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이 죽자, 지위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던 헤이시로는 아버지가 배다른 형제를 어디다 숨겨 두지 않았을까 하고 찾아다닌 적이 있다. 부친은 그 정도로 색을 밝혔다. 얼굴 모르는 형제가 한 명쯤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아니, 틀림없이 있다고 확신했다.

"아무것도 결단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저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버지에 맞서지도 못하고, 뭐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얼간이입니다."

무너진 자존심을, 분한 심정을, 억울함을 자기 내부에서 어떻게든 소화하고 앞으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은 하나이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히코이치가 대신해 줄 수는 더더욱 없다.

"너는 이걸 간과하고 있다. 하나이치는 하나이치고 너는 너야. 이사와야의 주인과 안주인은 그걸 안다. 그러니까 너를 선택했겠지. 주인과 안주인은 하나이치에게 조리사로서 그런 자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주방장 자리에 올리지 않은 게 아니냐."

"그렇게까지 사람을 충동질해서 앞뒤 가리지 못하게 만든 것, 그것은 과거의 죄. 은폐되고 잊혔지만 그 일을 저지른 본인은 평생 떨칠 수도 없는 무거운 죄. 저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요."

헤이시로는 더욱 어리둥절했다. 좋아하는 남녀가 사소한 일로 다퉜다.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리던 여자가 벽장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말았다. 남자가, 이걸 어쩌나,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달래고 기분을 맞춰 주며 여자가 마지못한 척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화해하기 위해서.

마귀는 물러나고 만복은 들어와라!

: 입춘 전날 액막이로 콩을 뿌리면서 외는 주문.

기모노는 아오이 역을 맡은 환술사 여배우의 제안이었다.

―여자가 여자를 죽였는데 그 자리에 기모노가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무늬든 그 기모노에 의미가 없을 리가 없어요. 한번 입어 보기로 합시다.

―이모부. 환영은 환영일 뿐이에요. 아무리 꼭 닮아도 그건 진짜 아오이 씨가 아니잖아요. 여태까지 속아 온 사키치 씨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환영을 내세워서 속일 수는 없어요. ―아오이 씨를 용서하고 말고는 사키치 씨 마음에 달렸어요. 지금은 더더욱 아오이 씨의 환영으로 사키치 씨를 속여서는 안 돼요.

어쨌든 기분이 좋다. 침상 가마를 타 보니 버릇이 들 것 같다. 벌렁 드러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어디든 느긋하게 실려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모든 사람이 매일을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올리듯이 차근차근.

제 발로 걸어가야 한다. 밥벌이를 찾아서.

모두들 그렇게 하루살이로 산다.

아내가 또 놀란다.
"짱구 이마, 백분이 많이 필요했겠네요."
"시댁이 연지 가게야. 백분이라면 넘칠 정도로 많지."
헤이시로는 겨우 그 말만 했다.

이 소설의 원제 ‘히구라시日暮らし’에는 쓰르라미라는 뜻이 있습니다. 쓰르라미는 늦여름부터 초가을에 나타나서 운다고 하여 일본의 전통 문학에서는 가을을 상징하는 시어로 통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팍팍한 생활을 뜻하는 ‘소노히구라시其の日暮らし’라는 말도 떠올리게 합니다. ‘히구라시’는 그런 중의를 가진 말입니다. 그것을 ‘쓰르라미’로 옮겨서는 그 중의를 제대로 살릴 수 없어 부득이 ‘하루살이’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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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해 보면 이것과 저것의 거리를 알 수 있고, 거리를 알면 만물의 생김새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이치가 측량이 가능한 사물로만 드러나지는 않으니까요. 사사키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너는 이제 사물을 측량하는 기술은 익혔으니 앞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잘 보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제 측량은 적당껏 해라, 라고 하셨어요.”

하루살이 (하) |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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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해 보면 이것과 저것의 거리를 알 수 있고, 거리를 알면 만물의 생김새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도매상 주인 내외처럼 어긋나지 말고 온전한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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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란 대개 그렇게 되게 마련이니까요."

"그래. 도신 동네에 사는 도신들은 모두 친척지간처럼 사이가 좋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나야 애초에 꼼짝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질색이거든."

이런 말머리에 어울리게 맞장구치기란 쉽지 않다. 고헤이지처럼 뭐든지 ‘우헤’로 일관하는 것이 의외로 똑똑한 짓인지도 모르겠다고 헤이시로는 생각했다.

"그냥 때려 맞힌 거다. 거리를 다니는 큰 수레 중에 과적하지 않은 수레가 어디 있겠니. 보나마나지."

맛난 음식 때문일까. 맛난 것을 먹는 기쁨이 그 어떤 이론보다, 그 어떤 세상 규칙보다도 사물을 더 제대로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아오이를 해친 범인도 지금쯤 어디선가 이렇게 밥을 먹고 있겠지. 맛있는 밥, 따뜻한 밥, 풍성해서 기분 좋은 밥을.

배불리 먹고 난 후 만족스러웠던 트림이 도중에 뚝 그쳤다.

유미노스케가 또 담요를 적신 것이다. 오줌에 젖은 담요는 마치 거대한 혀를 길게 빼고 유미노스케에게 메롱을 하는 것처럼 빨랫줄에 축 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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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치가 우는 모습을 헤이시로는 처음 본다.

내놓고 우는 것은 아니었다. 눈물도 겨우 세 방울이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황망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두 손을 다다미에 짚고 납죽 엎드렸다.

접시로 손을 뻗어 양갱 한 조각을 집어 입안에 던져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참 달구나. 너도 먹어라."

"얘야, 유미노스케."

"예, 이모부."

"담요는 다 말랐니?"

도신 마을에 있는 집의 아담한 정원에서 가을벌레들이 찌르르르 울었다. 벌레 소리에 이끌린 듯 밤바람이 스르륵 숨어든다.

헤이시로에게 이것은 맹점이었다. 어느새 오후지에게 진실을 감추려는 의도, 오후지를 속이려는 미나토야의 의도에 동조하고 그쪽 편에서만 사물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강 건너편에서는 어떤 경치가 보이는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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