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떠나는 나날 - 사랑이 끝나고, 30일 동안
하워드 브론슨.마이크 라일리 지음, 선우윤학 옮김 / 큰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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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모두는 이별을 한다.

어떤 형태의 이별이든 그 순간 아프다. 사랑했기에 아프고, 좋아했기에 아프고,

또한 미워했기에 아프다. 그 아픔을 회복하고 치유하는데 여러날이 소모된다.

안녕이라고 말하고, 두사람이 다시 만날 가능성이 닫히고, 차갑게 이어지는 침묵들과

먹먹함은 이별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표적 표현이다. 이 책은 그런 이별에

대한 치유와 회복 내지는 극복을 다루고 있다.

 

내용중 신뢰하기라는 챕터가 있다.

이별의 대상에 대한 되돌아 봄이다. 정말 그를 믿었는가? 혹은 그냥 믿는 척만 했는가?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진짜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어찌보면

조금 아플 수 있는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뢰를 바탕으로하는 관계는

조금은 더 믿을 수 있는, 조금은 더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신뢰의 끈을 끊어 버렸는지에 대한 물음은 어쩌면 누가 먼저 사랑을 멈췄는지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다. 마주치기 싫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의 대면이지만 여기에는

이러한 관계 점검을 통해 반복되는 실패를 조금은 미연에 방지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그러면서 자신 스스로 조금은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상대방에 대해 그도 나와 같이 약한

존재이고 실수할수 있는 존재이고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조금은 더 좋은 관계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가 사랑에 푹빠져 행동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모든것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야 말로 불확실성이라는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사랑은 세상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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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예술 -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침묵을 배우다
알랭 코르뱅 지음, 문신원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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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침묵이 금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절제된 언어인 침묵, 오래전 일본의 지성인 엔도 슈샤쿠는 "침묵"이라는

책으로 종교적 신념과 이상에 대해 도전했던 기억이 난다. 백마디 말보다 때론 침묵이

훨씬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요즈음은 말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마다

자신을 밝히며 이야기하기에 급급한 것을 보며 조금은 천천히 가더라도 정도를 걷기

위한 침묵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나만의 생각을 가져 본다.

 

특별히 침묵의 절대자라는 챕터에서 소개하는 요셉의 침묵은 독특하다.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 그는 침묵의 가장이다. 베들레헴에서 요셉은 입을 다물었고 성서속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저 부인인 마리아의 말에 따르는 그냥 침묵의 아이콘이다.

심지어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요셉의 침묵은 귀를 기울이는 마음,

절대적인 내면이다. 이 사람은 평생 예수와 마리아 만을 바라보았고 그저 자신의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한 그냥 평범한 가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그의 삶에 절대적 침묵과 말의 자기

초월이라는 찬사를 보내며 보쉬에가 바친 침묵의 근엄함과 겸손함이라는 이중찬사를 소개한다. 

그의 침묵은 말없는 외침이고 자기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이 예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예수에게만 집중하게 한다. 어쩌면 조금은 빗나갈수도 있을 여지

마저도 막아 버린다. 그냥 예수만 이야기 할 수 있는 토대를 그의 침묵을 통해 만들어 낸다.

 

핸리 데이비드 소로의 "침묵만이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라는 글귀가 생각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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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한 마디 따라 쓰기 노트
박상용 지음 / 소라주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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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련 무역업무를 하던 시절 나름 열심히 배웠던 중국어인데 사용하지 않은지

벌써 10여년이 자나다 보니 어느새 기억나는 문장이나 단어가 현저히 줄어들어 말

몇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를 겪게 되고 보니 세월의 무상함과 나 자신의 노력

부족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중 이 책을 통해 매일 한문장씩 관용어들을 배워가면서 예전에 공부했던 것들이

조금씩 생각나는 기쁨도 맡보게 되었고 새삼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특별히

잘 사용하면서도 실수 하기 쉬운 몇개의 관용어구들은 새롭기까지 했다.

 

그 중 하나가 十三点이다. 단순하게 사용하면 그냥 오후1시 즉 13시인데 관용적 표현으로는

잘못된 시간을 가르키는 말로 좀 덜 떨어진 사람에게 조롱하는 소리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종을 치는 시계가 있던 시절 시계는 종을 한번에서 열두번까지 치는데

시계가 고장나서 13번을 친다라는 의미에서 잘못된 시간 혹은 좀 모자라거나 덜 떨어진 사람을

가르켜 쓰는 말이다. 사족이겠지만 어리석음을 가르키는 한자인 痴자의 획수가 13획인것도

흥미롭다.

또한 다른 사람의 양 소매 사이에 소매치기의 손이 들어와 손이 셋이 되는 경우를 보고 단어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三只手라는 단어도 재미있다. 세상에 손이 세개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다른 사람의소매 속에 손을 넣어 손이 세개가 되게 만드는 모습을 보며

관용어를 만들어 내는 중국인들의 해학이 드러나는 단어 이기도 하다.

물론 단어들중에 간자체를 쓰는 단어들이 많아 낯설게도 느껴지긴 했지만 아주 오랫만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 글자 공부를 하는 기분이 들어 나름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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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찰스 스펄전의 위대한 설교
찰스 스펄전 지음, 김주성 옮김 / 두란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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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처하는 우리가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예수일 것이다. 그 예수로 인해 우리의 삶이 살아지고 그 예수 때문에 우리의 삶이 격동되고 그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변화됨이 마땅한데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 예수가 없다. 아니 혹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만든 예수를 정말 예수 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스펄전은 그런 우리의 신앙에 도전한다. 껍데기는 가라. 가짜 예수는 가라. 십자가의 복음이 진리이며 이 복음이 아닌것은 가짜다 라고. 책을 읽으며 영국의 심장을 울림직한 충격이 전해진다. 그런 충격과 감격이 오늘날 강단에서 사라졌음이 안타깝다.

 

특별한 내용이 하나 있다.

"들리면"이라는 말로 죽음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떻게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12:32-33) 죽음을 표현하는데 선택한 단어가 "들리면"이다. 못박히면이나 달리면이 아니라 '들리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헬라어로 그 의미는 높임이다. "내가 높여지면, 내가 높이 들리면"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 오랫만에 보는 해석이다. 예전 학부시절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하여 설명하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비록 수치와 조롱의 표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감당하심으로 영광과 소망이 되셨고 그 영광과 소망으로 인해 우리에게 나아갈 바와 희망을 선물하셨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그분이 지심으로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되었다. 다른 사람을 죽여 영광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에 비해 그리스도는 자신을 죽였다. 금면류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비해 그분은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남들위에 높아지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낮아짐으로 겸손함으로 그의 영광을 대신하셨다. 오히려 자기 몸을 굽혀 그것을 정복하신다. 모두가 회피하는 형벌을 십자가라는 최악의 형벌로 감당하시며 자신의 목적인 사랑을 이루어 가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이 전해졌고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 그 사랑을 완성하신다. 그는 낮아지심으로 영광을 획득하시고 섬김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신다. 누가 그러라고 한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그것을 보여준다.

 

바로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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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세계기독교고전 33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종흡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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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대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떤 의미를 가진 글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방법과 혹은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그것들을

해석하며 이해해 나간다. 검증되지 않은채 말이다. 무엇보다 성경은 철저한 검증과

확인이 필요한 책이다. 왜냐하면 그 글이 쓰여진 시기와 상황과 문자들의 특성에

의해 점이 하나가 찍히고 안 찍히고에 따른 해석이 달라지며 때로는 문장전체의

해석이 달라지기 떄문이다. 이글은 그러한 오류에 대한 어느정도의 가이드 라인을

만들어 주는 책이다. 고로 솔직히 조금은 난해하다.

 

책을 읽어 내려 가는 내내 저자가 주목했던 한가지를 발견한다. 그거은 "사랑"이다.

기독교하면 사랑의 종교다. 비록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세상의 사랑과 돌봄의 대상이

되어 버린 듯해 아쉽기도 하지만 어쨌든 2000년전 예수는 사랑 때문에 이땅에 오셔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시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사랑때문에 다시 살아

나셨다. 그런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도 빼놓지 않는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 만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두가지를 선지자와 율법과 강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자신에 대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 할 수 없다고 전제 한다. 그러면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분명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음을 이야기 한다. 많은 교회에서 설교하며

메세지를 전하지만 미진했던 바로 그 부분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7,39) 분명 이 말씀엔 네자신을 사랑하라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에게 유익을

주려고 한다. 물론 더 나은 목적과 목표를 위해 고난을 겪고 난관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

마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닌가. 이렇듯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줄

알며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선포한 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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