 세계화는 “불평등 문제를 사회보장국가를 통해 해결”하는 일국적인 개량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최소한의 해답’인 사회보장체제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에서 이제 민주주의는 바람 앞의 촛불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학계의 냉정한 평가다. 윤상철 교수(한신대)는 “노무현 정부는 경제·사회복지·대외정책 등에서 이전 정부에 비해 오히려 퇴조하는 양상을 보여줬다”고 꼬집는다. 윤 교수는 지난 8일 한신대 사회과학연구소 심포지엄에서 “(노무현 정부는) 경제적·사회적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정책적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이때문에 사회적 민주화에 대해 대응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안을 정치적 쟁점화하는 전략으로 이동했다”고 비판했다.

조현연 교수“사상적 결손과 정체성 빈곤의 한계”
박영호 소장 “사회보장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해”
윤상철 교수“경제·대외정책 오히려 전보다 퇴조”

이런 전략의 문제는 현 정부가 자리한 ‘시대적 좌표’에서 비롯된다. 민주화 이행은 일반적으로 ‘자유화기-이행기-공고화기-심화기’ 등의 단계를 거치는데, “김대중 정권 후반기부터 정치적 민주화의 단계를 벗어나 경제적·사회적 자원의 재분배구조를 변화시키는 민주적 심화기가 시작됐다”는 게 윤 교수의 판단이다. 민주적 심화기의 한가운데 서있는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는 민주화 이행기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조현연 교수(성공회대)는 이를 ‘영양실조에 걸린 민주주의’라 부른다. 조 교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토론회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민주적 공고화가 아니라 오히려 탈민주주의 추세 속에서 급격히 퇴락하고 있다”고 짚고, 노무현 정부의 “사상적 결손과 정체성 빈곤의 한계”를 그 이유로 들었다.

87년 6월 항쟁의 주역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청와대에서 부르는 오늘, 역설적이게도 한국 민주주의는 시련 앞에 섰다. 진보 학술진영은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세계화·사유화·상업화를 위해 폐기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화·사유화·상업화의 내용을 변경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섰다”(박영호)고 단언한다.

학계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 새로운 민주주의 과제를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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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11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보면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이런 지적들이 참신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
노무현 정부의 "도덕적 자부심", 그에 근거한 당당한 화법을 보면 아연할 때가 많다. 무슨 근거로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balmas 2004-06-1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는 분들께

이렇게 저렇게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고 또 지지하는 분들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때가 아닌가 합니다. 노무현 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열린 우리당을 과반수 정당으로 뽑아놓고 할 일 다했다고 돌아누워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안타까워하거나 혼자 술먹으면서 배신감 운운할 때가 아니라, 여러분의 희망, 여러분의 이상을 좀더 굳건하게, 좀더 책임 있게 지켜나갈 때가 아닐까 합니다.
노무현 지지자 여러분은 여러분의 희망과 여러분의 이상을 위해 노무현과 열린 우리당을 선택한 것이지, 노무현과 열린 우리당 그 자체를 위해 그들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이상을 좀더 똑바로 알아달라고, 그 이상을 배반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요구할 때가 됐습니다.
국가 기밀이 어떻고 국가 안보가 어떻고 시장 원리가 어떻고 등등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때로는 당이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짐짓 제왕의 흉내를 내고, 나라도 화가 나겠다고 제왕의 역성에 아부하는 자들도 나타나겠지만, 여러분은 겁내지 말고 여러분의 이상과 여러분의 요구를 말하세요.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아니라서 대통령의 심중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겠지만, 우리들의 요구는 이렇다고, 우리들의 희망과 이상은 이렇다고 여러분의 요구를 말하세요. 여러분이 자신들의 요구를 말할 때, 여러분의 편에 서서 지원해줄 전문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길거리에 나서서 대통령을 뽑고 열린 우리당을 과반 정당으로 올려 놓았듯이, 이제 여러분 자신의 희망과 이상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길거리에 나서기 바랍니다. 대통령이 뭐라 하든, 유시민이 뭐라 하든, 열린 우리당이 뭐라 하든, 여러분은 여러분의 요구를, 여러분의 이상을 말하세요.
여러분의 이상과 희망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도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변명만 늘어놓는 게 아닙니까? 문제는 그 희망과 이상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알아서 해주겠지, 알아서 보살펴 주겠지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여러분의 진실과 이상을 그들의 노름판의 판돈으로 날려버리는 일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의 이상과 희망을 잊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줄 때야 비로소 그들이 여러분을 존중하고 여러분의 이상과 희망을 존중할 것입니다.

가을산 2004-06-12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정치는 '우리 대표를 우리 손으로 뽑는다' 정도를 가까스로 이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지금의 체제로는 아무리 개혁적이고 참신한 인물을 국정 운영자로 뽑아도 그가 변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원인에는 크게 내부 요인과 외부 요인이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전문 관료, 정책 자문그룹, 경제 전문가들, 경제계 리더들에 둘러쌓여버리게 되어 재교육 당하거나, 의지가 있어도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정보의 제공이나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변형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신자유주의 그룹에 완전히 설득당한 것 같습니다. (그가 아직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고, 반대로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평가할 사람도 있을겁니다. )

외부적으로는, 미국 부시정부, 다국적기업의 로비, WTO 와 FTA, TRIPS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세력의 압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가장 강한 국가, 가장 강한 기업군, 가장 강한 국제 기구가 이들입니다.

(얼마나 위력이 집요하고 세세한지, 예를 들겠습니다. 2년 전 정부가 글리벡의 약값을 24000원 대에서 17000원 대로 인하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온갖 국제 통상기구에서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결국은 약가 인하를 추진하려고 했던 보건복지부 장관이 물러나야 했습니다. 약 한가지 때문에. 그러니, 정책 전반에 대한 압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의 대표가 초심을 유지하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개혁적인 정권을 세우는 것 만으로 되지 않고, 이 내외적인 요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정책그룹과 전문가들을 양성해서, 진정한 정책정당이 뿌리를 내려서 설득 당하지 않고 그들의 정책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저력을 키우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압력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인데,

지금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밀어붙이고 있는 주체들에 대응할 힘을 조직해야 하는데, 이는 한 국가나 한 나라 국민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계사회포럼을 비롯한 진영에서도 '문제점은 파악했다. 그러나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해답이 없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올 파국적 결과에 대해 알리고, 여론을 형성해서

각자 자기 정부에 그런 문제점에 능동적으로 연대하도록 압력을 넣고,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국제 여론, 국제 기구로 하여금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멈추도록 해야 할겁니다.

 

갈길이 까마득하죠?    

이런 내외적인 요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제대로된 지도자를 얻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얼기설기 생각을 얽어보았는데, 뜬구름 잡는 수준인 것 같아 갑갑합니다.

그래도, 구체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는 내일 행사가 있지요.

바로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할 것 같습니다.

 


balmas 2004-06-1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역시 대단하시네요.
저의 일국적 관점을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보충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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