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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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이 연극 무대에 오른 모양이다. 반갑다. 두근거린다. 공연이름은 <오이디푸스>다. 서울공연(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019.01.29~02.24)은 시작되었고, 3월에는 지방공연[전북(8~9일), 광주(15~17), 경기(22~23), 전남(29~31)]이 이어진다.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한 TV 프로그램은 이번 <오이디푸스> 공연에 출연하는 세 배우(황정민: 오이디푸스 역/ 배해선: 이오카스테 역/ 남명렬: 코린토스 사자역)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연극의 원작인 <오이디푸스 왕>이 수록된 책을 한 권 구입해서 읽었다.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반양장)다. 원전 번역인 점도 있지만, 가장 최근의 책에는 기존의 번역을 끊임없이 다듬은 노고가 담겨 있으리라는 점도 감안했다.

 

 왜 이 인터뷰에 이 세 사람이 등장했을까? 이들이 맡은 배역의 중요도에 따른 것일까? 어떤 다른 이유(흥행) 때문에 이 세 사람이 그 배역을 맡은 것은 아닐까? 사소한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 배우가 누구냐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왕>에서 중요도에 따라 세 배역을 고르라고 한다면, 세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런 이야기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얼마나 힘들었을까) 연기파 배우들이 천만 영화의 주역으로 드라마, 케이팝과 더불어 한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나름대로' 상당수 조연급 주연들은 그런 영화들에 다수 출연하여 어지간한 주연급 배우 부럽지 않은 조연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잔뼈가 굵은' 세월은 배고픔도 견뎌야 하는 그런 시간이다. 모든 순수예술이 그러하듯 그가 금수저든 흙수저든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활동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해서 연극판의 수준급 연기자들은 스크린이나 드라마 등에서 '새롭게' 발견되었고, 그들이 맡은 역할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아도 소비자들은 열광하고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연극판을 떠나 (시장의 언어로) '출세한' 연기자들은 행복할까? 대체로 (각종 인터뷰들을 살피면) 연극무대가 본인의 본 무대이고 스크린과 TV는 연극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스크린에서 성공하기 위해 연극 마당에서 고생하면서 기예(機藝)를 갈고 다듬을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과 생계를 위한 노동이 일치하지 않은 삶이 거의 대부분인 때에 새삼 배우들만의 문제인 양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연극은 시간예술(공연예술)이면서(리플레이는 없다) 일정한 공간(무대와 객석)을 필요로 한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 NG도 재촬영도 편집도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PLAY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들로서는 같은 내용을 연기할 때마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공연 회차가 늘어날수록 연기는 완숙해질 것이나 그렇다고 자만은 금물이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배우는 관객들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때문에 부담스럽지만 덕분에 현장 반응을 직접 그리고 즉시 확인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대면하는 직거래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일종의 대화다.
연극 무대야말로 연기자들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훌륭한 연기학교이고 그 참여 자체가 예술행위이며 작품의 일부다. 그렇기에 배우라면 연극 무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에 행하는 예술이기에 참여하는 관객들의 입장료 부담은 불가피한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생산한 작품이 보다 많은 소비자들을 만나는 점접 형성에서 연극은 스크린(TV)을 따라잡을 수 없으며,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연기자들에게 연극 무대는 떠나 있을 때도 늘 향수의 대상이고, 귀향을 다룬 소설(대체로 성장소설)이나 영화처럼 가끔씩 찾는(무대 위든 객석이든) 연극 마당에서는 회한이 가득하지 않겠는가? 

 

이번 <오이디푸스> 공연에서 황정민은 오이디푸스 역을 맡았다. 배해선(이오카스테 역)과 남명렬(코린토스 사자역)도 출연한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배우들만 거론하면 세 사람이다. 그런데 이 연극의 원작자인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최초로 비극의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를 두 사람에서 세 사람으로 늘린 개혁을 한 사람이다. 그리스 비극을 얘기할 때 3대 비극 시인(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들의 작품과 그들의 역할을 이야기 하는데, 아이스퀼로스는 제2배우를 추가함으로써(이전에는 한 사람이란 얘기다) 음악(노래)를 담당하는 코러스(장) 없이도 배우들만으로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아이스퀼로스에게 작시법을 배운 소포클레스가 제3배우를 추가한다. 오늘날의 연극 무대를 생각하면(물론 모노드라마도 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드라마의 출발은 이러했다. 아이스퀼로스를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로 부른다. 또한 소포클레스는 연극 무대의 배경을 도입했고, 비극 3부작(축제 중 진행된 비극경연에는 세 시인이 출전하였는데, 저마다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사튀로스극을 세트로 무대에 올렸다)에서 3부작 모두가 하나의 주제를 연속해서 다루는 연속 3부작(아이스퀼로스의)의 기법을 버리고 개개의 비극이 그 자체로 완결되도록 했다. 이것은 인간 운명의 주역을 신이(아이스퀼로스처럼) 아닌 인간으로 보는 그의 인생관과 무관하지 않다.

 

어쨌든 이러한 비극 개혁에 기여한 점만으로도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라고 보는  데에 지장은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위대한 창조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반성적인 문헌학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비극의 기원에 대한 물음을 묻기 시작하였지만-김상봉: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322면)는 <시학>에서 비극 위주로(서사시에 대한 언급이 일부 있다), 예술론을 전개하는데, <오이디푸스 왕>을 최고의 작품, 가장 비극다운 비극작품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제3배우의 등장은 <시학>에서 제시하는 비극의 6대 구성요소(플롯, 성격, 조사措辭, 사상, 볼거리, 노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플롯(사건의 짜임새) 그리고 성격(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 결정되지만, 행복과 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내용'을 담기에 기존 '형식'(2명의 배우라는)은 한계로 작용했고, 보다 비극다운 비극을 위해 그 형식을 파괴한 것, 그것이 제3배우의 등장이다. 무대배경(미술) 도입도 기존 무대를 일종의 '마당극'에서 '무대'를 독립시킨 것이다(대상화 함). '연속 3부작'의 틀을 깬 것도 혁명이다. 그 해 축제의 비극 경연에 출전한 세 명의 시인이 비극 세 편씩, 9편의 비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전에 비해 그 주제가 얼마나 다채로웠을까,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top10 다음에도, 인간 세상을 읽는 키워드는 숱하게 널려 있다. 

 

'제3배우의 등장'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잠시 살펴보자. <오이디푸스 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가 등장한 이후(924행~)부터다. 이 사자는 실제로는 양부이지만 (오이디푸스가) 친부로 알고 있는 코린토스 왕의 사망 소식을 가져온다. 이제 코린토스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오이디푸스라는 희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친부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어머니)을 하게 된다는 신탁 때문에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하다가 위기에 처한 테바이를 구하고(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그 상으로 공석인 왕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전왕(라이오스)의 왕비(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했다.] "사자는 오이디푸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그를 모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오지만, 그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시학> 11장)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와 사자(가끔 코러스장이 끼어들지만 그는 배우가 아니다), 세 배우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한 사람을 빼는 것이 가능할까? <시학>은 이 대목을 '급반전'(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 또한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급반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발견은 급반전과 결합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비극이 그런 행동의 모방이라는 것은 이미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불행해지느냐 행복해지느냐 하는 것도 발견과 급반전으로 야기된 사태 변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시학> 11장)

 

재판은 판사와 변호사(원고)와 검사(때론 피고측 변호사)라는 세 그룹의 활동으로 진행된다. 최소의 조건이면서 더 이상은 군더더기다. 증거가 우선이다.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경우는 심판이 있고, 관계자 둘을 직접 만나게 하는 삼자대면을 해야 그 증언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런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최종적인 판사의 판결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다'라는 결론은 못 내리고 '그렇게 보인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국정농단(행정부)에 이어 사법농단까지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삼권분립은 회복불가할 정도로 오염된 상태로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얘기다.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비극 무대에 제3의 배우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정점을 찍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도 소크라테스의 발언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끔씩 인용되는 고발자(원고)의 발언이나 술렁이는 객석(배심원들)을 진정시키는 소크라테스의 당부 등을 감안하면 세 그룹이 등장하는 비극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지방공연이라도 가까이서 상연될 이번 <오이디푸스 왕>을 꼭 보고 싶다. 해서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아마도 천병희의 '오이디푸스 왕'만을 기준으로 할 때 그의 원전번역은 이번이 최소한 네 번째가 아닐까. 단국대 출판부(5편 수록)에서, '소포클레스비극전집'(숲, 현존7편 수록)으로, 다시 '그리스비극걸작선'(여기에는 <안티고네>도 실림> 그리고 이번까지 개정판을 배제하고 최소한 네 번째다. 천병희는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원전번역한 번역가다.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비극의 모범답안으로 삼는 그리스 비극의 정점이다. 책을 새롭게 펴낼 때마다 번역가 천병희는 끊임없이 기존 번역을 다듬고 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런 흔적들을 발견하였지만 이는 [가능하다면]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이번 연극 <오이디푸스>의 대본도 궁금하다(가능하다면 이것도 또 하나의 글감이..).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크게 세 부분 구성인데, 두 편의 비극과 비슷한 분량의 해설(『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1)고전학자 베르낭과 2)역사학자 르네 지라르 그리고 3)장-조셉 구스(Goux)을 따라가며 '오이디푸스 문제'를 개관한다. 그리스 비극을 좀 읽었다는 독자들에게도 새롭게 오이디푸스를 만나게 하지 않을까? 특히, 구스(Goux)의 견해는 흥미롭고 진행형이다.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철학(자)의 탄생을 알렸다면, 앞서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인간의 탄생을 선언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플라톤은 오이디푸스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초상화에 드리워진 오이디푸스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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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2-14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병희 선생님이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라는 책에서 다시 한번 번역을 가다듬은 모양이군요. 이번에 무대에 올릴 연극도, 새로 나온 번역본도 모두 궁금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이디푸스 왕』을 생각할 때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밝힌 이야기가 늘 마음에 걸리더군요. 오이디푸스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주장 말입니다. 그걸 믿어야 옳을지 지어낸 얘기로 흘려야 옳을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더군요.(☞ http://blog.aladin.co.kr/oren/6827813)

timeroad 2019-02-15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지방공연이라도 꼭 챙겨 볼려고요, 대본을 구할 수 있으면 좋은데.. <역사>를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워낙 설화가 많을 뿐더러, 그것이 또 읽는 재미이기도 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투퀴디데스의 <역사>와 바교대상이 되나 보니, 신빙성에 대한 논의가 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