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가장 오해를 받는 것이 있다면 밀교가 아닐까? 탄트라(Tantra)는 힌두교와 불교에 어떤 카오스 같은 힘을 주고 있다. 탄트라에서 'Tan'이 어원적으로 '확장'이라는 뻗어가는 운동성을 품는데, 그것이 엇나가면 난잡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이상한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불교에서 그 뻗침이 단순한 카오스, 혹은 원시적인 회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승불교라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의 어떤 포괄적 비약(밀교는 불교 자체에 원래부터 잠재해 있었다고 보기에)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불교 쪽에서 갈무리하는 이 탄트라의 기운은 힌두교의 영향과 여러 땅을 거치는 과정(물론 역사를 동반)에서 씨실과 날실처럼 복잡한 패턴을 형성한다. 특이한 점은, 중국과 한국에 비해서 일본(진언종)에서 밀교의 흐름이 두드러진다는 것이고, 현재 우리가 정돈된 밀교의 모습을 찾는다면, 단연 티베트 밀교가 되겠다. 그리고 또한 이 두 곳에서 밀교는 현재진행형이다. 

오늘 이 공간에서는 밀교경전 자체가 아니라 밀교를 다룬 책들을 잠시 둘러볼 참이다. 이에 해당하는 책으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건, 엘리아데의 스승이기도 했던 다스굽따의 <딴뜨라불교입문>과  밧따짜리야의 <밀교학 입문>이 있다. 그러나 후대 연구를 통해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이다.

 

 

 

 

 

 

 

 

 

 

 

 

 

 ->마즈나가 유우케이(松長有慶)의 <밀교경전 성립사론>은 단지 경전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밀교의 기본적인 개념과 내용, 역사(주로 인도와 일본)를 다루고 있다. 같은 저자의 책, <밀교역사>도 함께 참고하기에 좋을 듯 하다(고맙게도 책값도 적당해 보인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밀교 관련 책은 <밀교점성술과 수요경>이다. 밀교에서 몸의 맥관을 중시하는 생리학이나 소리(만트라, 진언), 도형-이미지(만다라) 등 감각적인 것들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건 잘 알려져 있는데, 점성술은 그렇지 않았다. 인도는 고대부터 점성술이 발달한 곳이기도 한데, 그러한 흐름이 불교 경전 <수요경>에까지 어떻게 그려지는 지 두고 볼 일이다. 

 

 

 

 

 

 

 

 

그 외 명상법에 관한 책들도 있는데, 티베트 불교는 결국 밀교와 떨어져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그것이 안정된 형태로 잘 보존되고 있다. 괜히 성적교합이라는 어떤 이상한 기대감을 가지고 호기심에 접근한다면, 밀교에서 그러한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얼마나 냉정한 온도와 엄격함을 요구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 

 

아티샤는 <보리도등론>으로 유명한 인도 승려의 이름인데, '이타샤 명상법'이라 불릴만큼 현재까지 잘 전해지고 있다. 이것을 오쇼가 다루기도 했는데, 이는 전에 여강출판사에서 <지혜의 책>이란 제목으로, 다시 황금꽃이란 출판사에서 <지혜의 서>로 나왔었다.  다른 책을 찾아보면,  게쉬랍튼 린포체의 <심>이란 짧은 제목의 책이 불일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이 책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현재 구할 수 있는 아티샤 명상에 관한 건, 앨런 월리스가 해설한 <아티샤의 명상요결>이 아닐까.  -

오쇼도 탄트라에 관한 강연을 여러 번에 걸쳐 했다. 양은 많지만 가독성이 좋은 편이고, 인도 전통 안에서 공부를 했고, 거기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외부인들의 학자적 접근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암 스님의 책을 몇 권 올린다. 아직 이 분의 책을 접하진 않았는데, 최근에 알게되었다. 우리나라에 티베트 불교에 관한 책이 적지 않으나, 이렇게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깊이 판 흔적을 보여주는 책은 많지 않다. 나도 어서 기회를 만들어서 읽고, 그 독서의 감을 이 곳에 다시 올리도록 하겠다. 

 

 

 

 

 

 

 

 

-끝으로 탄트라, 요가와 연관이 있는 쿤달리니(꾼달리니)를 다룬 책들을 올려본다.

 

 

 

 

 

 

 

아지트(아지뜨) 무케르지의 책은 <꾼달리니>와 <군달리니>로 각각 나왔는데, 내용은 같은 책이다. 좋은 도판들이 많이 들어 있어 참고하기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불교가 종교로 불리는지.. 약간의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일단 불교에는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는 그러한 절대신(神)이 없다(우회적인 임시 방편으로 신을 다루긴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불교 안에는 긴 시간 동안 다르게 진행된 흐름들도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뭐라고 말한다"라기 보다는 "어떤 불교(학파, 종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불교가 다양한 이론들을 힘으로 정리하지 않고, 자체 논의를 통한 합리적인 선택을 기다리는 자세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론들조차 인연에 내맡기는 태도라고 해야할까? 

따라서 종교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논리학과 인식론(불교에는 이 둘이 엄격하게 떨어지지 않는다)이 발달하고 인과-관계성을 강조한다(절대신의 기적으로 바뀔 틈이 없다). 그것을 철학적? 전개의 모습으로 보자면, 이미 서양 철학에 훨씬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아비달마를 비판하는 용수의 공사상(중관사상), 역시 아비달마(설일체유부)를 비판하면서 중관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유식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의 긍정적인 격돌 이후에 더욱 심화된 형태로 나타난 디그니가의 '아포하론'다르마끼르띠의 '찰나멸 논증'을 꼽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이론의 극단적인 몸짓들은 티베트로 흡수되어 다시 보존, 발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의 치열한 모습이 담긴 책들을 몇 권 골라보았다. 

 

 

 

 

 

 

 

 

<-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마츠모토 시로의 이 책은, 보통 티베트하면 밀교를 떠올리는 고질적인? 분위기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철학의 온전한 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여준다.  물론 티베트와 밀교(딴뜨라)의 깊은 연관성을 속된 이해로 치부하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겠다.       

 

 

 

 

섣부른 예감일지 모르겠지만, 프랑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양 철학의 마지막 향유가 사그라들쯤에, 그것을 넘어갈 힘을 불교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개 창조적인 해석에 대해 조심스러워하고, 더군다나 최근의 철학 흐름에 대해 무지해서, 과거 불교에서 이룬 뛰어난 성과를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거나 번식시키는데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문헌학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철학-텍스트를 다룬다고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양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통해 불교, 특히 중관과 유식이 끌어올려지고 있는데, 서로의 닮은꼴을 비비는 차원은 넘지 못하는 것 같다. 얼추 비슷함을 발견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비비는 작업에서 뜨거운 열이 나서, 예상치 못한 높이로 도약하는 그러한 발전을 기다려 본다. 

 

 

 

  

 

 

 

 

  

 

  

 

<-어쨌든 중관은 대개 비트겐슈타인이나 칸트, 유식은 현상학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 책 역시 유식사상과 현상학을 같이 다룬 것인데, 저자는 단순하게 이 둘의 비슷함을 강조하려는 작업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현상학이라는 좀 구식이 된 사유에 대한 끌림이 없더라도 유식에 대한 새로운 각도를 통합 접근에서 의외의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우리나라를 보자면, 원효나 의상 같은 큰 인물이 있다. 원효의 진가는 앞으로도 더욱 더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드러날 거라는 예상을 해 본다. 최근에 나온 <스피노자와 붓다>처럼 서양에서 다소 이질적인 철학적 사유들이 불교를 통해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를 비트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한다. 그것이 초기 단계라 다소 들뜬 흥분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충격이 여태의 철학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가장 중요한 변형은 수행적 실천에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원효와도 만난 적이 있다. 신오현의 <원효 철학 에세이>에 실린 글 '스피노자 철학의 원효 철학적 해석'이 그것이다. 저자 신오현은 서양철학을 탄탄하게 거친 후, 동양철학 특히 불교로 방향을 돌렸는데, 불교를 철학적으로, 더 나아가 서양철학을 불교(철학)적으로 해석하기의 가능성까지 나아가려는 열의를 보여준다.  처음에 잠시 유식학에 관심을 두다가 어떤 계기로 원효를 만나게 되는데, 원효의 불학을 통해서 불교에 잠재되어 있지만 현재화 되지 않은 것과 근대 이후 서양철학이 다가왔지만, 벽에 부딪힌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 그러한 몸짓이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과 화엄에 큰 관심을 쏟았다. 화엄을 다룰 때도 그 기본 바탕엔 기신론의 적용과 확장이 있는데, 이는 중관과 유식으로 벌어진 극단의 간격을 비판적 안목으로 화해하는 실천적인 해석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학이 유럽학자들, 거기다 일본의 렌즈를 거친 자료를 통해 연구되는 실정이라, 아직까지 원효의 가치가 크게 나타나진 않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불행이면서 다행이라 여긴다. 중관과 유식의 극단의 치우침을 역동적으로 건드려서 되살리려는 원효의 실천적 기질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상당히 훌륭한 성과가 나올것이다. 

 

 보통 불교의 옳은 방향을 아비달마의 요소들(실재들)을 파괴하는 작업들에서 찾는데(가령 용수), 그러한 불교 안에서의 모습 말고도 인도의 정통철학인 베단타와의 대결도 빼놓을 수 없다. 불교가 나왔을 때, 인도에서는 불교를 자이나교와 더불어 이단으로 여겼다고 하니,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에 앞서 전체적인 흐름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될 거 같다. 많은 불교사를 다룬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라모뜨의 이름은 남다르다.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우리나라의 좁은 불교학 테두리에서만 그 울림이 작게 속삭였으리라..   

 

 

 

 

 

 

 

 

 

 

 

 

 

벨기에에 라모뜨가 있다면, 구소련에는 체르바스키라는 걸출한 불교학자가 있었다. 불교논리학에 대해 조예가 깊었는데, 불교를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선 이 사람도 그냥 지나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귀중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매끄럽지가 않아서 아쉽다(이 외에도 예전에 <소승불교개론>이라는 다소 얇은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다).  

 

 

 현대적인 불교 연구는 서양이 먼저 시작했다. 순수한 학문적인 입장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도우미로 시작한 것이지만, 그 성과를 단순히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시각에서 들춰진 불교는 본래의 생기를 잃었을 게다. 왜냐하면, 불교는 단순히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지 않은가. 자각과 체험, 그리고 실천이 빠진 불교는 대단히 위험한 이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교를 대하는 그러한 태도는 고스란히 동양의 학자들도 전수를 받고, 그것이 불교학의 원래의 방법인양 반복하고 있다.   

 

 

 

 

 

 

   

 

 

 

 

  

<현대불교학 연구사>는 고대부터 최근까지 불교가 어떻게 발견, 해석, 연구되었는지를 폭넓게 다룬 책인데, 불교학에 관심이 있다면 매우 좋은, 그리고 이런 주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칼루파하나도 세계적인 불교학자인데, 전에 시공사에서 <불교 철학사>란 이름으로 나온 책이, 이번에 다시 <불교철학의 역사>로 환생했다. 불교학계에 큰 논의를 일으킨 책이니 만큼, 기회가 있다면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불교, 불교학을 둘러보게 되면, 결국 우리나라 불교로 눈이 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세계에 큰 반향을 준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학으로써 불교학의 역할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책인데, 불교 경전의 번역과 그 내막 등을 알기에 적당해 보인다. 특히 국내 저자들의 글 모음이라 더욱 반갑다.

 

 

 

 

 

<-아무래도 대승불교의 정수는 티베트로 많이 흘러 들어갔는데, 특히 중관사상의 새로운 발전상들도 찾아볼 수 있다. <불경의 요의와 불요의를 분별한 선설장론>이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이 책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이지만, 잠깐 멈춰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쫑카빠는  티베트의 유명한 스님으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겸비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교상판석을 시도한 책으로 여러 비판적인 관점이 녹아있다. 유식과 관련된 해심밀경을 다루기도 하고, 용수, 청변은 물론 중관자립파나 중관귀류파 등 후기 중관 사상의 세세한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책까지 번역되어 나왔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 관한 책이라서, 입문서 성격의 책은 빼고 실제적으로 불교의 참맛(그러나 적당히 어려운?)을 알려줄 만한 책을 골랐다. 그리고 유식과 중관에 대한 책은 다루지 않았는데, 이들은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는 필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얕지 않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위에서부터 차례로 추천하고픈 중요한 책들을 보자면, 맨 위에 다룬 <무상의 철학>, <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은 현대적인 언어로 접근한 책이므로, 읽으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현대철학을 과거의 뛰어난 성취를 통해서 자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티베트 불교철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책이다.  라모뜨의 <인도불교사>와 체르바스키의 <불교 논리학>도 불교학의 고전이자 중요한 책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룬, <현대불교학 연구사><불교철학의 역사>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ominofilm 2021-09-04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TexTan 2021-11-2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겨주신 글을 늦게 확인했습니다. 답글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응 2022-01-2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지도가 그려지네요. 감사합니다. 이런수고로움 너무 감사하네요.

TexTan 2022-04-1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서 남기신 글 봤습니다. 답변 늦어 미안합니다^^
 

'붓다(Budda)'는 보통명사이지만, 여기서 붓다는 석가모니 부처, 즉 고따마 붓다(가우따마 붓다)를 가리킨다.

붓다의 호흡수행이 담긴 경전은 <안반수의경(佛設大安般守意經)>과 <대념처경(大念處經)>이 있다. 안반수의경은 '아나파나사티'를 한역한 것으로, '아나'는 들숨을 말하고 '아파나'는 날숨 그리고 '사티'는 집중을 뜻한다고 한다. 특히 호흡의 수를 유념하고 깊이 들어간 상태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집중하여 '보는(觀)' 수식관(數息觀)을 강조한다. 따라서 단순한 명상하고도 다르고, 정신을 잃는 망아 상태의 엑스터시하고도 차이가 있음을 알겠다.

<대녀처경(아나파나사티)>은 <안반수의>보다 더 나아간 수행으로 볼 수 있는데, '대상을 그 자체로 관(觀)'하는 것을 담고 있다고 한다. 처음을 사념처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사념처(四念處)'란 몸(身), 감각(受), 마음(心), (정신적-물질적) 대상(法)을 말한다. 그리고 번뇌, 오온 등으로 점차 확대되어(깊이 꿰뚫고 들어가는) 나가는 식이다.

 

 

 

 

                                                                      <붓다의 호흡과 명상>

이와 관련된 책으로는 대념처경을 다룬 <붓다의 호흡법 아나빠나삿띠>가 가장 눈에 띈다. 최근에 나오기도 했지만, 이론과 실제 수행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로 옮긴 김열권 씨는 예전부터 위빠사나 관련 책들을 꾸준히 소개, 번역해 오기도 했다.   <붓다의 호흡법>은 안반수의경을 해설한 책이고, <붓다의 호흡과 명상>은 두 권으로 나왔는데, 원래부터 두 권을 염두한 것 같지는 않고, 후에 추가할 것들이 생겨서 새로 한 권을 따로 내 놓은 것 같다. 여기에는 다행히 <안반수의경>과 <대념처경>이 함께 다루어진다. 나중에 나온 <붓다의 호흡과 명상 2>에는 <안반수의경> 나머지 하권을 마저 다루고, <입출식념경>도 덧붙였다.

<붓다의 호흡과 명상>은 한역을 해설한 것이기 때문에, 빨리어를 토대로 한 <붓다의 호흡법 아나빠나삿띠>나 <들숨 날숨에 마음 챙기는 공부>와 함께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도 역시 위의 경전에서 생겨난 것이고, 요새는 이러한 수행법 혹은 비슷한 것들을 우리말로 '마음챙김'이라 부르는 것 같다. 

 

 

 

 

 

 

 

 

 

 

 

 

 

 

 

-최근에도 불교 명상, 호흡에 관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경전을 쉽게 우리말로 해설한 것들도 있지만, 호흡을 통해 마음을 챙기는 방법을 설명한(가령, <들숨 날숨에 마음 챙기는 공부>) 책도 눈에 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교 그리고 나가르주나

나가르주나(Nāgārjuna)를 통해 불교를 바라보려고 할 때는 이성의 끝을 체험하겠다는 단단한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성의 이로움을 최대한 얻으려는 지적 욕심도 아니며, 이성의 해로움을 피하려는 몸짓과도 다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것도 아닌 것.. 이런 개념이라는 쉬운 장소로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 이 부정의 논리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아닐 것이다.  

힘든 여행을 끝내고 머무르려는 성질, 잠시 어디라도 달라붙으려는 최후 승자의 의지도 결국 일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아집을 무력화시켜야 공성(空性,  Śūnyatā)은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기존의 모든 (비합리적) 구조를 깨뜨리고(해체), 그러한 파편화된 세계(空)에 도취된 수행자(performer) 자신은 악취공자((惡取空者: 空 자체를 실재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사람)로 더 위험한 버전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망치로 몹쓸 물건을 부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물건이 가루가되자 마자 망치도 흔적없이 사라져야 한다니..

그래서 이건 철학적인 문제로만 해결될 차원이 아니라, 어떤 전환이 결국 성공적으로 뒤따라야 하는 가장 극단의 모험이 될 것이다. 개념에 사로잡힌 가상의 분열들을 부정의 논리를 통해 뒤흔들어 전도(顚倒)시키는 일. 여기에는 아직 최고조의 이성의 힘이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전도는 계속 전염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이 결국 출발점(자신)에게로 향해서 자신마저 전환(각성)시켜야 제대로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중론>                          



나가르주나(용수, 龍樹)는 2세기경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남인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실존 인물인지 신화적 인물인지 정확한 자료로 그려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특히 티벳에서는 다른 용수라는 인물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중론(中論, Mādhyamika-Śāstra) 혹은 (근본)중송(中頌, Mūlamadhyamaka-kārikā)은 그가 극성화된 이론의 충돌이 혼란한 당대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시도를 담은 책이다[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사상 체계처럼 존재-원자(요소)들의 실재성에 집착하거나, 대승의 일부 공사상가들이 뜬금없이 그러한 모든 것들을 부정하면서, 그 부정이라는 파괴적인 힘으로써 공에 집착하는 상황].

 

 

 

 

 

 

 

 

 

                                                                                             <중론송 연구>

 

 

 

 

 

 

 

 

  

 

 

 

   

  찬드라키르티(짠드라끼르띠)의 <쁘라산나빠다>는 예전에 민음사(박인성 역)에서 나온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절판이라 구경도 하기 어렵다. 

 

과연 이런 책을 누가 볼 것인가? 하지만 지적-수행적 차원의 공부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눈에는 이런 책들은 빛을 발할 것이다. 

찬드라키르티는 불교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데, 그가 남긴 중론의 주석서인 <쁘라산나빠다> 역시 중론 텍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다.  이번에 4권으로 완역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연히 책을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다(2011년 6월). 그래서 이 페이퍼에 이 부분을 추가로 넣는다.  

  

 

 

 

  

 <열반의 개념> <불교 논리학 1> <불교 논리학 2>

무르띠의 <불교의 중심 철학>은 중관을 서양 철학의 시각, 칸트와 특히 (헤겔의) 변증법의 입장에서 접근한 선구적인 책에 속한다. 즉 중관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한 대표적인 경우인데, 학계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불교 본연의 입장에서 비판적인 시각에서 검토하기도 한다.       <열반의 개념(The Conception of Buddhist Nirvana)>은 불교학에서 결정적인 큰 역할을 한 대학자 체르바츠키(Stcherbatsky)의 책이다. 그전까지 서양학자들이 보여 준 불교에 대한 태도는 허무주의(Nihilism)로 몰고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흐름을 학문적으로 전환시키는 데 이 책의 역할이 컸다. <불교 논리학> 이 책도 체르바츠키가 쓴 것인데, 불교 자체내에 간직하고 있는 다양한 논리적 구사들을 한데 모은 매우 선구적인 연구서이다.   <용수의 공사상 연구>는 종교학의 입장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다른 책들과는 좀 다른 맛을 가졌다. 엘리아데의 지도로 만들어진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데, 종교적인 관점에서 공을 주로 다루고 있다.        위의 책들 중에서 <불교의 중심 철학>과 <용수의 공사상 연구>는 평소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볼 수 있는 책인데 반해, 체르바츠키의 책 <열반의 개념>과 <불교 논리학>은 전문적인 성격이 있기에, 불교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해 보인다.     -  

 

 

 

 

 

 

 

 

 

-요즘에 나온 중관사상 책들을 덧붙여 열거해 본다. 우선 <중관사상의 이해>는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로 중관의 기본 역사와 주요한 이론을 시대순으로 다룬 것인데, 번잡하지 않게 주요한 줄기를 따라가는 것 같다.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 카지야마 유이치의 <중관사상>도 이 분야에서는 중요한 책 중 하나다. 다소 현대적인 감각은 떨어질지 몰라도, 꼼꼼하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카지야마 유이치보다 더 유명한 불교학자인데, 불교 전반에 걸쳐 다양한 책을 쓰기도 했다. 그가 지은 <용수의 중관사상>은 평이하지만, 그래도 중관의 핵심을 잘 짚고 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중관의 후기 사상도 전기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제설을 중심으로 중관사상을 정리한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도 눈여겨 볼만하다. <적호의 중관장엄론>은 용수의 정통 중관사상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책이다. 중관사상이 나온 이후로 주변의 사상들도 발전을 했을 터, 이러한 것들을 수용해서 중관사상의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자칫 중관의 본질을 벗어날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비판할 수도 있겠다.  <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책은 중관이 자체 논리에 치중한 결과 생긴 자립논증파와 귀류논증파의 문제의식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은 주로 귀류논증학파의 입장에서 상대 진영의 입장도 다루는데, 후기 중관사상의 모습이 담긴 영양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중관과 유식을 함께 다룬 책 

 

 

 

 

   

 

 

 

*그 외 입문서 성격의 책들

 

 

 

 

 

 

 

*기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