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 듯하오만."

고안 선생이 말했다.

"재첩은 자양강장에 좋아 더위를 타지 않게 해 주고 된장을 풀어서 끓여 마시면 이마에 솟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헤이시로도 매일 얌전히 재첩 된장국을 마시고 콩알만 한 조갯살을 알뜰하게 파먹긴 하지만 더위에 축축 늘어지는 데는 전혀 변화가 없다. 재첩 귀신의 앙갚음으로 코끝에 조개껍질이 피어나기 전에 장어로 바꿔 주었으면 싶다.

짓토쿠
기장이 짧은 남성용 검정 상의로 주로 의사, 학자, 다인(茶人) 들이 입었다

"여름은 더운 법입니다" 하고 의원은 대답했다.

"그래야 맞춰 사는 맛이 있지요. 더울 때는 덥게 지내야 합니다. 그게 건강에 좋아요.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뵈니 이즈쓰 나리가 더위를 심하게 타는군요."

이건 병이 아니다, 하고 의원은 대번에 짐작했다. 원래 호리호리하던 짱구는 며칠을 굶은 탓에 더 작아져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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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의 일본, 도쿄가 아닌 ‘에도’가 나라의 중심지였던 시절을 무대로 하는 한가로운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어려운 사건 해결이나 놀랄 만한 반전은 없습니다만, 주인공 이즈쓰 헤이시로가 언제나 그렇듯, 번둥번둥 느긋하게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 미야베 미유키

하루살이 (상) |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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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물은 사방 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엔 기괴한 봉우리 많아라.
가을달은 밝은 빛 드날리고
겨울 고개엔 외로운 소나무 빼어나구나.
春水满四澤 夏雲多奇峰
秋月扬明輝 冬嶺秀孤松
「도연명陶淵明, 
<사계절四時>,  <고문진보古文眞寶》 - P49

봄물은 그렇게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어서, 절대 인간의 언어적 설명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굳게 믿는다. - P51

못가에는 봄풀 돋아나고
동산 버드나무에는 우는 새 바뀌었네.

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

사령운, <못가의 누각에 올라서登池上樓> 중에서, <문선> 권22 - P52


춘분春分
천지의 봄을 기운으로 느끼며 - P48

긴 겨울 뒤에 맞는 봄의 포근함
솔밭을 거닐었다. 지난해 늦가을 일제히 떨어져 쌓인 마른 솔잎에 발이 발목 가까이까지 묻힌다. 며칠 전 내린 봄비 탓인지, 발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부드럽다. 폭신폭신 융단처럼 밟히면서도 부시럭거리는 소리 하나 없다. 한 해를 온전히 소나무와 함께 뜨거운여름볕을 온몸으로 받다가, 가을이 되자 소리없이 자기 자리를 떠났던 솔잎들이다. - P57

비 그치자 아침 갈이 북쪽 밭에 물을 대고
봄보리 종자 거두며 풍년을 기원한다.
서쪽 집 늙은이 울 앞에서 말하기를,
"오늘 춘분이라서 연기 곧게 올라가는군."

雨歇朝耕水北田 春车撒乞種豐年
西家老叟籬前語 今日春分直上烟

신광수申光洙, <시골집 풍경田家卽事>, 
<석북집石北集》권3 - P59

그렇다고 춘분에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바람도절기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역위통괘험易緯通卦驗》에는 팔풍이라고 해서 바람의 이름을 여덟 가지로 기록한다. 입춘에부는 바람은 조풍調風, 입하에는 청명풍淸風, 하지에는  경풍景風, 입추에는 양풍凉風,  추분에는 창합풍閻閻風, 입동에는  부조풍不周風, 동지에는 광풍이 분다고  한다. 춘분 무렵 부는 바람은 명서풍明庶風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풍東風이라는 뜻이다. - P59

나부끼는 듯 춘분날 내리는 비가
아침 내내 먼 봉우리 지나간다.
이른 꽃에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떠들썩한 새소리에 말은 조용조용.
이웃집 떠나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살짝 눈물 비친 눈으로 물가에서 만났다.
시골 사람 아끼는 것 무엇이던가.
때맞춰 밭농사 촉촉해지는 것.

裊裊春分雨 終朝度遠峯
早花心獨喜 暄鳥語從容
不畏隣家去 微沾水岸逢
野人何所愛 時節潤田農

신광수, 춘분 날 내리는 비春分雨 《석북집石北集》권3 - P61

애달픈 이웃과의 이별에도 불구하고밭은 때맞춰 내리는 비에 촉촉하기만 하다. 냉엄한 현실과 따스하고 푸짐한 날씨가 대비되면서 농촌 풍경의 단면이 무심한 듯, 혹은의도한 듯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 P62

봄날의 작은 호사를 누리면서, 시골서생의 무력감과 새로운 생의 희망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괜히팔을 흔들고 허리를 틀어본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농사꾼의 피가 세포 하나하나마다 되살아난다. - P62


청명淸明
저편 언덕에 내생이 묻혀 있네 - P63

산모롱이를 돌면 집보다 살구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른한 봄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멀고 지루했다. 마을에 동급생은 나까지 세 명이었지만, 당시의 마을이 그렇듯이 골짜기마다 집이 떨어져 있어서 말만 같은 마을이었지 사실은 다른 골에 사는 셈이었다. - P63

마을 어귀에는 상여를 넣어두는 곳집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면햇살이 모이는 공터가 있었다. 한겨울에도 그곳은 다른 곳보다 따뜻해서, 동네 개들이나 사람들이 어한 삼아 잠시 쉬며 몸을 녹이는 곳이기도 했다. - P63

살구꽃 핀 마을
집 뒤란으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있었지만, 봄이면 가장 화려한꽃을 선보이는 것은 역시 살구나무였다. 몇 그루의 복숭아나무도있어서 수줍은 자태를 뽐내기도 했지만, 살구나무는 언제나 그 수줍음을 압도하는 화려한 개화를 자랑하곤 했다. 마을을 들어서면가장 먼저 보이는 것도 그래서 살구나무였다. - P64

한꺼번에 꽃이 만발한 모습은 벚꽃과 비슷했지만, 그리하여 도시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시골 촌놈들 눈에는 단번에 구별되는 그 무엇을 살구꽃은 가지고 있었다. 우선 꽃피는 시기도 달랐거니와 벚꽃의 괜한 들뜸과는 다른, 어딘지 모르게
‘소박한 화려함(!)‘이 살구꽃에는 있었다. - P64

음력 2월 말이면 만물이 생장하여 모두 청결淸潔하면서도 밝고맑아서 ‘청명淸明‘이라고 부른다. 날씨는 눈에 띄게 따뜻해지고 봄갈이가 본격화되며 날씨가 좋아 나무를 심거나 옮기는 일 역시 이때 함께 한다.  - P65

청명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건 아마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구 때문이  아닐까. 우리 고시조나 가사 작품을 비롯하여 민요에도 들어가 있는 구절, "묻노니 술집은 어디 있는가借問酒家何處在,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牧童遙指杏花村(청명淸明)"는  표현은 오랫동안 우리 마음을 대변해왔다. - P65

봄바람 홀연 그쳐 청명 가까운데
가랑비 부슬부슬 늦도록 개질 않네.
집 모퉁이 살구나무 활짝 피려는데
물방울 머금은 가지 몇 개 사람 향해 기울인다.

春風明己近淸明 細雨霏霏晚未晴
屋角杏花開欲遍 數枝含露向人傾

ㅣ권근權近, <봄날 성 남쪽에서春日城南卽事>, 《양촌집陽村集》권5

청명 시절에 변방의 성을 지나노라니
바람 맞는 먼 나그네 그 마음 어떠한가.
들새는 뜻 모를 소리 지저귀고
이름 모를 산꽃은 활짝 피었다.
포도주 익으니 근심스런 마음 어지럽고
마노 술잔 차가워 취한 눈 밝아진다.
아련히 생각나니, 고향은 지금 잘 있는지
배꽃 깊은 뜨락에 자고새 울겠지.

清明時節過邊城 遠客臨風幾許情
野鳥間關難解語 山花爛漫不知名
葡萄酒熟愁腸亂 瑪瑙杯寒醉眼明
遙想故園今好在 梨花深院鷓鴣聲

야율초재耶律楚材,  <경진년 서역에서 맞이하는 청명庚辰西域淸明> - P67

야율초재는 거란족 출신으로 금나라 말에서 원나라 태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고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사람이다 - P67

배꽃 피고 바람 따뜻할 제시를 다듬노라니
오늘 청명은 옛날과 다르구나.
시절 물건이야 어찌 사람 일 따라 변할까마는
하늘 끝에 있는 이 내 신세 새삼 놀란다.

梨花風暖簡齋詩 今日清明異昔時
節物豈隨人事變 自驚身世在天涯

김상헌金尙憲,<청명에 느끼는 감회清明感懷>,《청음집清陰集》권12  - P68

청명은 이렇듯 성묘와 답청이라는 두 가지 풍속으로 사람들을들뜨게 한다. 성묘하는 풍습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청명을 ‘배소절拜掃節이라고도 부른다.  조상의 산소를 참배하고 묘역을 청소한다는 의미다. - P70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식과 청명은 모든 귀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므로 죽은사람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재앙을 타지 않는다. 비석을 바꾸거나 세우는 일도, 무너진 무덤을 수리하는 일도, 무덤에 잔디를덧입히는 일도, 무덤 주변의 축대를 다시 쌓는 일도 모두 이때 한다. 동티가 나지 말라는 의미다. - P75

무덤을 뒤로 하고 천천히 걸어서 산을 내려온다. 집으로 돌아갈때다. - P77


곡우穀雨
차 향기 속에 제비는 날아오르고 - P78

햇차를 받는 날이면 오래 사귄 벗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좋은 차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만 내게 맞는 차를 만나는 것은더 어렵다. 세상에 수많은 차가 있지만 내게 맞는 것은 몇 종류 되지 않는다. 똑같은 녹차를 만나더라도 만든 사람의 솜씨에 따라 맛과 향과 빛깔이 천차만별이니 자연히 선호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천하의 차를 명칭에 따라 분류한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적막한 겨울밤, 눈 녹인 물을 부어 올해 새로 만든 햇차를 우려내는데, 불은 활활 타오르고 샘물 맛은 달콤하니, 이 차맛이야말로 제호나 다름이 없습니다. 공께서 어떻게 이 맛을 알겠습니까?

以旣寒宵寂廖, 斟雪水, 以煮新茶, 火滑泉甘, 此味與醍上異,公豈知味乎?
허균, <최분음에게 보내는 편지與崔汾陰 丁未二月>, 《성소부부고惺所覆甑藁》
권20 - P81

추운 겨울밤이 고요하다 했으니 밤이 깊은 때다. 모두가 잠든밤, 허균은 혼자 일어나 그림처럼 앉아 차를 우려낸다. 화로에는불이 붉게 타오르고 길어둔 샘물은 추운 겨울밤의 기운을 그대로담아 서늘하기 그지없다. 추운 겨울밤에 새 차를 꺼내 달여 마시는정취를 그 누가 알겠는가. - P81

인간 세상에 좋은 풍취
그 오묘한 법은 도씨 집안에서 시작됐지.
둥근 달 같은 차를 들어눈 녹인 물로 짙게 달여본다.
맑은 기운 알맞아 뜻밖에 뛰어나고
상쾌한 맛 들어와 갈증 속에 보태진다.
따스한 휘장 속 염소 안주에 술 한 잔
사치하고 화려하다 함부로 자랑 마오. - P82

人間好風味 妙法自陶家
試把一團月 濃煎六出花
清宜分外勝 爽入渴中加
暖帳羔兒酒 奢華莫漫誇

심동구沈東龜, <눈석임물에 차를 끓이다雪水煎茶〉 - P83

세상의 권력에 몸을 맡긴 자는 결코 참맛을 알 수 없는 것이 차다. 이미 권력의 맛에 혀끝은 무디어졌고 권력의 향기에 코끝이 둔해졌으니 차의 맛과 향을 무엇으로 느낄 것인가. 진정한 맛과 향을느끼지 못하는 순간 그에게 남는 것은 오직 형식뿐이다. - P82

금빛 휘장 밖에는 높은 깃발 섰는데
게눈과 고기 비늘은 눈에 가득하여라.
가난한 선비 점심 때우기 어려워
새 샘물로 느긋하게 우전차 달여낸다.
백성들 근심이야 신선 땅에서 묻지 마오물의 액운을 그 누가 손님 거절하는 집에 나눠주리.
가슴속에 막힌 곳 없음을 스스로 믿는데맑고 쌉싸름한 차 마시니 더욱 자랑스러워라.

銷金帳外建高牙 蟹眼魚鱗滿眼花
貧士難充日中飯 新泉謾煮雨前芽
民憂莫問群仙境 水厄誰分謝客家
自信胸中無壅滯 喫添清苦更堪誇

ㅣ정약용丁若鏞, <햇차新茶> - P84

푸른 봄하늘에 제비 날아오르네 
제비를 언제 보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내가 바빠진 건지 도시 환경이 제비를 쫓아버린 건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주변에서 제비를 본 지가 꽤 오래된 게 아닌가 싶다. - P85

홀로 지내는 시골집에 봄은 저물어가는데땅이 궁벽해서 살갑게 지낼 만한 손님 없어라.
다정한 건 오직 작년의 제비들
성긴 주렴 옆에서 주인 부른다.

獨臥村家欲暮春 地偏無客可相親
多情唯有前年燕 又傍疏簾喚主人
유방선, <봄날의 정경卽事>, <태재집泰齋集》권21 - P86

가슴속에 1만 권의 책이 들어있다 한들 세상은 내게 눈길한번 주지 않는다. 농투성이로 지내면서 이따금씩 하늘을 볼 뿐이다. 방문에 일찌감치 주렴을 드리웠으니 세상 번우한 소식을 듣지않겠다는 것이요 외객을 사절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러나 제비가 올해도 찾아와 밖에서 부르는 것이야 반갑기 그지없다. - P87

곡우 무렵 내리는 비는 줄기 못 이루는데집 안에 편안히 앉아 차를 시음한다.
어린 제비는 둥지를 나서고 누에는 조릿대에 올릴 무렵
산골 집에서는 또 푸른 찻잎 볶는 시절 지난다.

分龍雨小不成絲 晏坐齋中試茗旗
乳燕出巢蠶上簇 山家又過炒靑時

번증상樊增祥, <찻잎 따는 노래采茶詞 - P88

살아 움직이는 농촌 들녘에 서서
곡우 무렵은 농촌이 한창 농사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한시기다. 논밭에서는 농부들의 거친 노랫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들밥을 이고 오가는 아낙네들을 쉽게 발견한다. - P89

고을 남북쪽에선 닭과 돼지 소리 시끄럽고
땅신에게 고사 끝내니 곡우날이 저물었다.
태수는 봄놀이 삼아 농사일 부지런히 권하노라니
가마가 때맞추어 살구꽃 핀 마을로 들어선다.

城南城北鬧鷄豚 賽罷田神穀雨昏
太守遊春勤勸課 肩輿時入杏花村

유호인, <죽지곡竹枝曲>, <기아箕雅> 권3 - P89

이제는 농촌에 젊은 일손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늙은 농부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간다. 농업을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바라볼 능력은 없지만 고향 마을의 농군들 얼굴 마주 보기가 두려워진다. 곡우무렵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농촌이 그리워진다. 그것은 아마 잊혀져가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일지 모르겠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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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녀는 나 이외의 인간이에요. 다들 남자 아니면 여자로 나뉘어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나누는 것에 의미 같은 건 없어요." 무쓰미가 말했다.

데쓰로는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며 확신했다. 무쓰미는 미쓰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정체를 간파한 것이다.

"더는 섹스하지 않겠다고?"
"아, 네." 히로카와는 목을 움츠리듯 끄덕였다. "꼭 하고 싶으면 밖에서 하고 오라더군요. 자신은 그런 일로 화내지 않겠다고."

‘철이 들면 말이야, 아이라도 이래저래 눈치를 보잖아. 나 때문에 어머니가 울고 있으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그 애가 원하는 대로 살길 바랍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생각하지 말고. 나는 이미 잘못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한 사람은 여성의 마음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데 죄책감을 느꼈고, 다른 한 사람은 남성으로 여성을 사랑하면서도 육체가 여성인 것에 괴로워했다. 자살이라는 결론은 같았으나 그곳에 도달한 길은 전혀 다르다. 다만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이른바 윤리라 불리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윤리가 반드시 인간의 옳은 길을 드러낸다는 보장은 없다. 대부분은 그다지 대단한 근거도 없는 사회 통념에 불과하다.

당신은 마음이 여자고 레즈비언이 아니면 남자의 육체를 가진 사람만 사랑하리라 생각하나 본데, 마음은 역시 마음에 반응해. 여자인 내 마음은 미쓰키의 남자 마음에 호응했지.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여는 거야. 형태는 상관없어.

"결국은 다,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고 마음대로 규정하고 자신과의 차이에 괴로워한다. 남자가 무엇인지,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분명 그렇게 말했어."

"그 말의 대답이라 해야 하나, 재미있는 말을 들었어.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있는 거래."

"잠깐만요. 연락처를 어디에 적어뒀는데요?"
데쓰로가 묻자 참 멍청한 질문을 한다는 듯 사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세상에 주소록이라고 적힌 노트라도 있을 것 같아? 머리 좀 써."
"앗!"

그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친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요!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1루 주자를 보지 못했다고. 그래서 꿈을 버렸다고…….

"안타깝지만 그럴 일은 없어. 아까도 말했잖아. 이 연극 속 부인의 대사는 내가 한 말이야. 내가 나카오에게 한 말이라고. 데쓰로가 말해주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왼쪽 눈에 관해서 말을 꺼내지 않을 거야. 만약 말해야 한다면 그가 죽기 직전에 할거라고. 머리맡에서 막 따질 거라고." - P522

"그렇지. 목록에 등록된 사람이 이제 겨우 스물에서 서른 명 정도야. 그래도 지금까지 가오리와 다테이시 콤비를 포함해 다섯 쌍의 남녀가 호적 교환에 성공했어. 지금부터가 중요해. 혁명은 시작되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발목을 잡힐 수는 없어."

나는 너를 만날 수 있었지만 너는 나를 만날 수 없었네. 그래도 괜찮은 거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무렵 녀석이 종종 이런 말을 했어.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게 아니냐고. 불법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히 사물을 거울에 비춰 거꾸로 보이게 할 뿐이라고. 내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고. 대강 그런 말이었어."
"거울에 비춘다……."

"오히려 마음의 부담은 더 커졌을지 모르지. 그래서 나도 요즘 가끔 생각해. 나카오가 했던 말을. 단순히 사물을 거울에 비춰 거꾸로 보이게 한 것뿐이지, 내용은 하나도 좋아진 게 없지 않나, 하고 말이야."

"니시와키, 그때도 즐거웠어. 왜 인간은 변하고 마는 걸까? 게다가 나쁜 쪽으로. 성공하면 오만해지고, 실패하면 비굴해지지. 나는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부잣집 딸과 결혼해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길을 선택했어. 그런 자기혐오 때문에 사가 일행과 젠더 문제에 맞서는 데 열중했지. 하지만 그건 자기만족이었고 현실 도피에 불과했어. 그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릴 생각만 했던 때가 그리워."

타이트엔드는 패스를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쿼터백을 지키기 위해 블록도 한다. 데쓰로는 그 사실을 떠올렸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빈치> 2001년 5월호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 대해 《비밀》의 후속작 같은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고 후 눈을 뜬 딸의 마음이 아내라는 설정으로 많은 독자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던 작가는 ‘외모와 내면의 차이’라는 키워드를 다시 한번 꺼내 들었는데, 이번에는 ‘아내와 딸’ 대신 ‘남자와 여자’로 바꾸어 더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특수한 주제 속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이 작가의 특기다. 젠더라는, 조금은 복잡한 개념을 다루면서도 우리 내면에 있는 남녀의 요소, 이른바 남자답다, 여자답다라는 사회적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어른과 아이, 인종, 민족, 국가 사이의 문제도 마찬가지에 여기서 던지는 작가의 질문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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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리그전 얘기로 화제가 옮겨 가자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외사랑 | 히가시노 게이고 저/민경욱 역

‘내 아내를 사랑한 그녀는 남자였다.
대학생 시절 함께 땀 흘린 미식축구부 동료들과의 동창회가 열린 날 밤. 에이스 쿼터백이었던 니시와키 데쓰로는 귀갓길에 팀 매니저였던 히우라 미쓰키를 만난다. 오랜만에 만난 미쓰키는 자신의 몸은 여성이지만 남성의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심지어 얼마전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데쓰로는 미쓰키가 경찰의 수색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려 하지만 얼마후 미쓰키는 모습을 감춘다. 그런 미쓰키의 뒤를 쫓는 데쓰로의 앞에 고뇌로 가득 찬 진실이 밝혀진다.
젠더에 대한심도 있는 메시지를 담은걸작 미스터리!

안자이는 작은 사케 술병을 끌어당겨 자신의 컵에 따르려 했으나 술이 없었다.
술자리는 10시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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