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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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공감할 수 있는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면 분명 와닿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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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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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테러> 책표지에는 붉은색, 보라색, 녹색의 끈이 얽혀 하나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듯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데, 저자 브래디 미카코가 가네코 후미코, 에밀리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 이 세 여자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등장시키며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었으니 이 책을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역시 이런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소개되는 세 여성은 각자 무정부주의자(가네코 후미코), 여성 참정권을 위해 무력 투쟁하는 서프러제트(에밀리 데이비슨),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봉기하는 민족주의자(마거릿 스키니더)로 눈앞에 두고 있는 목표는 달라 보일지라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여성이 명백하게 2등 시민에 지나지 않았을 당시 평등을 추구하며 자신의 신념을 용감하게 행동으로 옮긴 여성들이라는 분명한 공통점으로 우리를 고무시키는 역사적 인물들이다.

(온라인 서점 포인트로 받을 수 있는 타투 스티커와 함께)


먼저 가네코 후미코는 영화 <박열> 때문에 이름을 아는 사람이 꽤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나만해도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 때문에 가네코 후미코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 박열이 가네코 후미코의 동지이자 연인이어서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도 영화에서 적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 <여자들의 테러>에서도 가네코 후미코는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막장 드라마에서도 혀를 내두를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아버지는 후미코의 어머니를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처제와 삼각관계까지 만들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의 재혼을 반복했다.
그런 부모에게서 떨어져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강탈했던 일제 강점기에 할머니와 함께 조선 부강으로 건너왔지만 손녀가 아니라 하녀로 취급 받으며 지냈고, 삶이 너무 힘들었던 후미코는 열세 살 나이에 투신자살하고자 금강변에 서기까지 한다.

애초에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았던 무호적자로 국가 시스템 바깥에 있었으며,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해 있었던 적이 없었던 가네코 후미코가 무정부주의자 아나키스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1923년 간토대지진이 발생했고,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거나 조선인이 방화나 습격을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가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도 이렇게 썼다.
(...)
마쓰이다에서 병사 23인에, 구경꾼 10명 남짓이 조선인 하나를 쫓아가는 것을 보았다. 바로 돌아온 한 사람이 차창 아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였다.” 너무나 쉬웠다.

p.180



이때 정부도 반정부 사상을 가진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노동 운동가들을 박해하며 검거하고 살해했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동지이자 연인 사이였던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도 (이 둘은 생각보다 훨씬 담백한 사이였던 듯하다) 대지진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검속되었다.

일본 민중들이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때는 검속되는 것이 박열에게는 좀더 안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후에도 경찰은 둘을 계속 붙잡아두고는 학살을 정당화 하는 데, 그리고 학살에 책임지라는 국제 사회의 추궁에 곤란해지자 조선인이고 무정부주의자잉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게 경찰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재판소에 섰을 때 전향은커녕 자기 사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장으로 쓰는 가네코 후미코의 대범함에 놀랐다.


(...) “당신은 황족에 대해 평소 존칭을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오. 천황 폐하를 환자라고 불렀습니다”라고 했다. 황태자는 “도련님”, 그리고 다른 황족은 “안중에 없습니다”. 대신 등 다른 관료들은 유상무상(어중이떠중이)”, 경시청의 관료는 부르주아의 충견이므로 “불독” 혹은 “개새끼”였다며 후미코는 두려움 없이 이야기했다.

p.188



다음으로 에밀리 데이비슨은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WSPU)에 소속되어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한 무력 투쟁을 하는 서프러제트로 활동했다.

사실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았기에 서프러제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고 WSPU의 지도자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책에서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아닌 에밀리 데이비슨을 소개했는지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에밀리 데이비슨이 바로 엡섬 더비에서 달리는 경주마 앞으로 뛰어들었던 바로 그 서프러제트였다는 것을 알고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프러제트는 무력 투쟁 저항 활동으로 미디어의 주목을 끌어 세간에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전략을 썼는데, 에밀리는 그 전략에 적극적인 것 이상으로, WSPU에서도 꺼려할 정도로 여성 참정권을 위한 행동이 과격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다른 서프러제트와 마찬가지로 교도소에 여러 번 드나들었고, 감옥에서의 단식투쟁 때문에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운 강제 음식 주입을 당하거나 물대포에 두드려 맞는 등의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무엇보다 마지막 활동, 국왕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선전하기에 안성맞춤으로 큰 이벤트인 엡섬 더비에서 경주마들이 달리고 있는 경마 코스로 걸어나와 국왕의 말과 충돌했던 일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에밀리가 경마 코스로 걸어 나올 때에는 손에 들려 있었으며, 국왕의 말과 부딪히고 쓰러진 에밀리의 외투 안쪽에도 있었던 것은 WSPU의 깃발이었다.

나는 비록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한 서프러제트가 여성 참정권 운동을 알리고자 경주마가 달리고 있는 위험한 경기장에 뛰어들었던 장면은 영화의 인상적인 몇 장면 중 하나로 아직도 기억한다.

에밀리가 튀어나왔던 곳은 세 회사의 카메라가 찍는 지점이었으므로 위 장면의 실제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에밀리가 말과의 충돌까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동차에 부딪히는 것과 다름 없다는 말에 부딪히는 위험을 감수하고 행한 일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에밀리의 행동이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에게 과연 죽을 마음이 있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그것은 본인밖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에밀리에게는 무슨 일이든 벌여서 상황을 돌파하려는 시도가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 아닐까? 에밀리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졸업 학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5년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악마 취급을 받으면서 몸을 바쳐 싸웠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은 진전되지 않았다. 그저 죄인으로 수감되어 고문이나 다름없는 강제 음식 주입을 당하고, 몸과 마음이 극한까지 고통받을 뿐이었다.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외쳐도 여자는 언제까지나 2급 시민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이 상황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돌파한 다음에야 내가 원하는 삶이 있다.
돌파만 할 수 있다면 그 앞으로 펼쳐지는 신세계에 자기가 있든 없든 에밀리에게는 상관없었던 것 아닐까? 만약 자기가 그곳에 없더라도 거기에는 다른 여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p.138-139



마지막으로, 마거릿 스키니더는 ‘아일랜드 사람이 쓴 아일랜드 역사’ 책을 읽고 부모의 조국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뛰어난 저격수로 영국으로부터의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인물이다.
역시 멀지 않은 과거에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역사가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아일랜드 독립의 역사에 이입이 안 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마거릿 스키니더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과정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리고 뛰어난 저격수로서의 능력도 있고 영국군의 총알 세례를 감수하며 자전거를 타고 이동해서 폭탄을 던지는 일에 자원하는 용기를 가진 마거릿도 대단했지만, 여기에 멋진 여성을 한 명 더 발견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콘스턴스 마키에비치로 마담이라고 불렸고,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등원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영국 하원에서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선출되고, 또 서구에서 처음으로 여성 장관이 된 인물이다.

하지만 콘스턴스 마키에비치가 멋지다고 생각한 이유는 저격의 명수로 칭송받는 실력에다 경찰에게 미소 지으며 총구를 겨누는 박력있는 모습, 여자인 자신도 전령이 아니라 병사로서 아일랜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싶다는 마거릿을 저격수로 써줄 것을 건의해서 승낙을 얻어낸 배려심, 마거릿에게 자신의 군복보다 훨씬 좋은 직물로 군복을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거릿이 부상을 입고 돌아오자 마거릿이 총을 맞은 현장에 가서 멋진 실력으로 원수를 갚고 왔다는 장면에서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거릿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마담은 어느새 방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병사 한 사람을 데리고 마거릿이 총을 맞은 현장으로 간 것이다.
마딤과 동행한 병사는 방화 목표물이었던 건물 옆에 죽어있는 17세 소년의 사체를 일부러 안아 올렸다. 적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생각대로 영국군 병사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저격수는 2명이었다. 마담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두 발의 총탄으로 두 사람 다 사살했다.
“원수를 갚고 왔어.”
머거릿의 침대 옆으로 돌아온 마담은 상냥하게 말했다.

p.194



이렇게 <여자들의 테러>에 소개되는 목숨을 건 여성들의 약 100년 전의 투쟁은 여전히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아일랜드에 공감할 수 있는 역사를 가진 현재의 대한민국 여성의 마음에도 분명 와닿을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 에밀리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는 물론이고 책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 또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중요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앞으로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에는 한국어판까지 친절하게 적혀있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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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천재성 - 역사에서 간과되었지만 세상을 변화시킨 힘
제니스 캐플런 지음, 김은경 옮김 / 위너스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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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앞부분에 누가 가장 천재인 것 같냐는 질문에 미국인의 90%는 남자라고 대답했으며, 여성 천재를 말해보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마리 퀴리가 유일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는데, 사실 나도 이 조사 결과와 크게 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재를 떠올리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훨씬 많이 떠오르고, 그 숫자를 대략이나마 비교해보면 열 배는 차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천재인 여성보다 천재인 남성을 훨씬 많이 접했고, 그 때문에 천재 여성에 목이 말랐다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어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여성의 천재성>은 천재 여성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에서 더 나아가 바랐던 것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먼저 여성의 천재성을 말하고자 한다면 천재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제니스 캐플런은 점심 식사 자리에서천재의 핵심 조건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천재란 양성되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천재라” 그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전 그게 비상한 능력과 명성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 같아요.”
놀란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며, 내 포크는 공중에 그대로 멈추었다. 명성이 있어야 한다고?
(...)
그 여성들은 비상한 재능을 지녔지만 자신의 곡을 연주할 관현악단 —과거 당시 모두 남자였다—을 구성할 수 없었다. 물론 그래서 그녀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베토벤이 자신의 협주곡을 집에서만 연주했다면 천재로 여겨졌을까?
(...)
“만일 그게 맞는다면 천재 여성들은 왜 그렇게 적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질문하며 대답을 짐작했다.
찰스는 한숨을 쉬더니 내 짐작과 맞는 대답을 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그 등식의 절반만 충족했어요. 그러니까 능력은 있고 명성은 없었던 거죠. 자신의 능력에 대해 주목받지 못했던 거예요.”

p.35-36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이 사례의 주인공은 다섯 살 때 왕족을 위한 공연을 했다는 신동이었던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아닌 그의 누나 마리아 안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위와 같은 이력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 덕분에 천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만 같지만, 거기에 더해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음악 교육을 받으며 수많은 시간 연습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유럽 순회공연에 가는 등, 전문적으로 양성된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자, 이러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는 마리아 안나라는 누나가 있다고 했다.
의아하게도 마리아 안나도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웬만큼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마리아 안나는 음악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저자가 본 기록에서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마리아 안나를 존경했으며 누나에게 음악을 배웠을 정도로 마리아 안나의 재능은 뛰어났다고 했으니 마리아 안나가 타고난 재능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마리아 안나는 천재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까?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마리아 안나가 10대가 되자 딸이 연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마리아 안나는 빈과 파리에서 칭송받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결혼을 목표로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그 이후에 마리아 안나는 홀아비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그러한 삶에 마리아 안나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꼈는지는 모르겠다만 마리아 안나의 음악적 재능이 묻혀버렸다는 것은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마리아 안나가 아버지와 전체 사회에 맞서고 자신의 곡을 계속 연주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진정한 천재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에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면 반항자의 냉정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심한 것 같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에게 세상의 도전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그저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뒀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누나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p.54


이제 그동안 천재로서의 여성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짐작이 갈 텐데, 저자는 이렇게 천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만으로, 혼자의 힘으로 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말하며 저자 개인의 경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천재 여성에 대한 조사와 천재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내가 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했던 것처럼, <여성의 천재성>을 읽으면서 수학, 과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가진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애둘러서라도 자신의 천재성을 세상에 내보인 이들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어 삶에 자극을 주고 희망이 되기도 하며, 앞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마이클 벌랜드가 천재에 대한 조사에서 던졌던 질문의 답을 보면 이 문제가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남성들에게 혹시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15%의 남성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단 한 명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조사에 응답한 남성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능력에 망상을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보여준다. 뭔가가 실현 가능하다고 믿어야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p.16


그렇다면 이 책은 여성들에게만 유익한가 묻는다면 나는 남성들에게도 필요한 책이라고 대답하겠다.
여성의 천재성이 묻힌다는 것은 여성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손해이기 때문이다.

만약 앞서 말한 마리아 안나가 음악적 재능을 계속해서 발휘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지금 듣는 음악은 한층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핵분열을 발견하여 물리학계를 뒤집어 놓았던 리제 마이트너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벨상을 빼앗기기 이전에 핵분열을 발견할 기회조차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하면, 그동안 편견 속에서 간과되고, 무시되고, 묻히고,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을 여성들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화가날 뿐만 아니라 현시대를 사는 인류로서 아쉬운 일이 아닌가.
그러니 자극과 격려가 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천재성을 살펴보고 존중하고 장려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이 책은 여성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여성의 천재성>을 읽으면서 서평에는 1/10도 인용하지 못할 정도로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은데, 내 손가락이 부르트더라도 밑줄 그은 부분을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올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저작권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며, 그냥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간과한 천재는 당신의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일 수도 있고,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일 수도 있고, 당신의 딸이나 손녀일 수도 있다.


나는 젊은 작가 쉴라 헤티 Sheila Heti의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 영향력 있는 평론가는 “문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라며 그녀를 극찬했다. 그녀의 소설 <사람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How should a Person Be?>의 초반부에서는 천재 여성이라는 주제를 묘하게 비틀어서 말한다.

“여성이 되는 것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천재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예시가 아직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 천재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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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의 땅 1부 4 : 어둠의 그림자 용기의 땅 1부 4
에린 헌터 지음, 윤영 옮김 / 가람어린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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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개코원숭이 스팅어를 해치우고 위대한 전투가 끝났지만 위대한 부모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생존을 위해서만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어겨 동물을 살해한 뒤 가슴을 갈라 심장만을 가져간 흔적이 남은 사체가 용기의 땅 곳곳에서 발견되는 의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용기의 땅 4 어둠의 그림자>는 위대한 전투 이후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위기를 맞은 용기의 땅과 또다시 각자 갈등을 마주한 주인공 삼총사 이야기의 서막을 열었다.

<용기의 땅> 시리즈는 사자 피어리스, 코끼리 스카이, 개코원숭이 쏜, 이렇게 삼총사가 주인공이지만, 또다른 국면을 맞이하는 4권에서는 책표지를 장식한 개코원숭이 쏜의 이야기가 돋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용기의 땅의 정신적 지주인 위대한 영혼이 개코원숭이 쏜에게 깃들게 되면서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된 일은 쏜 자신에게 가장 놀라웠겠지만, 전 위대한 어머니의 손녀인데다 위대한 영혼이 잠시 머물기도 했으며 선한 마음과 지혜로운 코끼리가 될 싹이 보였던 스카이가 위대한 어머니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놀랐다.

하지만 이전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위대한 부모를 사칭한 동물들과는 달리, 위대한 부모는 용기의 땅 동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만큼 그 어깨에 짊어지게 되는 책임감의 무게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아는 쏜은 자신이 위대한 아버지가 될 만한 재목이 아니라며 위대한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한다.

거기에다 쏜이 속해있는 개코원숭이 빛나는 숲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도 비어 있는데 그 자리에 앉을 개코원숭이로도 쏜이 유력하니, 이쪽이든 저쪽이든 쏜에게는 부담되는 일뿐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개코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까지는 할 수 있어도 용기의 땅의 위대한 아버지 역할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쏜의 입장이다.

한편 사자 피어리스는 아직 풍성한 갈기를 갖지는 못했지만 잘 성장하고 있는 중이며, 누나 베일러를 포함한 사자 몇 마리로 이루어진 사자 피어리스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사냥꾼인 베일러에게 존중 받지 못하는 것 같고 무리의 다른 사자들도 자신을 우두머리로 존경하지 않는 것 같아 자신의 역량에 아쉬움을 느끼던 중에 베일러의 짝 마이티가 무리에 들어오게 되면서 갈등이 깊어진다.
마이티는 갈기가 풍성한 수컷 사자로 사냥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해서 무리의 다른 사자들은 현재우두머리인 피어리스보다 마이티에게 더 의지하는 듯한 데다, 피어리스는 신체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않아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위험에 빠진 친구를 바로 구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코끼리 스카이가 속한 코끼리 스트라이더 가족은 위대한 어머니와 레인이 죽은 뒤 코멧이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코멧은 아직 코끼리 가족을 이끌기에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스카이와 스트라이더 무리는 위대한 영혼의 부재에 슬퍼했다.
그리고 자신이 스팅어를 죽이며 자연의 법칙을 어겼다는 생각이 스카이를 괴롭혔고, 수컷은 스트라이더 가족 무리에 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기를 함께 헤쳤왔던 친구 록과 만나지 못한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결국 스카이는 스트라이더 무리가 떠날 때 함께 가지 않고 남기를 선택했고, 무리와 떨어진 이후 친구 치타 러쉬가 의문을 죽음을 당하면서 남긴 새끼 치타도 두 마리도 챙기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그토록 찾아다녔던 친구 록을 다시 만났고, 이들이 스카이의 새로운 여행 동료가 되어 여행길이 외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위대한 전투가 끝나면 용기의 땅 삼총사는 어떻게 지낼지 궁금했기 때문에 이번에 위대한 전투 이후로 시간이 흐른 뒤의 용기의 땅 삼총사를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그리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개코원숭이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된 것, 그리고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며 필사적으로 친구들에게 자신에게 위대한 영혼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 위대한 아버지의 능력으로써 쏜에게 발현되어 마치 빙의가 된 것처럼 다른 동물이 처한 상황뿐만 아니라 감각과 감정까지 느끼게 되는 환영, 그 능력으로 인해 오히려 위기에 처하는 쏜,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만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동물을 사냥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니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개코원숭이 무리 빛나는 숲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용기의 땅의 정신적 지주인 위대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쏜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안 그래도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불안하던 차에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로 제격인 마이티가 등장하여 심경이 복잡해진 피어리스의 입장에도 이입이 되어서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또 스카이와 귀여운 새끼 치타 두 마리의 관계성도 좋았고, 삼총사가 이전보다 성장한 만큼 4권에서는 로맨스적인 요소도 돋보였는데, 아니, 코끼리의 로맨스가 이렇게 간질거릴 일이냐고요.


“스카이, 난 네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잘 해냈어. 용감하게 해내면서도 따뜻한 친절을 잃지 않았어. 항상 정의로웠지. 그래서 내가......, 너에게......, 마음이 끌린 거야. 그래서 이 감정을......, 꼭 표현하고 싶었어. 아, 미안해.”

p.196


“그런데 왜? 왜 나와 함께하고 싶은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나의 짝이 되면 힘들 거야. 난 다른 코끼리들과는 달라. 난 무리와 함께 지내지 않아. 다 같이 떠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난 우두머리의 말을 어겼어. 그리고 위대한 영혼이 내 안에 깃들어 있었잖아? 언젠가 또 내가 필요한 순간이 올 테고, 그땐 또 그 일을 해야만 해. 거부할 수 없는 일이야.”
스카이는 눈을 내리깔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록......,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어. 난 자연의 법칙을 깼어. 살해를 저질렀잖아.”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지던 그 순간, 록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떨리는 코로 스카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스카이, 내가 그걸 다 모르는 줄 알아? 너의 그런 점 때문에 네가 특별한 거야. 그리고 너를 특별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 때문에 내가 널 사랑하는 거야, 스카이 스트라이더.”

p.198


<용기의 땅 4 어둠의 그림자>는 이전의 세 권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서 5권을 더욱 기다리게 된다.
<용기의 땅(Brave Lands)> 시리즈의 작가 에린 헌터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사들(Warriors)>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Survivors)>, <모험을 찾아 떠나는 자들(Seekers)> 시리즈에서 모두 동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는데, 그렇게 기나긴 집필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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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 태조에서 순종까지, 왕의 사망 일기
정승호.김수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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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조선 팔도를 통틀어 왕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서 지낸 사람이 있었을까?
거기에다 조선의 왕은 매화, 즉 대변까지 확인 받으며 사생활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철저하게 건강 관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보니 생각외로 각종 질병을 앓지 않은 왕이 없다.

본문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는 책의 저자 이력이 특이했는데, 공동저자 두 명 중 한 명은 관광학/법학/심리학 박사이며 많은 저서와 연구 논문을 썼지만 책날개에 소개된 저서는 또 모두 부동산 관련 책이었고, 다른 한 명은 호텔관광경영학 박사이자 과 교수로 관광/호텔/외식 관련하여 활동하며 잡지에 커피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저자 둘 다 수상 이력이 많고 관광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책의 주제와 밀접한 역사나 의학과 관련된 이력은 보이지 않아서 어쩌다가 조선 왕의 질병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해당 분야 전문가가 쓴 글이 더 전문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걱정을 조금 했지만, 한국연구재단 학술/인문사회사업의 지원을 받아 조선에 대한 책을 여럿 출판한 인물과사상사에서 출판된 책이고, 한의학과 의학 분야 박사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으며 (추천사를 쓴 네 명 중 세 명도 의학 분야 종사자다), 공동저자 중 한 명이 외식산업분야 전문가로서 조선 왕들의 식습관, 음식과 술에 대한 부분에서 전문성을 발휘했다고 하니 이 책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던 이력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어 처음에 했던 걱정은 떨치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본문을 직접 읽어보니 (의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마치 의학 전문가가 쓴 것처럼 의학적 지식과 그에 따른 추론 과정이 타당해보였고, 책을 쓸 때 참고한 논문과 단행본 그리고 고문헌도 말미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에서 저자는 조선의 1대 왕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에 한 명을 더 더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까지, 총 스물일곱 명의 왕들이 앓았던 질병과 죽음의 원인을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문서에 적힌 증상과 왕의 삶을 바탕으로 하여 추리한다.


사망 하루 전인 6월 29일은 가장 긴박한 하루였다. 나인들이 말하기를, “상에서 한참 잠드신 뒤에 갑자기 열에 괴로워하시는데 이따금 헛소리를 할 뿐 아니라 기운이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라고 한다.
이러한 증상은 뇌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뇌졸중의 전조 증상으로 갑자기 한쪽 팔다리에 힘이 없거나 저리고 감각이 없거나, 말을 못하거나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게다가 심한 두통이 있으면서 토하는 증상이 있는데, 이러한 증상은 인종의 증상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뇌졸중이나 뇌종양도 심한 고열을 발생하기도 한다.

p.158-159


조선의 왕들 중에는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로 짧지만 전쟁터를 누빈 무사로서 가진 강인한 체질과 정신 덕분인지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영조 다음으로 장수한 태조 이성계 같은 왕도 있었지만 (물론 그도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조선 최고의 건강 관리 하에 놓인 왕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질병을 앓고 또 단명한 왕들이 많았다.

조선의 스물일곱 왕 중에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또 의외라고 생각할 왕은 성군 중의 성군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이 아닐까 싶은데, 고기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진 세종은 이번에 보니 너무나도 인간적인 왕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살아서 대리청정을 하던 1422년 상반기까지는 건강했지만 그 이후에는 잔병이 많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였으며, 29세 때인 1425년부터는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본디 운동을 싫어하고 육식을 좋아하는 대식가였던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해 아버지 태종의 3년상 중에도 고기를 먹는 등 음식 조절에 있어서는 의지력이 약한 왕이었다.

그 때문인지 세종은 소갈증, 그러니까 당뇨병과 안질을 비롯한 당뇨병 합병증으로 평생 고생했고, 척추에 염증이 생겨 움직임이 둔해지는 병인 강직성 척추염으로 자리에 누웠으며, 성인성 질환(성병)인 임질도 앓으면서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질병에 대한 기록만 100회에 걸쳐 나왔을 정도였으니, 저자는 책에서 세종을 질병 종합선물세트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원래 자신이나 가족이 아프면 안 찾던 종교를 찾게 될 정도로 무엇에든 의지를 하고 싶어지곤 하는데, 세종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고열과 오한이 반복되는 학질에 걸리자 세종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왕임에도 궁궐까지 비우고 어머니를 모시고 절과 산을 다니며 기도와 주술 같은 무속 치료를 했다니 말이다.

이렇게 안질로 인해 침침한 눈과 아픈 몸으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눈부신 업적을 이루다니 세종대왕이 더욱 대단해보이는 한편, 운동을 싫어하며 음식 앞에서는 약해지고 질병 때문에 기도나 주술에 의지하기도 한 모습은 우리네와 다르지 않아 인간적으로 보였다.

<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에서 저자가 조선의 왕 스물일곱 명이 앓았던 질병을 추리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조선 왕의 생활 습관과 의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의술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종기(조선에는 종기로 고생한 왕이 많다)와 치통 그리고 하복부의 통증 때문에 대소변을 잘 보지 못하며 생식기가 붓고 아픈 산증을 앓은 중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내린 처방이 인상적이다.

심열과 갈증을 호소하는 중종에게 의관들이 처방한 특별한 약물은 야인건수... 그냥 똥물이다!
야인건수는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처방이고, 중종도 효험을 인정하여 8회에 걸쳐 야인건수를 복용하기도 했으며 죽기 전날에도 청심환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개똥은 몰라도 인간의 똥이 약으로 쓰이긴 한 것이다.


결국 11월 4일 의관들은 아주 특별한 약물을 처방한다. 야인건수, 즉 바로 똥물이다. <동의보감>은 이 처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성질이 차서 심한 열로 미쳐 날뛰는 것을 치료한다. 잘 마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끓는 물에 거품을 내어 먹는다. 남자 똥이 좋다.”
야인건수는 곧바로 효험을 발휘한 것 같다. 8일에는 의원 박세거가 들어가서 진찰하고 이렇게 말했다.
“갈증도 덜하고, 열은 이미 줄었습니다.”
중종도 효험을 인정했다.
“전일 열이 올랐을 때 야인건수를 써서 열을 물리쳤다. 혹시 밤중에 열이 심하면 쓰려고 하니 미리 준비해서 들여오라.”

p.143-144


서평에는 조선의 서너 왕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만 이 책으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질환을 앓은 조선 왕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도 유익하며, 나 또한 만성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어서인지 (나뿐만 아니라 아마 현대인들 대부분이 질병으로 고생했던 적이 있거나 만성질환을 겪고 있을 것이다) 조선 왕들과의 거리감이 한결 줄어들게 한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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