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현암사 동양고전
오강남 옮기고 해설 / 현암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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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워도 웃어라 '초인의 힘'으로 토닥토닥

사람들은 때로 초인을 꿈꾼다. '초인적인 힘', '초인적인 능력'같은 말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선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이런 식의 내용들을 즐겨 다룬다.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맨'부류의 작품들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은 공상적인, 허깨비 같은 초인 개념이다.

초인의 진정한 모습은 플러스의 방향보다는 마이너스의 방향에서 더 잘 보인다. 삶의 가혹한 고통 속에서도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 자신을 해하려는 인간을 오히려 너그럽게 포용하는 사람, 타인들의 적대에 원한을 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으로 그 적대를 극복하려 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초인의 모습을 본다.

초인은 어떤 현란하고 엄청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고난을 초연하게 극복할 수 있는 사람, 원한을 사랑으로 덮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초인의 철학은 우리에게 이 힘겨운 세상을 미소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이런 초인의 철학을 준다. <장자>는 눈앞의 작은 이익들에 집착하는 우리의 눈을 더 넓고 깊은 지평으로 돌리게 해 준다.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호방한 용기와 기쁨으로 바꾸어 준다.

그러나 <장자>의 이런 호방함과 초연함은 깊은 체험이 결여된 들뜬 선언이나 호언의 차원과는 다르다. 우리는 이 책의 행간에서 처절할 정도의 비극적 눈길, 잔혹한 세상을 바라보는 젖은 눈길을 느낄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잔인무도한 현실에 대한 고난에 찬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심연을 딛고 일어서서 초연함과 희망을 주기에 위대한 텍스트다.

장자의 사유는 철저하게 비사변적이다. 마니일 우리가 경험주의라는 말을 지접적 지각이나 실험, 사료의 확보 등과 같은 편협한 과학적 방법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근본 태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장자는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자이다. 이 때의 경험은 현실에 대한 외적인 지각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가장 정직한 눈길이라는 의미이다.

"북녁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이름을 곤이라 한다.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변하여 새가 되니 이름을 붕이라 한다. 크기가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힘차게 날아오를 때면 그 날개가 하늘에 드리우는 구름과도 같다. 바다의 김운이 바뀔 때면 이제 남녘 바다로 날아간다. 남녘 바다를 일러 하늘못이라 한다."

장자는 박진감 넘치는 필치와 인상깊은 이미지들로 갑갑한 현실과 좁쌀같은 인간들의 세계를 벗어나려 한다. 장자의 사유는 변신의 사유이다.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일정한 동일성을 가진 존재들의 세계가 아니라 범주들의 칸막이를 허물고 다른 존재로 화하려는 사유이다. 그래서 장자의 사유는 반존재론적 존재론이다.

작은 인간들, 삶을 만들어내야 할 것으로 보기보다는 주어진 것으로 보는 인간들은 이렇게 변신을 꿈꾸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기껏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고, 그나마 못 올라 다시 땅에 떨어지는 데, 도대체 뭣하러 9만리나 날아올라 남녘으로 간담. 별꼴이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체제, 사믈들을 가르는 분절선들, 기호들의 체계, 제도가 부여하는 자리들/지위들, 현실이 요구하는 가치들, 분류의 범주들,...이런 틀을 당영한 것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삶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는 사람들, 이런 매미들, 비둘기들은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또 다른 삶을 만들어나가려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매미들, 비둘기들과 대붕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인식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는 자리들과 이름들로 구성된다. 자리들과 이름들의 체계는 위(+위치)를 구성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발버둥치고 산다. 그러나 대붕은 이 위를 거부한다. 그것은 무위(=위치가 없는)의 삶이다. 그러나 이 무위의 삶은 무엇인가 도드라지는 능력을 보여준다거나 현란하고 엄청난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무위의 삶은 위가 강요하는 갈등, 경쟁, 질시와 시기, 인생의 허비, 피곤한 타인의 눈길들,  하망한 기쁨과 슬픔,...같은 것들에서 해방되어 소요하려는 삶이다. ㄱ러나 역으로 그러한 소요의 삶은 갖가지 히미겨운 고통들, 타인들의 피곤한 눈길을 가져온다. 무위의 삶은 그러한 고통들과 눈길들을 감내하는 삶, 아니 감냄를 넘어 빙그레 웃으면서 감내조차도 던질수 잇는 그러한 삶이다. 장자적 초이니은 위의 삶이 생각하는 초인이 아니라, 무위의 삶이 생각하는 초인인 것이다.      

이런 무위의 삶을 철학적으로 근거지어 주는 것이 제동의 존재론이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요통 때문에 죽기까지 하지만 미꾸라지는 그러한가? 사람은 높은 나무 위에서 벌벌 떨리지만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 이 셋 중에서 어느쪽이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먹으며, 지넨는 뱀을 먹기 좋아하고, 부엉이와 까마귀는 쥐를 맛있게 먹으니, 이들 중 어느 쪽이 진짜 맛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원숭이는 갈장과 짝이 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모장과 여희는 미인으로 소문나 있지만, 이들을 보고 물고기는 숨어들어가고, 새는 날아가버리며, 군록은 달아나버린다. 이 넷 중 어느 쪽이 진짜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가/ 내 쪽에서 본다면, 인의의 발단이나 시비의 길은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나라고 과연 그런 구별들을 쉽게 알 수 있겠는가?"

장자가 말하려는 것은 모든 사물들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 각각의 거처 그 어느 것도 '올바른 거처'가 아니라는 것은 그 상대성을 벗어난 눈길을 가졌을 때에만 그 상대상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성의 내부에서는 상대성을 볼 수 없다. 상대성의 바깥에 설 때에만 상ㅇ대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눈길은 사물들 위로 솟아올라 그것들을 굽어볼 수 있는 어떤 초춸적 눈길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의 아래로 내려가 그것들의 상대성이 무화되는 제동의 경지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화란 없어짐, 사라짐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들의 차별성의 사라짐, 존재의 평등이 성립하는 경지를 뜻한다. 장자는 이 경지를 기 개념으로 포착한다.

존재론적 평등이 성립하는 지평으로서 무(=없음)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있음을 가능케 하는 없음이다. 없음은 있음의 안감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없음에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이론적 논증이 아니라 신체적 실천이다. 즉 자신을 가두고 있는 기를 넘어 존재론적 평등이 성립한는 지평으로서의 기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 수양과도 다르다. 내가 타자가 되려는 어떤 비상한 노력을 동반하는 실천적 수양이다. 미꾸라지가 되고 원숭이가 되어 봐야만 비로소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의 상대성을 넘어서는 제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이론적 논증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된다는 것이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인간이 갑자기 미꾸라지나 원숭이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상의 문제이지 실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장자가 진정 말하려 하는 것은 그런 제동의 경지에 머물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죽음만이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장자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제동의 경지에 들어섬으로써만 이 상대적인 구별이 판치는 이 세계, 위(=위치)의 세계 안에서(언제까지나 그 "안에서") 무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서평자 추천 도서

(1) 안동림 역주, 현암사, 장자 (2만 5천)

(2)이강수, 이권 옮김, 길, 장자1(2만 2천)

(3)로버트 앨린슨 짓고, 김경희 옮김, 그린비,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2만)

****** 끝으로 제 경험으로 일반인이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은 오강남 선생의 '장자'입니다. 현암사의 시리즈가 다 좋아요. 특히 오강남선생의 '장자'와 더불어 마쓰야 후미오의 '불교개론'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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