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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단순한 여행 기록문이라고 하기에는 독특한 책이다. 보통 여행기라고 하면, 이 지역의 특산물은 어떻고 어떻게 여행해야 하며 어떤 여행지를 가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기록에는 굉장히 인색하다.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다양한 구경을 했으나 정작 그것에 대해서는 거의 적혀있지 않다, 단지, 그 지방에서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여행기 또는 여행 안내서가 아닌 여행을 하면서 있었던 일을 적는 에세이의 성격 이외에 정보전달의 목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단기 이주라고 하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외국에 나가서 생활한 경험은 소재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이 책을 정확히 정의하자면 장편 소설을 쓰면서 느끼는 감정과 타지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말이 맞을 것 같다. 장편 소설을 쓰면서 느끼는 많은 고통과 그 힘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느끼는 정신적 고통과 괴로움을 글로 새겼다. 이런 정신적인 부분 이외 생활하면서 느꼈던 갖가지 감정은 하루키의 심적 부담을 크게 괴롭게 만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힘들다 괴롭다 쓰고 있지만 문체로 고통이 드러나 보이거나 날카로운 감정의 편린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을 말할 때는 문체부터가 달라져 있거나 살짝만 닿아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묻어나 있다.
어떻게 보면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경험은 하루키가 작가로 대성을 하게 되는 두 가지 작품인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 집필의 중간이고 엄청나게 성공을 거둔 때다. 작가로 첫 소설부터 상을 타고 그 이후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먹고 살만 했는데, 이 소설로 대작 소설의 반열에 올랐는데 뭐가 아쉽겠느냐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는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맞다. 이를 계기로 하루키는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작가로 떠오르게 된다. 우리나라도 허둥지둥 이 작가의 책들을 번역하여 발행하게 되고 전 세계 각지에서 번역이 되어 팔리게 된다.
배부른 투정은 이 상황을 하루키는 못 견뎌했다는 것에 있었다. 무엇이 부족해서 이러한 상황이 힘들었을까? 여기서 하루키와 일반인들의 인식차가 벌어지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바로 직전과 같은 질문을 한다. 뭐가 모자라서 그럴까 하는 질문 말이다. 하루키는 무엇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넘쳐서 힘들어했다. 그는 본인이 빚은 그릇보다 넘치게 내용물이 들어차는 경우 힘들어했다. 그릇을 키우고 부와 명예는 온당히 본인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파멸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루키는 어리둥절해하며 흘러넘치는 걸 치켜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못 견뎌한다. 흘러넘치지만 조심히 그릇으로 흡수하고 결국 본인 것으로 만들었지만 그릇을 키웠다기보다는 그릇이 내용물을 흡수할 수 있도록 체질을 바꿨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현재까지 유명 작가 행세하는 데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을 단순히 유럽 여행기로 생각해서 읽으면 안 된다. 큰 이유는 여행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미가 없다. 여행을 빙자한 에세이 책이라 봐야 이해가 된다. 그리고 왜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그런 말을 할까라는 궁금증을 이해하게 된다. 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도망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더 유명해져서 돌아온다. 하지만 그 3년의 세월 동안 체질을 바꿔서 적응한다. 그 바뀐 체질이 쿨함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원래도 쿨했을 그가 더 쿨해져서 왔다. 아마 그러한 편이 본인의 정신 건강을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한 것 같다. 이후 더 유명해졌지만 이처럼 방황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 뭐 지금은 70 먹은 노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방황은 없을 것 같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기울이면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것이다.
- 본문 P502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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