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잡 - 미래를 여는 녹색직업을 만나다 나는 커서 뭘 할까? 1
녹색교육센터 기획, 박경화 지음 / 양철북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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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관련된 이렇게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환경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 역시요. 좋은 책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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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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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23일 최인훈이 타계했다. 그는 1936년 회령에서 출생하여 6·25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했고, 1952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다. 1955년에 등단한 후 이듬해 대학을 중퇴한다. 1957년 군대에서 통역장교로 복역하였으며 1963년 제대하였다. “광장은 군생활을 하던 중인 196011월에 출간에 되었다.

최인훈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광복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겪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지금 세대와는 거리가 멀다.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그가 쓴 소설 역시 그러한데 어렵기로 정평난 작품으로는 회색인”, “총독의 소리”, “화두등이 있다.

최인훈의 부고를 알리는 신문은 일제히 ‘“광장최인훈 작가라는 수식을 붙였다. “광장은 최인훈의 다른 소설과 달리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 소설은 이명준을 통해 금기시 되었던 남북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아가 최인훈은 냉전주의 시대, 각 체제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깊이 파헤쳤다. 4.19혁명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가 이런 소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명준의 연대기

이러한 광장을 이명준의 연대기를 통해 다시 읽어 보려한다. 이명준의 삶의 궤적을 살피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참조한 책은 광장/구운몽”(문학과지성사, 2012)이다.

 

-1945년 이전. 이명준은 산징, 하얼빈, 연길 등 중국의 도시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다(75).

-1945. 해방이 되자 부랴부랴 서울로 나왔으며, 이명준의 어머니는 서울로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75). 아버지 이형준은 해방과 함께 홀로 월북한다(72).

 

이명준의 아버지 이형준에 관해 부언할 필요가 있다. 이형준은 중국의 도시를 전전했으며, 몇 개월에 한 번씩 집에 들렀고, 박헌영 밑에서 남로당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다툴 정도로 유능한 공산주의자였다. 박헌영을 따라 월북한 이형준이 북한에서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남한에 홀로 남은 이명준에게 드리운 먹구름은 먹빛으로 물들어갔다.

 

-1947. 아버지의 월북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고아가 되다시피한 이명준은 아버지의 친구인 변 선생의 집에서 기거한다(84, 85). ‘대학신문에 시가 실리고 영미의 친구 강윤애를 만나 호감을 갖게 된다(57). 고고학자이자 여행가인 정 선생과 대화하며 남한의 정치를 노골적으로 비판한다(59-68).

-1948. 아버지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서 대남 방송을 하게 되면서 이명준은 경찰서에 두 번 소환되어 모진 심문을 당한다(74-86).

-19487. 인천 윤애의 집에 기거하며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월북한다(128).

 

이명준은 남한사회를 비판하면서 광장과 밀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명준이 진단한 한국 정치란 추악한 밤의 광장이자 탐욕과 배신과 살이의 광장이다.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와 협박과 허영이 풍선처럼 떠돌며, 문화의 광장에는 헛소리와 아편과 부정한 돈이 뿌려진다. 남한 현실에 대한 이명준의 비관적 인식은 경찰서에 가면서 극에 달하고 그는 결국 월북하게 된다.

 

-1948. 북한에 도착한 이명준은 노동신문 본사 편집부에서 근무하며 󰡔볼셰비키 당사󰡕를 읽어낸다(129). 이곳에서의 삶 역시 잿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와 논쟁을 벌인다(131-135).

-1949년 이른 봄, 이명준은 야외극장 의용 봉사원으로 자원하여 일을 하다 지붕에서 떨어져 허벅지를 다친다. 국립극장 소속 발레리나의 위문을 받고 거기에서 은혜를 만난다(136-138). 남만주에서 쌀 증산 운동하는 모습을 취재하고 돌아와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140-148).

-1949년 겨울. 원산 해수욕장 노동자 휴양소에서 겨울을 보낸다(160).

-19503. 은혜가 모스크바로 떠난다(165-166).

 

아버지와의 논쟁은 정 선생과의 논쟁에 상응한다. 이명준의 강변을 듣는 아버지도 정 선생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정 선생의 침묵은 이명준의 말을 수긍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때로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갖는 이유는 이와 관련이 깊다. 작가는 오직 이명준에게만 살과 피를 부여하고 그 외의 인물은 아무런 개성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정 선생의 침묵은 이러한 작가의 불철저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작법이 불철저할지 모르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적확하다. 이명준의 노골적 비판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는 혁명을 풍문으로만 들었기에 그 흥분만을 과장되게 연출할 뿐이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난무하지만 피 묻은 셔츠도 울부짖는 외침도 없다. 실천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는 말이 넘쳐나지만, 행동은 부재한 곳, 그것이 작가가 통찰한 북한이다. 남한의 광장이 부도덕과 폐악으로 넘쳐 나는 아비규환의 공간이라면, 북한의 광장은 이데올로기와 구호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위선적 공간이다.


-1950년 전쟁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이명준과 은혜는 재회하고 동굴에서 밀회를 즐긴다(170-176). 낙동강 전선이 밀리면서 은혜는 죽고 이명준은 포로가 된다(176). 이명준은 포로정책에 따라 중립국을 선택한다. 캘커타로 가는 배에서 이명준은 바다로 뛰어든다.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의 현실에 좌절하고 또 그의 유일한 도피처였던 은혜마저 잃고 중립국을 선택한다. 그는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192).

그런데 중립국 행을 택한 이명준이 돌연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그 이유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 고독 때문이지 않을까. 이국의 밀실에서도 광장에서도 들이 닥칠 고독, 이 고독을 이명준은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고독의 동의어들

고독이라는 단어는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등장한다. 명준이 권투선수의 쉐도우 복싱을 바라보며 그 노릇도 수월치 않는 모양이지.”라고 말하자, 친구인 태식은 고독해서 저러는 거야.”라고 되받는다(53). 이 때부터 이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고독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든다. 그렇게 남발되던 고독이란 단어는 뚝 끊어지고, 소설의 말미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렇게 말이다.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고독해서 그랬겠지.”

누가?”

김일성 동무지.”(171)

 

여기에서 고독은 외로움이라는 본래의 뜻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권투선수도 이해할 수 없고 전쟁도 이해할 수 없다.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삶의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삶의 어느 것도 이해받을 수 없다면, 그 삶은 고독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없음외로움은 동의어다. 고독은 그렇게 영혼을 잠식한다. 이때 인간은 고독, 그 자체가 된다. 하여 고독의 또 다른 이름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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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북매일 실었던 칼럼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한 권의 책이 있다. 이 책은 199610월에 출판되었고 두 달 후 음란물로 지정되어 폐기처분 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199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며 나는 흥분했고 이 책을 어떻게든 구해서 읽었다, 아니 읽어야 했다. 무라카미 류가 변태와 일탈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20년 전에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는데, 그 아류쯤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하는 이 나라에 분노했다. 어찌되었던 그는 당시 신화였고 혁명 그 자체였다.


그랬던 그는, 처음엔 전시가 거부되었다가 미술관의 중요 소장품이 된 뒤샹의 변기처럼 권좌에 올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칼럼을 쓰고, 저자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혹자라 칭하고, 그 책의 단 한 부분을 읽고 예술을 통한 혁명은 신화라고 단언한다. J.G. 프레이저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처럼,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다시 아버지가 되어 이제 자식을 살해한다. 이쯤 되면 그가 누군지 알겠지만 그래도 그가 장정일이라는 것을, 혹자가 이지영이며 그 책이 ‘BTS 예술혁명이라는 것을 굳이 밝힌다.(이 글에서 문제 삼는 장정일의 글은 장정일 칼럼: 증류된 순수성의 이면이다.)



장정일의 자식 잡는 칼춤에 일일이 반론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 책이 신화라는 그의 조롱을 되돌려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책을 오독한 부분은 바로잡는다. 장정일은 이 책이 대중음악이 세상을 변혁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읽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음악과 그 메시지를 재생산하는, 모바일 네트워크를 통한 ‘BTS-아미’(방탄소년단과 그 팬클럽)의 수평적 소통과 상호작용에 방점이 찍혀있다. 기존의 영화 이미지 너머 네트워크 이미지를 통해 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핵심이다.

 

방탄소년단은 뮤직비디오를 생산하고 아미들은 그 사이의 빈 곳을 채우는 콘텐츠를 생산하며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이제 예술은 예술가와 관람자, 생산자와 수용자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기성 권력을 뒤흔들며 풀뿌리처럼 비중심화된 체계로 나아간다. 이는 방탄현상의 특징으로, BTS 예술이 세상의 변혁을 징후적으로 표현한다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정일로 대변되는 기성세대들이 방탄소년단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책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을 대중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급변하는 기술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는 세대들이 창출하는 문화를 저속한 것으로 매도하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한다. 즉 이들은 문학이나 영화는 말할 가치가 있지만,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나 배틀그라운드와 같은 게임은 분석대상이 될 수 없다는 꼰대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정신분산(Zerstreuung)’일 것이며, ‘꼰대들은 이것을 도무지 용납하지 않는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 예술의 특징으로 보았던 정신분산(Zerstreuung)’은 아마도 보들레르가 번역한 군중 속의 남자’(애드가 앨런 포)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 ‘D 커피하우스의 커다란 유리창에 앉아 런던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쇠약한 노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뒤쫓게 된다. 이 남자는 교차로, 시장, 극장, 더러운 골목, 호텔 등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찾아 밤부터 다음 날까지 지치지 않고 군중 속을 헤매고 다닌다.

 

군중 속의 남자는 정신을 분산시켜 사람, 상품, 건물 등을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온몸으로 감각한다. 벤야민 식의 정신분산이 현대에서는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이뤄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4차 혁명(클라우스 슈밥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긴 하지만) 핵심인 인터넷, 유비쿼터스, 모바일에서 기인한다. ‘웹툰을 보다가 카톡을 보내고, 찍은 사진을 순식간에 편집하여 페북에 올리고, 다시 웹툰을 보다가 음악을 바꾸고, ‘좋아요개수를 확인하는 일이 지하철 좌석에서 채 한 정거장을 이동하기도 전에 일어난다.

 

 

한병철은 이런 정신분산멀티태스킹이라 부르면서 동물의 생존 방식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멀티태스킹은 동물이 먹이를 먹으면서 천적을 경계하고, 짝짓기 상대를 물색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동물들이 삶의 질이 아닌 생존 자체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오늘날 인간의 삶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결론인 이유는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조건이 주어졌으므로 멀티태스킹을 한다. 이러한 물리적 토대 위에서 수용자는 동시에 생산자의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혁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미래의 문맹자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모홀리 나기의 말이지만 벤야민이 인용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 말이다. 저 예견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아는 어린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하겠다고 백을 추천해달라는 글을 페이스 북에 올렸다. 그랬더니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말 보다는 사진으로 보여주었고, 순식간에 이상하게 생긴 핸드백 전시장이 되었다. 훌라후프처럼 생긴 아주 큰 핸드백이 등장하기도 했고, 새끼손가락처럼 작은 가방을 올리는 아이도 있었다. 이 친구는 참다못해 말을 말자라는 의미로 김 위에다가 말()을 김밥말이로 마는 이미지를 올렸다. 장난기가 발동한 다른 녀석이 흰색 비닐봉지를 가방처럼 메고 다니는 사진을 추가했다. . 친구들의 장난에 완전히 넋을 잃은 친구는 시바신상에 담배와 담배연기를 합성한 아주 불경스러운 사진을 가지고 와 시바(Siva), 할 말이 없다라고 썼다.

 

요즘 10대나 20대는 유치하게 문자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지로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 활용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 왜 책을 읽지 않냐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한다. 말은 음성언어다. 생각을 음성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문자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는 떨어질 수 없는 짝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론의 여지가 많지만) 우리는 생각을 언어가 아닌 이미지로 한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말이나 문자로 번역한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이미지를 말로 하는 것은 쉽지만 문자로 번역하는 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전달도 어렵다. 그렇다면 이미지로 된 생각을 사진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쉽지 않을까?

 

미디어의 발전 속에서 문자언어는 가장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미지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웹툰과 그래픽 노블, 게임 산업 등은 모두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다. ‘국제시장과 같이 대중의 인지도만 높은 영화가 많듯이 ‘GTA’와 같은 질이 좋지 않은 게임도 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같이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영화가 있는 것처럼 그와 비슷한 수준의 라스트 오브 어스와 같은 게임도 있다. ‘토리노의 말과 같은 예술영화가 있듯이 그에 상응하는 아빠와 나’, ‘순례자의 길같은 게임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삼국지보다는 웹툰인 미생을 보며 처세술을 배운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외딴 방




과 같이 노동문자와 사회문제를 다룬 소설이 있다면, 최규석의 웹툰 송곳은 그 어떤 소설보다 심도 깊게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의 지난함을 묘파해내고 있고, 강풀의 ‘26은 그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5.18문제를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다

  

과연 기존의 예술이 새로운 미디어 매체들이 생산하는 문화를 따라올 수 있을까? 기술과학의 발전 앞에서 요즘 애들은 문제야! 책을 안 읽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렇게 말하는 우리는 왜 요즘 아이들이 하는 게임을 하지 않고, 웹툰을 보지 않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 혁명은 기존의 예술을 폐기하고 있다. 다만 칼을 든 자는 결코 말하지 않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믿는 자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 것. 저들은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죽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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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민수 문지 푸른 문학
김혜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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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책 따위!! 라며 손에 들었다가 한참에 다 읽어버렸다.
심지어 쳐 울기까지 했다.
젠장 민수라는 이름을 좋아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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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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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e󰡕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뭐 이렇게 텅 빈 책이 다 있어, 이렇게 얄팍하게 책을 만들어도 되는 거야

였다. 시간이 지나고 서문을 읽으며 이 책의 진정성에 깜놀한다.

이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암기하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입니다

 

현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입니다

 

빈틈 없는 논리가 아니라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사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식은

 

엄격히 구분 짓는 잣대가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이해입니다

 

말하는 쪽의 입이 아니라

듣는 쪽의 귀입니다

 

책 속의 깨알 같은 글쓰기가 아니라

책을 쥔 손에 맺힌 작은 땀방울입니다

 

머리를 높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게 하는 것입니다.

 

비어 있는 공간을 통해서 말하기보다 듣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정보로 머리를 채우기보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또 지식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있고, 지식과 지식의 경계에서 자유를 추구할 수 있다. 지식을 통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한 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 세상을 느끼고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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