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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예수의 십자가가 무얼까 곰곰히 생각한 적이 있다. 그 때는 고통의 극한에서도 내디디는 사랑의 발자국으로 생각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조차 사랑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면 사람은 그 어느 순간에도 예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보니 미처 보지 못한 또다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십자가는 타인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대해 똑같이 느끼는 절절한 공감의 자리라는 것이다.
왠 십자가 타령이냐구? 이 책의 저자 대니얼 고틀립이 수십년 동안 타야만 했던 휠체어가 바로 그 공감의 십자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참된 인생에 대해 말하는 책은 많다. 그렇지만 나의 슬픔과 고통을 진정 이해받고 그런 공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적은 책 속에 이 책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 책은 실화이다. 저자인 대니얼 고틀립은 심리학 박사로 젊은 정신의학 전문의로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결혼 10주년을 맞아 아내에게 줄 선물을 가지러 가던 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되고 만다. 그렇지만 전신마비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아내와의 이혼, 아내와 사랑했던 누나, 부모님의 죽음이라는 불상사로 계속 이어졌다. 깊은 절망과 슬픔을 안은 채 어린 딸 둘을 키워야 했던 그는 한편으로는 병고와 외로움에게서 또 한편으로는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환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점차 자신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책의 번역자인 이문재 시인이 고백하듯이 명상 프로그램이나 자기 계발 책 몇권을 읽고 우린 자신에 대해 또는 마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있다고 착각을 하고 산다. 그렇지만 대니얼 고틀립은 자신이 전신마비 환자가 되어 휠체어에 앉게 되어서야 마음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평생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치료로 수고로웠을 그가 마지막으로 고통스러워 한 것은 그렇게 힘겹게 키운 딸의 아들 샘이 자폐아라는 점이었다. 이 책은 너무도 깊은 슬픔의 강을 건넌 할아버지가 이제 막 슬픔의 강을 건너려 기어가는 손자 샘에게 건네는 너무도 절친하면서도 뜨거운 유언이다.
나 역시 저자보다는 하찮지만 수십년을 번민에 잠기게 한 병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병은 나를 외로움과 대면하게 했고 무엇이 참된 의미인가 묻게 해준 필생의 스승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최근에 막내아이가 골수염으로 큰 수술을 하고 장애를 입지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몇달을 겪고 난 터라 책의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와 박힌다. 이 책은 너무도 진실하고 모두 감동적인 글이어서 서투른 요약을 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끝내 책읽기를 망설일 분들을 위해 몇가지 감동적인 부분을 적음으로써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저자 대니얼 고틀립의 눈물이 쏟아질 듯 근심어린 그러면서도 맑은 눈을 한 사진이다. 가만히 보고있으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평생을 슬픔과 절망과 벗하면서 산 사람의 사진이다. 또한, 책의 맨마지막에는 손자인 샘과 보내는 즐거운 한때를 찍은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 역시 보기 좋으면서도 슬픈 사진이다.
(2) 대니얼 고틀립이 전신마비를 당하고 삶을 비관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시점에 실연을 당한 여자가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고통을 이길수 있었고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떠난 뒤, 나는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전신마비로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잃고 절망에 빠진 낮은 목소리가 내게 들려주었다. 아직도 내가 세상에 쓸모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그날 밤, 그녀와 나는 서로를 살려낸 것이다."(91쪽)
(3) 대니얼 고틀립은 병실에 누워 몇 달간 창 밖에 있는 목련나무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매일 목련나무를 보다가 지독한 외로움에서 빠져나왔다고 한다.
"몇 달 동안 병실에 누워 목련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세상의 일부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 우주적이고 신성하며 자연스러운 존재가 나와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전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어릴 때는 상상 속의 친구가 나와 함께 있었고, 사춘기 때에는 신의 존재가 나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나는 그런 존재를 상실하고 말았다. 내 안팎에 아무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존재를 되찾은 것이다.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안다. 내가 평생토록 갈망해왔던 존재, 미처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 늘 나와 함께하면서 내 삶을 지켜봐왔던 존재였다. 그제야 나는 다시는 세상에 혼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