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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뜨아~ 이 가족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처음에 등장한 마흔 여덟의 중년 남자가 인생에 실패하고 삶을 거의 포기 하다시피 했을 때만 해도 그리 부담스럽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뭐..그럴 수 있지.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기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고 요즘 같이 청년백수 200만이니, 이태백이니 하는 시대에 그런 자식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 아저씨가 찾아간 서울 변두리 칠순 넘은 엄마집엔 또 한명의 낙오자가 살고 있었다. 쉰 둘이나 된 그의 형이다. 누군가를 함부로 낙오자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얘기해도 주위에서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 같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변변한 직업 없이 고령의 엄마 집에 얹혀살며 빈둥거린다. 게다가 폭력, 강간, 사기, 절도라는 무시무시한 전과 5범의 타이틀은 그 인생의 부록이라고나 할까.
허~ 이쯤 되니 저 엄마 인생 참 드럽게도 꼬였구나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데 이건 에피타이저에 불과하다는 의도였는지 작가는 또 한 명의 카드를 예고 없이 꺼낸다.
짠 하고 나타난 이 집 막내딸 미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바람 피우다 남편에게 이혼당해 자신의 외동딸과 엄마 집을 찾은 이 집의 세 번째 막장녀였다.
그녀의 딸 민경인 어떻고? 걔도 참....할!말!없!다!
이렇게 이제 모두 커서 제 각각 인생의 활주로를 신나게 달리던 자식들이 하나 둘 사고를 내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될 즈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큰 울타리를 치고 있던 엄마는 스스럼없이 그곳에서 문을 활짝 열어 제끼고 자식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한다. 이제 어떻게 사려하느냐?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냐는 그 흔한 레퍼토리도 없고 이 놈의 팔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한 숨 섞인 신세한탄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더 맛나고 푸짐한 먹거리로 그들의 배를 채우고 그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다.
- 사람은 어려울수록 잘 먹어야 된다-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슬쩍 흘려보내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한 집 한 집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연 없는 집 없고, 문제 없는 집 없는 게 우리네 가족들이다. 크게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자잘한 잘못들은 부모라는커다란 방패가 견고하게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는 온유하고 평온한 모습만 보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가족을 보면, 과연 이들이 한 가족이니까 받아들이고 이해하자는 말을 꺼내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엄마는 이 자식들을 다시 한 번 세상과 연결시키려는 작업을 마다 하지 않는다. 그 옛날 이들을 뱃속에 두고 자신의 탯줄과 연결된 자식들을 소중히 보살폈듯이 이들에게 엄마의 탯줄은 여전히 강했고 유효했다. 그 탯줄 하나에 의지해 영양분을 먹고 자라날 수 있었듯이 또 다시 힘없고 철없는 아이가 된 그들에게 힘껏 자양분을 전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역시 엄마는.... 강했다.
그들은 서서히 힘을 내고 세상에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달라질 것 없고 뭐 인생역전이라고 부를만한 일도 없어 보이지만 내가 본 이 자식들은 자신의 삶의 궤도를 정확하게 찾아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왼쪽 길을 택했다면 이번에는 오른 쪽 길을 걸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처들고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길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이전보다 더 울퉁불퉁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 역시 뒤돌아보며 머뭇거리는 호사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고 이제는 남은 길이 이 길 이려니 하고 각자의 길을 걷고 또 걷기 시작한다.
이제야 그 늙은 엄마는 마음이 놓였던 것일까? 마지막까지 어미로서의 소임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한 때 사랑했던 이의 곁에서 한 많은 세상과 천천히 안녕을 고했으니. 나는 속으로 빌었다. 부디 그곳에서는 여린 아이가 되어 누군가의 품에서 실컷 어리광도 부리고 다른 누구보다 더 강하고 부드러운 보살핌을 되받으시라고...
이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좋은 소리는커녕 시도 때도 없이 음이 이탈하고 아무 때나 제각각 비명 같은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그 소리를 만들어 내는 바로 그들이 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소리가 오케스트라 뺨치는 멋진 하모니를 선사하든 옆에서 귀를 막고 싶은 소음을 만들어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저 여전히 제 자리에서 쉬지 않고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인생을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보니 은근히 멋진 고령화 가족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