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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주요 등장인물 나, 터키, 니퍼스, 너트, 바틀비
배경 1800년대 중반 미국 '월 스트리트 00번지 2층' 변호사 사무실
첫 문장 나는 초로에 접어들었다.
요약 무슨 말을 시키면 뭐든 "안하는 편을 택하하겠습니다." 라고 대답
하는 필경사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 '나'의 이야기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얘기지만 사실은 필경사 바틀비 얘기를 하는 '나'의 얘기다. '나'는 바틀비에 대해 「당사자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경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틀비가 그랬다.(8p.)」고 말하지만 따지고보면 바틀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많다. 그는 처음 한번만 빼고는 끝까지 예상대로 말하고 예상대로 행동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상식 밖으로 행동한다.(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세요. 저는 절대 얘기 안할거니까요.) 결정적으로 '나'는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다. 바틀비는 이름도 있고 어디에 있는지도 확실하고 뭐라 대답할지도 예상되는(예상만 되나. 예상이 그대로 실현도 되지.) 사람이니 우리가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한가지 확실해진 게 있다. 내가 빠져드는 건 이야기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 그 점이 확실한 점이 되었다(「ㆍ」 이 점과 「 ● 」 이 점은 크기가 다르다. 그러나 둘 다 점이다. 확실한 점.). 그렇다. 나는 캐릭터에 집착한다. 이렇게 확실한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아 나도, 나도 할 수 있을까. 바틀비를 만들어낸 사람, 변호사 '나'를 만들어낸 사람, 터키, 니퍼스, 너트를 만들어낸 사람이 사람이니까(허먼 멜빌이 허상이 아닌건 확실하지?). 그 점이 바로 희망이다.
필경사 바틀비에게 고맙다. 스물 세 살에 나는 청개구리였다. "싫어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뭐가 그리 싫었을까. 직장 쪼무래기가 무슨 말만 하면 "시러요"를 나불대는데도 짤리기는 커녕 선후배 동료들에게 넘치는 관심을 받으며 지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지시 받는 일이 줄어드니 "싫어요"를 말할 기회도 사라졌다. 그러나 기질은 남아 속으로는 자주 "싫은데?"를 외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자연스럽게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중얼거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청개구리 기질이다. 바틀비가 하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해서, 나는 '하는 편'을 택해야 균형이 맞을것 같다.
이로써 또 한가지 점이 확실해진다. 사람은 상대적이다. 혼자는 기형이다. 사람이 '사람 人' 이 되려면 균형이 맞아야 한다. 그리고 「 | 」 요 모양으로 꽂꽂히 서있으면 안되고, 기울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 人'이 되려면.
바틀비는 「 | 」 요렇게 살다가 「 _ 」 요렇게 갔다.
변호사 '나'는 「 人 」요렇게 살아보려고 이리 기울 저리 기울, 기울이며 산다.
진짜 나는 지금은 「 | 」요 모양이지만 「 _ 」이렇게 끝날 순 없다,며
의욕에 불탄다. (불 붙어서 어디가 뜨거우면, 후다닥 중심을 잃으면,
어디로 기울 기울, 그럴때 누구랑 쿵- 부딪히기를 바라며.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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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로 말하자면 젊어서부터 줄곧 평탄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깊은 확신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따라 서 활기차고 흥분하기 쉬우며 더 나아가 소란에 휘말리기까지 한다고 흔히 들 말하는 직종에 몸담고 있지만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의 평안이 깨지는 일 이 없었다. 나는 배심원 앞에서 변론을 하거나 대중의 갈채를 끌어내거나 하는 일이 결코 없는, 야망이 없는 변호사들 축에 속한다. 그리고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한다. (8~1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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