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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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국에서 출생신고된 남자 아기 이름 1위가 '무함마드'라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벌써 7년째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고. 내가 영국인이었더라도 기사를 보는 순간 멈칫했을 것 같다. 통계청에서 따로 발표를 안했다 뿐이지 아랍계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다른 서유럽 국가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테러, 아랍 아프리카계 이민자 사회 통합문제, 파리의 샤를리 에브도 테러, IS에 이르기까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도 놀라게 하는 일이 잦아지는데, 이 책은 이런 상황에 중심에 놓여있는 유럽인(그중에도 프랑스인)의 두려움, 걱정을 반영하고 있다.

 

2022년 프랑스, 사회당과 손을 맞잡은 이슬람박애당이 정권을 잡는다. 그들이 원하는 건 교육, 이슬람식 교육이다. 프랑스의 전통있는 소르본 대학이 이슬람 대학이 된다면? 그리고 거액의 연봉으로 교수들을 유혹하며 이슬람 개종을 요구한다면? 미셸 우엘벡은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끔 학생과 연애하기도 하는 노총각 문학 교수인 '나'의 시선으로.

 

사실 경제나 세금 정책에 관한 한 두 정당 간에 어떤 의견 대립도 없습니다. 안보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게다가 이슬람박애당은 파트너인 사회당과 달리 소외된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의 폭동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파리 근교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단도 있죠. 허나 외교정책에 관해서는 몇 가지 불일치점이 있어요. 이를테면 이슬람박애당이 프랑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강도를 좀더 높일 것을 요구한다든가 하는 문제지요. 하지만 이 문제는 좌파가 큰 저항없이 받아들일 겁니다. 이견을 좁히기 진짜 어려운 협상 건은 따로 있는데,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에 대한 관심은 사회주의자들의 오랜 전통인데다, 교육자는 사회당이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직업군이거든요. 교육자들도 위기에 처한 사회당을 계속해서 지지해왔고요. 문제는 사회당한테 그들보다 더 교육에 집착하고 어떤 구실로라도 이 문제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상대가 나타났다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이슬람박애당은 특수한 정당입니다. 특히 경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두지 않죠.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인구, 그리고 교육입니다. (99-100쪽)

 

이슬람박애당 리더의 진짜 천재성은 무엇보다 그가 선거의 승부는 경제 영역보다는 가치관 영역에서 판가름됨을 이해했다는 것이었다. (...) 벤 아베스는 이슬람 율법의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복원시켰고 거기에 더해 이국적 향취까지 불어넣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가족이나 전통적 윤리, 그리고 암묵적인 가부장제 복원의 길이 벤 아베스 앞에 활짝 열렸다. 우파, 그리고 극우 국민전선으로서는 더더욱 들어설 엄두도 낼 수 없는 길이었다. (185쪽)

 

 

저자는 분명 이슬람 혐오주의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지만, 솔직히 읽기 불편했다. 이슬람교, 무슬림에 대해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은연 중에 깔려있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이 느껴졌다. 아랍국가들이 유럽 명문대학을 오일머니로 사려고 경쟁하는 모습, 이슬람 정권으로 교체되자마자 소르본대학 총장을 갈아치우고, 교수들을 재임용하지 않고 개종을 요구하는 모습, 정권에 가장 먼저 편승한 교수에게 20대 초반의 두 번째 아내를 하사하는 등...

 

소설에서 이슬람당의 리더로 묘사되는 벤 아베스는 아랍계지만 프랑스에서 나고 자라 엘리트학교를 졸업한 수재이다. 그런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잘 돌아가고 있는 프랑스 시스템을 완전 이슬람식으로 뜯어 고치려 한다. (자국 공교육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정치인이 단순히 '종교' 때문에 이런 짓을?) 그 정도로 프랑스 교육, 정치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없는건지, 아니면 이렇게 황당한 시나리오를 써서 팔아도 사람들이 '있을법한 이야기'라 여길 정도로 프랑스인들의 이슬람공포가 극에 달한 것인가.

 

나는 아랍문화와 종교에 관심이 있지만 무슬림은 아니다. 이집트에서 몇년 살아본 경험은 있지만 그게 중동 전체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프랑스에서 이민자(요새 언급되는 시리아 난민 같은 실향민이 아니라, 유럽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경제적 이민자) 문제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지, '순수' 프랑스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십분 이해한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슬람포비아가 문학이란 가면을 쓴듯 황당한 풍자소설이랄까. 한꺼풀 벗기면 '너희 문화는 저급해'라고 말하는 듯 하다(그것도 표현의 자유라면 할 말이 없지만). 만약 내가 무슬림었다면 이 책 읽고 진짜 빡칠(격한 표현 죄송) 것 같다. 그런데도 소설 출판일에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일어났다고, 표지에 미셸 우엘벡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었다고 홍보하고 있으니 (노이즈 마케팅이라면 성공한듯), 기가 막힐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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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
로맹 퓌에르톨라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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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사기를 치고 다니지만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인도 고행자가 이케아 옷장 덕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 유쾌하게 읽히고 결론도 착하다. 



샤를 아즈나부르가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햇빛이 관대하게 쏟아지는 곳이라 해서 빈곤이 덜 고달픈 건 절대 아니었다.
어째서 누구는 모든 게 풍성한 곳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걸까?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건 왜일까? 누구는 사람답게 사는데, 누구는 그저 입 다물고 죽을 권리밖에 가지지 못한 걸까? 왜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늘 같은 사람들이어야 할까?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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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판타지아 / 아시아 제바르 / 책세상

 

 작가 이력이 주목할 만 하다. 북아프리카 출신 여성작가가 프랑스어로 쓴 소설이란 것도 흥미로운데, 알제리 여성 최초로 파리고등사범학교(ENS)에 입학했고(무려 사르트르, 파스퇴르, 푸코, 피케티, 뒤르켐 등과 동문) 북아프리카 출신 작가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 종신회원으로 선출된, 알제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역사가다.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 전쟁이 있었던 1830년대를 배경으로, 아랍 소녀의 목소리를 통해 억압받는 알제리 여성들에 대한 감춰진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400여쪽의 짧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쏟아지는 신간에 묻히기는 아까울듯한 책이다.

 

 

 

 

 어떤 날들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데뷔작인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후 첫 장편소설로, 위기에 놓인 미국 중상층(中上層) 가족의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라 한다.

 

 뛰어난 통찰로 사랑과 상실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이 달에 읽고픈 신간으로 골랐는데, 개인적 취향으로는 원서 표지가 더 예쁜듯.

 

 

 

 

 

 

 리틀 스트레인저 / 세라 워터스 / 문학동네

 

 영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고 있는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2차대전 이후 몰락하는 영국 귀족 가문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소재로,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스토리에 예민한 사회 관찰과 날카로운 비판을 적절히 더해 당시 시대상을 생생히 재현해낸 역사 스릴러물이라고.

 

 종전 후 영국 사회의 가치관이 변화하여, 노동자계급은 더이상 귀족의 집사나 하녀 노릇을 원치 않고, 귀족들은 선조의 유산을 유지할 재정적 능력이 없어 저택을 처분하는 시대적 배경에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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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03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제리가 낳은 작가로서 카뮈가 제일 유명해요. ^^

아말 2015-10-03 00:3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런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나서 자란 프랑스인이고 아시아 제바르는 알제리 국적자더라구용ㅎ
그렇다 보니 알제리 사람들은 아시아 제바르를 더욱 자랑스러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ㅎㅎ^^
 
지하드 여전사가 되어 - 프랑스 여기자의 목숨 건 이슬람국가IS 잠입 르포.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4
안나 에렐 지음, 박상은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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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책이다. IS 취재를 위해 무슬림 10대 소녀로 위장해 조직원과 접촉한 여기자 안나 에렐(가명)의 르포다. 용감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취재가 종료된 지금도 그녀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내 친오빠는 미셸 오디아르가 한 유명한 대사를 즐겨 읊곤 했다. 그것은 바로 "앉아 있는 두 지식인이 항상 걷고 있는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멀리 가지 못한다"였다. (111쪽)


IS의 꾐에 빠져 국경을 넘은 10대 중 탈출에 성공한 소녀들을 취재하던 안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멜로디'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든다. 가정에도 사회에도 섞이지 못하는 10대소녀로의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다에시의 선전물을 자신의 SNS에 포스팅하고, 조직원과 채팅으로 접촉한다. (프랑스에서는 IS를 아랍어로 '다에시'라 부른다. '국가'가 아닌데 Islamic 'State'라 부를 수 없다는 이유다.)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빌렐이라는 다에시 조직원은 멜로디를 달콤한 말로 유혹한다. 국경을 넘어 이곳에 오면 공주처럼 지낼 수 있다, 사랑한다, 결혼하자,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겠다는 등...


"그렇지만 나는 내 가족과 등지면서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내 느낌인데, 너도 당연히 자본주의자겠지?"

멜로디는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았다. 자본주의가 뭐지? 그리고 그게 가족과 무슨 상관이지? 멜로디는 빌렐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빌렐은 그녀에게 신이 정한 율법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샤리아, 즉 이슬람 율법은 소수의 나라에서만 적용된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소비주의 사회에 등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빌렐은 단호했다. 멜로디는 자신이 사는 국가의 법에 순응하면 안 된다. 샤리아가 아닌 지금까지 멜로디가 살아왔던 나라의 법은 급진적인 이슬람교의 모습을 띠기 때문이다. 빌렐이 신봉하는 것은 '순수한' 이슬람교다. (43쪽)


낮에는 기자 안나로 살며 취재를 하고, 저녁이 되면 히잡을 쓰고 멜로디가 되어 빌렐과 스카이프 화상채팅을 한다. 입만 열면 사랑고백을 하고,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고, 국경을 넘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유혹하는 빌렐이 위험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점점 자신이 안나인지 멜로디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빌렐의 연락이 없으면 내심 걱정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지인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안나는 IS에 합류하는 경로를 취재한다는 명목으로 빌렐이 가르쳐 주는 대로 프랑스를 떠난다. 



책을 읽으면서, 다에시 조직원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과 사탕발림, 이중적인 모습이 역겨웠다. 예를 들어, 멜로디가 빌렐을 만나러 가겠다고 결정하자 빌렐은 그녀가 '숫처녀인지' 묻는다. 순수한 이슬람국가를 만들기 위함이라면서도 아내로는 아랍 여성보다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서양 소녀들을 선호한다. 남편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나. 멜로디가 오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걸 사주겠노라면서 정작 국경을 넘기 전에 자신을 위한 향수와 면바지를 사다달라고 하는 모습은 우습기까지 하다. 


대체 얼마나 외로웠기에, 얼마나 심리적으로 고립되었기에, 그런 뻔한 사탕발림에 넘어가 부모의 신용카드를 훔쳐 떠나는지. 왜 소녀들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게다가 안나 자신도 달콤한 말에 마음이 흔들릴 뻔 하지 않았던가. 한편으로는, 그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몬 사회 구조가 안타깝기도 했다. 안나가 비정규 취재기자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특종을 터트리지 않으면 기자로서의 삶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연 가족과 친구를 뒤로한 채 목숨걸고 다에시와 접촉해 결국 테러대상으로 지목되는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그들이 접촉을 시도했던 것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나는 지금에 와서야 알았다. 그들 역시 외로움을 덜고자 했던 것이다. 여느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초보 지하디스트들도 SMS로 대화를 했고, 이 나이대를 위해 문자를 무제한으로 보낼 수 있는 요금제도 생겼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가 있다. 그들 나이에는 누구나 자발적으로 전자기술을 터득한다. 빌렐은 그들의 "큰형님" 세대에 속하며,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종교에서 찾았다고 한다. (98쪽)


미디어를 통해 그려지는 IS의 모습에,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절대악, 사이코패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여겨왔던 것 같다. 물론 눈 깜빡않고 사람을 죽이는 악인도 있지만, 단지 외로움 때문에 합류한 사람도 있고, 막상 가보니 자신이 아는 이슬람과 달라 빠져나오고 싶지만 보복이 두려워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내 종교적 신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단지 내가 믿는 규율에 따라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부 무스타파는 빌렐과 달랐다. 그 역시 가족과 주변 사람을 잃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그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 그리고 이와 상반되는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조직인 다에시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만약 그가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그는 조직의 손에 파멸당할 것이다. (145쪽)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니 속이 메스껍고 현기증이 났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하는 걸까. 

다에시는 이슬람 한 종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곪은 부분이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터져 나온 것이다. 이런 사회 현상들은 단지 프랑스, 유럽 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머지않아 한국 사회에도 어떤 형태로든 표출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1968년에 앤디 워홀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미래에는 누구든 15분간의 유명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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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0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슬람 문제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있는데, 정작 그 갈등에 휘말린 당사자들은 이성적인 해결에 전혀 관심 없다는 게 문제예요.

아말 2015-10-01 20:3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심지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에요.
cyrus님 반갑고 감사합니당ㅎ
 
[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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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최근 우리에겐 기사를 통해, 오바마 대통령이 여름 휴가에 챙겨간 세 권의 소설 중 하나로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전쟁, 고아, 장애 이 세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이미 슬퍼지기에, 첫 장을 열기가 쉽지는 않았다. 


1권에서는 대체로 베르너와 마리로르의 삶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준다. 마치 영화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서술했다. 그렇기 때문에 10년 전 이야기인지, 현재의 이야기인지 구분해 읽지 않으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 하지만 2권에 들어서 이야기가 절정에 이를수록, 눈을 감으면 1940년대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묘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독일의 베르너는 전자기계를 분해, 조립하고, 집중해서 라디오를 고칠 때 세상의 근심을 잊는, 여동생과 라디오 채널에 귀기울일 때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소년이다. 라디오 수리공으로의 재능을 알아본 누군가의 도움으로 광부로 예정된 삶을 떠나 히틀러 유겐트 양성학교에 다니게된다. 반면, 프랑스의 마리로르는 파리 자연사박물관 자물쇠 기술자인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매일 아버지를 따라 박물관을 오간다. 아버지는 타고난 손재주로 딸을 위해 마을의 축소판 모형을 제작하고, 마리로르는 이를 통해 마을의 지리를 익힌다. 


전쟁이 일어나 독일군이 파리로 포위망을 좁혀오자 마리로르의 아버지는 피난길에 오른다. 지닌 자를 보호한다는 전설이 담긴, 박물관 최고 보물 진귀한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를 독일의 손아귀에서 지켜내기 위해 박물관장이 선택한 방법은 모조품 3개를 포함해 총 4개의 다이아몬드를 네 사람에게 각각 맡기는 것이었다. 박물관 금고, 박물관장, 후원자, 그리고 금고담당자. 본인의 보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다. 특수 보관장치에 넣은 다이아몬드와 함께 자물쇠 장인은 눈먼 딸과 생말로(프랑스 서북부지역)의 친척집으로 떠난다.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얼마 전 시리아 팔미라 유적을 지키기 위해 IS에 맞서다 죽임당한 노학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독일의 베르너는 학교에 입학한지 1년 만에, 교사에게 속아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의 임무는 점령 지역에서 무선통신으로 구조 요청을 하거나 정보를 송신하는 적군(그는 그렇다 믿는다)의 위치를 찾아내 처리하는 것이다. 임무중, 적군으로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모녀를 사살하는 동료의 모습에 점점 전쟁의 실상을 알아가고 회의감을 품게 된다. 


다이아몬드와 함께 저택에 남겨진 마리로르와 불로의 보석을 손에 넣기 위해 저택을 수색하는 독일 본부원사, 그리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지하에 갇힌 베르너. 마리로르는 구조요청을 위해 목숨을 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고, 메시지는 베르너에게 닿는다. 어릴 적 여동생과의 추억이 담긴 목소리로.. 각자 다른 나라, 다른 환경에서 자라, 상상해본 적 없고 선택한 적은 더더욱 없는 상황에 놓인 베르너와 마리로르. 그들의 만남은 의외로 찰라에 이루어진다. 작가는 독자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이야기를 맺는데, 오히려 현실적이라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의 장점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워낙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져 있어, 전쟁을 소재로 한 슬픈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같은 독자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두 주인공, 시각장애인 마리로르가 소리와 촉감으로 느끼는 세상에 대한 묘사, 기댈곳 없는 고아인 베르너가 나치 교육기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본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져 있다. 덕분에 독자는 소설을 '천천히' 읽어나가며 그들이 겪은 일을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가을에 딱 어울리는 소설로, 감성과 생각할거리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은 독자들에게 권한다. 



 

 

"마리는 곧 열네 살이 돼, 마네크. 그리 어리지 않은 나이야, 전쟁통에는 그래. 열네 살짜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열네 살이 어린 나이가 되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2권,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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