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2. 의자 마련

#. 1

    

 

추사가 말년에 은거하며 글 쓰고 그림 그리던 곳이 과지초당이다. ‘과천 땅에 풀로 엮은 집이라는 뜻인데, 풀로 엮긴 뭘 풀로 엮어. 추사 패밀리가 한창 잘 나갈 때 지은 곳으로 정원에 연못이 딸린 럭셔리 별장이다. 그 양반은 영면할 장소로 여기를 택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고양이 빌딩'을 지어 책을 저장한다. 창문에 커다란 고양이 스티커가 붙어있다. 장서가 몇 만권이라던가. 여기서 다카시는 주옥같은 원고를 썼다. 그는 방광암이 재발해서 곧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그와 그의 서재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붉은 돼지님의 서재 이름은 '사의재'다. 다산이 유배생활 하던 주막에 그런 이름을 붙였던 걸로 기억한다. '네 가지를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역시 서재 이름라면 뭔가 의미심장해야 의미심장한 것 같다

 

    

 

돼지님 페이퍼에 따르면 장석주 시인은 집 한 채 규모의 서재, '수졸재'를 지었다는데 찾아보니, 쩔어! 근데 부부가 시 써서 이런 서재를 지을 수 있나. 얼마 전 친구에게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의 부류로는 흑인, 걸인, 시인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시인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 2

 

  

나도 작은 서재를 가지고 있다. ‘You’re yeah‘. ’유어예游於藝.

 

이 말을 논어 옹야편에서 발견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어도-도에 뜻을 두고(志於道), 거어덕-덕에 의거하고(據於德), 의어인-인에 의지하며(依於仁), 유어예-예에서 노닐어라(游於藝)."

 

여기 흔들의자에 앉아서 흔들흔들 하며 책을 읽는다. 사실은 바닥에 쭉 엎드려서 읽기도 하고, 누워서 읽기도 한다. 솔까말 앉아서 읽다가 엎드려서 읽다가 누워서 읽는 코스다. 추사도 그랬을 거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들 어찌 허리 꼿꼿이 펴고 몇 시간씩 책을 읽을 수 있겠나.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따사롭지 않아도 좋다. 그거슨 책과 미모에 모두 치명적이니까.

 

 

#. 3

 

서재는 아니고 책과 잡다한 것들이 같이 쌓여있는 방이 하나 더 있다. 이 반만 서재의 이름은 노동 2. 책은 곧, 노동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노동 2호는 장차 대도서관으로 육성할 생각이다. 하지만 이곳은 은밀한 곳으로,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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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10-2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을 동시에 자극하는 글이네요.

뷰리풀말미잘 2016-10-28 14:00   좋아요 0 | URL
그럼 인슐린은요? 안드로젠은요? 히히. 글고 어디 성장호르몬 팍팍 샘솟는 글 보셨으면 공유좀..

cyrus 2016-10-2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달부터 겨울로 들어서면, 전기장판에 배 깔고 책 읽는 시간이 많아져요. 이불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집니다. ^^

뷰리풀말미잘 2016-10-28 18:15   좋아요 0 | URL
전기장판, 귤, 책 삼신기만 갖추면 겨울 끄떡없죠. ㅎㅎ

붉은돼지 2016-10-2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멋! 왠 자주보던 돼지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ㅎㅎㅎㅎㅎ
사진은 장석주 시인의 수졸재가 아니라 수졸재 옆에 한 채 더 지었다는 `호접몽` 같아요. 시인으로서는 드문 재력이라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저서가 60권이 넘는다고 하는군요...

소생이 예전에 알라딘 서재 처음 만들 때 마침 정약용 관련 책을 읽고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서재이름을 `사의재`라고 지었는데 소생에게는 참으로 가당찮은 당호라서 바꾼다 바꾼다 하다가 그냥 지금까지 오게되었습니다..

말미잘님의 `유어예` 는 이름도 참 멋지고 또 깔끔하군요...어째 말미잘스러운 서재를 예상했었는데....ㅎㅎㅎㅎㅎㅎ `노동2호`가 대포동을 거쳐 대도서관으로 거듭 발전하길 앙망합니다.^^ 노동2호 시험발사라도 한번 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만........


뷰리풀말미잘 2016-10-29 00: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붉은돼지님. 그럼 사진은 다시 찾는대로 바꿀까 합니다. 장석주 시인은 정말 책을 많이 냈네요. 저 정도 일하면 시로도 먹고 살만 해야죠. 그게 맞는 거 같습니다.

사의재는 좋은 이름입니다. 그냥 불림으로 효용이 다 하는 이름보다는 자꾸 뭘 생각하게 하는 이름이 좋아요. 저는 사의재를 지지합니다.

유어예는 정말 멋진 이름이죠. 유어예의 藝는 육예를 말하는데, 각각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의미합니다. 서랍엔 악기도 몇개 들어 있고, 숫자에 관련된 책도 제법 있으니 예, 악, 서, 수의 모양 정도는 갖췄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활쏘기)와 어(말타기)는 文이 아니라 武라서, 그걸 도저히 책으로 충족할 방법을 모르겠더군요. 권투 글러브를 한짝 모셔놓은 이유입니다. 상징같은 거죠. 실제로 사용하는 너덜너덜한 장비들은 노동 2호에..

어느날 대도서관이 완성되면, 저는 그 내부를 끊임없이 유랑하다 슬그머니 잊혀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