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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평점 :
<여자들의 테러> 책표지에는 붉은색, 보라색, 녹색의 끈이 얽혀 하나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듯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데, 저자 브래디 미카코가 가네코 후미코, 에밀리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 이 세 여자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등장시키며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었으니 이 책을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역시 이런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소개되는 세 여성은 각자 무정부주의자(가네코 후미코), 여성 참정권을 위해 무력 투쟁하는 서프러제트(에밀리 데이비슨),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봉기하는 민족주의자(마거릿 스키니더)로 눈앞에 두고 있는 목표는 달라 보일지라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여성이 명백하게 2등 시민에 지나지 않았을 당시 평등을 추구하며 자신의 신념을 용감하게 행동으로 옮긴 여성들이라는 분명한 공통점으로 우리를 고무시키는 역사적 인물들이다.
(온라인 서점 포인트로 받을 수 있는 타투 스티커와 함께)
먼저 가네코 후미코는 영화 <박열> 때문에 이름을 아는 사람이 꽤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나만해도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 때문에 가네코 후미코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 박열이 가네코 후미코의 동지이자 연인이어서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도 영화에서 적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 <여자들의 테러>에서도 가네코 후미코는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막장 드라마에서도 혀를 내두를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아버지는 후미코의 어머니를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처제와 삼각관계까지 만들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의 재혼을 반복했다.
그런 부모에게서 떨어져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강탈했던 일제 강점기에 할머니와 함께 조선 부강으로 건너왔지만 손녀가 아니라 하녀로 취급 받으며 지냈고, 삶이 너무 힘들었던 후미코는 열세 살 나이에 투신자살하고자 금강변에 서기까지 한다.
애초에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았던 무호적자로 국가 시스템 바깥에 있었으며,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해 있었던 적이 없었던 가네코 후미코가 무정부주의자 아나키스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1923년 간토대지진이 발생했고,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거나 조선인이 방화나 습격을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가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도 이렇게 썼다.
(...)
마쓰이다에서 병사 23인에, 구경꾼 10명 남짓이 조선인 하나를 쫓아가는 것을 보았다. 바로 돌아온 한 사람이 차창 아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였다.” 너무나 쉬웠다.
p.180이때 정부도 반정부 사상을 가진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노동 운동가들을 박해하며 검거하고 살해했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동지이자 연인 사이였던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도 (이 둘은 생각보다 훨씬 담백한 사이였던 듯하다) 대지진이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검속되었다.
일본 민중들이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때는 검속되는 것이 박열에게는 좀더 안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후에도 경찰은 둘을 계속 붙잡아두고는 학살을 정당화 하는 데, 그리고 학살에 책임지라는 국제 사회의 추궁에 곤란해지자 조선인이고 무정부주의자잉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게 경찰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재판소에 섰을 때 전향은커녕 자기 사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장으로 쓰는 가네코 후미코의 대범함에 놀랐다.
(...) “당신은 황족에 대해 평소 존칭을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오. 천황 폐하를 환자라고 불렀습니다”라고 했다. 황태자는 “도련님”, 그리고 다른 황족은 “안중에 없습니다”. 대신 등 다른 관료들은 유상무상(어중이떠중이)”, 경시청의 관료는 부르주아의 충견이므로 “불독” 혹은 “개새끼”였다며 후미코는 두려움 없이 이야기했다.
p.188다음으로 에밀리 데이비슨은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WSPU)에 소속되어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한 무력 투쟁을 하는 서프러제트로 활동했다.
사실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았기에 서프러제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고 WSPU의 지도자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책에서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아닌 에밀리 데이비슨을 소개했는지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나 에밀리 데이비슨이 바로 엡섬 더비에서 달리는 경주마 앞으로 뛰어들었던 바로 그 서프러제트였다는 것을 알고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프러제트는 무력 투쟁 저항 활동으로 미디어의 주목을 끌어 세간에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전략을 썼는데, 에밀리는 그 전략에 적극적인 것 이상으로, WSPU에서도 꺼려할 정도로 여성 참정권을 위한 행동이 과격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다른 서프러제트와 마찬가지로 교도소에 여러 번 드나들었고, 감옥에서의 단식투쟁 때문에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운 강제 음식 주입을 당하거나 물대포에 두드려 맞는 등의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무엇보다 마지막 활동, 국왕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선전하기에 안성맞춤으로 큰 이벤트인 엡섬 더비에서 경주마들이 달리고 있는 경마 코스로 걸어나와 국왕의 말과 충돌했던 일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에밀리가 경마 코스로 걸어 나올 때에는 손에 들려 있었으며, 국왕의 말과 부딪히고 쓰러진 에밀리의 외투 안쪽에도 있었던 것은 WSPU의 깃발이었다.
나는 비록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한 서프러제트가 여성 참정권 운동을 알리고자 경주마가 달리고 있는 위험한 경기장에 뛰어들었던 장면은 영화의 인상적인 몇 장면 중 하나로 아직도 기억한다.
에밀리가 튀어나왔던 곳은 세 회사의 카메라가 찍는 지점이었으므로 위 장면의 실제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에밀리가 말과의 충돌까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동차에 부딪히는 것과 다름 없다는 말에 부딪히는 위험을 감수하고 행한 일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에밀리의 행동이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에게 과연 죽을 마음이 있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그것은 본인밖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에밀리에게는 무슨 일이든 벌여서 상황을 돌파하려는 시도가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 아닐까? 에밀리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졸업 학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5년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악마 취급을 받으면서 몸을 바쳐 싸웠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은 진전되지 않았다. 그저 죄인으로 수감되어 고문이나 다름없는 강제 음식 주입을 당하고, 몸과 마음이 극한까지 고통받을 뿐이었다.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외쳐도 여자는 언제까지나 2급 시민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이 상황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돌파한 다음에야 내가 원하는 삶이 있다.
돌파만 할 수 있다면 그 앞으로 펼쳐지는 신세계에 자기가 있든 없든 에밀리에게는 상관없었던 것 아닐까? 만약 자기가 그곳에 없더라도 거기에는 다른 여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p.138-139마지막으로, 마거릿 스키니더는 ‘아일랜드 사람이 쓴 아일랜드 역사’ 책을 읽고 부모의 조국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뛰어난 저격수로 영국으로부터의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인물이다.
역시 멀지 않은 과거에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역사가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아일랜드 독립의 역사에 이입이 안 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마거릿 스키니더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과정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리고 뛰어난 저격수로서의 능력도 있고 영국군의 총알 세례를 감수하며 자전거를 타고 이동해서 폭탄을 던지는 일에 자원하는 용기를 가진 마거릿도 대단했지만, 여기에 멋진 여성을 한 명 더 발견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콘스턴스 마키에비치로 마담이라고 불렸고,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등원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영국 하원에서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선출되고, 또 서구에서 처음으로 여성 장관이 된 인물이다.
하지만 콘스턴스 마키에비치가 멋지다고 생각한 이유는 저격의 명수로 칭송받는 실력에다 경찰에게 미소 지으며 총구를 겨누는 박력있는 모습, 여자인 자신도 전령이 아니라 병사로서 아일랜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싶다는 마거릿을 저격수로 써줄 것을 건의해서 승낙을 얻어낸 배려심, 마거릿에게 자신의 군복보다 훨씬 좋은 직물로 군복을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거릿이 부상을 입고 돌아오자 마거릿이 총을 맞은 현장에 가서 멋진 실력으로 원수를 갚고 왔다는 장면에서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거릿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마담은 어느새 방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병사 한 사람을 데리고 마거릿이 총을 맞은 현장으로 간 것이다.
마딤과 동행한 병사는 방화 목표물이었던 건물 옆에 죽어있는 17세 소년의 사체를 일부러 안아 올렸다. 적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생각대로 영국군 병사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저격수는 2명이었다. 마담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두 발의 총탄으로 두 사람 다 사살했다.
“원수를 갚고 왔어.”
머거릿의 침대 옆으로 돌아온 마담은 상냥하게 말했다.
p.194이렇게 <여자들의 테러>에 소개되는 목숨을 건 여성들의 약 100년 전의 투쟁은 여전히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아일랜드에 공감할 수 있는 역사를 가진 현재의 대한민국 여성의 마음에도 분명 와닿을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 에밀리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는 물론이고 책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 또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중요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앞으로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에는 한국어판까지 친절하게 적혀있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