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안의 영상 - 나와 구로사와 아키라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97
하시모토 시노부 지음, 강태웅 옮김 / 소화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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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와 공동 각본을 쓴 이의 글이라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 쯤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시나리오 작법서 혹은 감독(지망생)들이 꼭 읽어야하는 필독서다. 복안은 여러 개의 눈이란로 공동 작업을 의미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시나리오란 읽는 게 아니라 촬영을 위한 설계도로 혼자 쓰는 게 아니라 협업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책을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는데 자신이 참여한 <라쇼몽>, <살다>, <7인의 사무라이> 작업 시절과 공동 각본 작업이 사라진<란>, <가케무사> 작업 스타일을 기술한다. 저자가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참여한 시절에 보여줬던 팀워크가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주장한다.  

 

<라쇼몽>, <살다>, <7인의 사무라이> 시절 각본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꽤 자세히 묘사한다. 신출내기 작가였던 자신이 원안을 작성하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수정을 하고 오다구..하는 당시의 거물급 시나리오 작가가 방향을 설정하는 작업을 했다. 저자는 이야기꾼이고 아키라 감독은 촬영을 염두에 두며 그림을 그려가면서 인물의 특징을 완성했고 오다구는 전체 흐름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검열(?)했다. <7인의 사무라이>가 탄생하기 전에 <사무라이의 하루>를 기획했다. 말 그대로 사무라이의 일상을 담으려 했는데 시대극이라 사소한 일에도 고증이 필요했다. 사무라이가 도시락을 지참하고 성을 올라 사무를 본다는 설정인데 영화가 엎어진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 때문이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데 밥을 두 번만 먹어서 도시락을 지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이다. 역사 기록도, 역사 전문가도 사무라이가 도시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밝혀낼 수 없기에 영화는 <사무라이의 하루>는 완성 될 수 없었다. 영화는 일종의 판타지라고 생각해버리는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대극은 만들어 진 후에 허점을 늘 노출하지만 제작자들은 최대한 고증을 하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에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눈에는 허점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아키라 감독 팀은 이 사소한 논란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영화 기획을 접었다.

 

저자는 아키라 감독의 초반부에 보여준 이러한 태도를 장인 정신으로 본다. 후반부에 이런 공동 각본 시스템이 사라지면서 <가케무사>, <란>을 실패작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 시기의 아키라를 예술가로 부른다.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다. 우리가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거 보면 우리는 아키라 감독의 편이다. 저자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 아니라 공동의 예술이라고 보고.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시나리오 작가, 특히 원안자는 (결과론적으로 보면) 엔딩 크레딧에 이름 한 줄 나오는 게 전부지만 제작 과정에는 원안자나 시나리오 작가가 없었다면 영화 자체가 나올 수 없다. 영화를 보는 감독, 시나리오 작가, 관객의 관점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떤 영화는 연출력은 좋은데 시나리오가 부실해서 왜 전문 작가를 쓰지 않아서 아깝게 영화를 망쳤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시나리오 작가가 읽는 글을 써 낸다면 감독은 보는 글을 써야하므로 감독 스스로 주제만 설정하고 써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환상적 파트너를 만나는 일도 쉽진 않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시나리오 작가나 원안자에 대한 역할 인식이 부족해 최고은 작가의 죽음도 있었고. 주워 들은 이야기지만 작가 지망생들은 원안자가 되는 걸 두려워한다. 단물만 빨리고 버려진다고. 또 공동 각본가로 크레딧이 올라가면 영화판에서 독립 시나리오 작가로 살아나갈 수 없다고 경계한다. 누구의 잘못이길 따지기 전에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모두의 의식 부족이기기도 하고 관객이 영화를 배우의 것으로 보는 쏠림 현상 탓이기도 하다. 뭐 내가 여기서 영화계를 논할 생각은 아니라 저자가 주장했듯이 공동 시스템 구축이 받아들이기 쉬운 건 아니라는 말이다.

 

며칠 전 <용의자X>를 봤는데 아주 지루했다. 방은진 씨의 연출가 욕심은 욕심으로 끝나는 거 같고 류승범만 배우로서 유일하게 살아있었다. 시나리오도 튀는 대사 하나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주력하는 지루한 전개고 조진웅이나 이요원 모두 좋은 배우지만 감독은 이들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전혀 고민하지 못한 듯. 더 놀라운 건 엔딩 크레딧에서 공동 각본 작업이었다, 세 사람, 감독까지 네 사람인데 어떻게 단선적인 지루한 시나리오를 쓰나, 머리가 여럿 모이는 게 문제가 아니네,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니 저자의 공동 시스템보다는 역량있는 개인이 모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나는 결론 짓는다.

 

아키라 감독의 성실하고 철저한 작업 스타일이 복안複眼을 유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감독의 눈이 복안 보다도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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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1-0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서 읽으신다더니 정말 읽고 계시네요.^^ 저도 소개글만 읽고 막연히 어떤 내용일까 싶었는데, 글을 보니 더 잘 이해가 되네요. 시나리오가 부실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저도 좀 시나리오에 신경을 쓰시지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들이 꽤 있었어요. 최근에 본 것 중에는 <간첩>..정말 막판에는 이야기가 거의 손 쓸 수 없는 지경이 되더군요. <용의자X>는 보지 않았지만, 좋은 원작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가 별로인 모양이군요.

넙치 2012-11-05 14:19   좋아요 0 | URL
김영진 씨의 감성을 평소에 흠모해 온 터라 김영진 씨 추천책이라 냉큼 집어들었어요.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이 지지부진한데 이 책은, 역시나 재밌었어요.

<간첩> 볼까 말까 했는데 안 본 게 다행ㅋ <용의자X>는 시나리오도 별로고 연출도 디게 디게 별로에요. 그에 비하면 변영주 감독이 <화차>를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저절로 비교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