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절라 Y. 데이비스는 산업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결과로 가정에서 여성의 의무가 줄어들고(69), 여성성 이데올로기가 생산자에서 아내와 어머니로 이동했다고 보았다(70). 백인 주부들에게 이상적인 여성은 완벽한 가정 속의 온화한 어머니, 순종적인 아내였고, 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더욱 더 열등하게 만들었다.  

 


1833, 미국 노예제반대협회 창립대회에서 여성들에게 각성의 순간이 찾아왔다. 단 네 명의 여성만이 이 대회에 초대되었고, 그나마 그들은 자격을 갖춘 참가자가 아니라 청중이자 관중으로서 발코니로 안내되었기 때문이다. 개회식에서 루크리셔 모트는 발코니의 청중이자 관중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대회 직후 모트는 필라델피아 노예제반대 여성협회 창립 모임을 조직했다. 그제야 비로소, 백인 여성들은 자신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을 함께하는 동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자신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노예제 반대 운동을 하다가 알게 된 일이다.

 



그렇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해방투쟁을 하려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 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

 


여성운동에 관한 엘리너 플렉스너(Eleanor Flexner)의 출중한 연구가 보여주듯, 여성들은 노예제 폐지 운동을 통해 값진 정치적 경험을 축적했고,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10여 년 뒤 여성 권익 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은 모금 기술을 발전시켰고, 문건을 배포하는 법과 회의를 소집하는 법을 배웠고, 일부는 위력적인 대중 연사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여성 권익 운동에서 중요한 전략적 무기가 될 탄원서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탄원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여성이 정치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80)

 


백인 여성들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들, 흑인들의 해방과 인권을 위해 일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녀들은 흑인 노예들을 돕고자 했고, 또 실제로 그들을 도왔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 일하면서 자신들의 처지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다.

 

 

노예제 반대 운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백인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할 필요가 없는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의사, 변호사, 판사, 상인, 공장주를 남편으로 둔 여성, 다시 말해서 중간계급과 신흥 부르주아 여성들이었다. (75)

 


 

경제력이 없는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역겨운 페미니즘’, ‘먹고 살 만한 여자들의 한가한 소리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 책의 해제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쓰신 문장들은 그런페미니즘조차 왜 필요한지를 설명한다.

 


페미니즘뿐 아니라 중산층의 경험은 모든 지식의 기반이다. 삶이 지나치게 고달픈 이들이나 부자들은 언어를 생산할 여력이나 이유가 없다. 모든 언어, 지식은 중산층의 삶의 경험에 기반한다(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 등도 마찬가지다). (<해제 : 정희진>, 21)

 


노예제 반대 운동의 참여와 이를 통한 각성, 그리고 여성 인권 운동은 그런 중산층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일할 필요가 없는여성들이었다. 의사, 변호사, 판사, 상인, 공장주의 아내들로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여성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했고,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각성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해야 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도왔던 그 경험이 그녀들의 저항을 추동하는 가장 소중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 다른 사람을 도왔던 바로 그 경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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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2-13 10: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선생님 매거진에서 그런 얘기 하셨었거든요. 누군가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내가 배운다고요. 아마 누구나 다 이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도 어떤 것에 대해 상대에게 설명하다가 그전에 이해 안되던게 갑자기 이해가 됐던 그런 경험이 있어요. 저는 아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남을 돕는 경험에서 나의 위치를 깨닫게 되는 일이요.

이번 책에 대해 여러분들의 글을 읽는게 참 좋습니다.

단발머리 2023-02-17 10:20   좋아요 0 | URL
누군가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더 배울 수 있다는 거 참, 좋은 거 같아요. 저도 선생님 그 클립에서, 공부는 나누면 더 좋다고, 하신 거 기억나요. 공부도 사랑처럼 나누면 배가 되나 봅니다!!!

미미 2023-02-13 12: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희진의 공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중산층에 대해서요.
마음의 여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아요.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또 그 방식도 다르겠지만요.^^

단발머리 2023-02-17 10:23   좋아요 1 | URL
저는 오랫동안,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런 시간이 주는 ‘혜택‘ 뿐 아니라,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여지, 여건, 시간과 환경에 대해서요. 현장 강연이 있던 그 날에도 선생님이 비슷한 말씀 하셨거든요. 여러분들의 삶이 막 쉽고 그러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올 만한‘ ‘여유‘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