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기적의 인문학독서법 -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인문학 독서법의 비결
김병완 지음 / 북씽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아니 무슨 책 읽는데 기적씩이나...인문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면서,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어디를 펴더라도 인간과 정치를 바라보는 조지 오웰의 통찰력에 탄복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감각들

하나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표제작, 또 하나는 <<올리버 키터리지>>라는 소설집의 첫 소설인 <약국>.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여성인 헤더가, <약국>은 남성인 헨리가 서술자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들이 과거의 연인을 추억한다는 점에서 서사는 거의 동일하다.

이 두 편의 소설은, 나이 많은 남자와 그보다 많게는 서른 살 가량 어린 여자가 등장하며, 그들 사이에 흐르는 내밀하면서도 아주 미묘한 감정들, 그래서 사랑이라 말할 수도 없고,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도 없는 감정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중산층이거나 그 이상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사려 깊고, 자애롭고, 섬세한 감각을 가진 남성들. 아름답고, 풋풋하고, 역시 섬세한 감각을 지닌 여성들. 헤더는 결혼하게 될 남자 친구 콜린이 있지만 물리학과 교수인 로버트에게 끌린다. 헨리는 아름답고 열정적인 아내 올리버가 있지만 자신의 약국에서 일하는 데니즈에게 끌린다. 그들은 이 사랑을 격정으로 몰아 갈 수도 있지만 견뎌낸다. 이들은 자신의 배우자(혹은 배우자가 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평생을 함께 하게 되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여자 친구로서의 혹은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이들의 행동은 조심스럽다. 그런 것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조심스러움 속에서 암세포 같이 자라나는 감정과 그 통제될 수 없는 범위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랑은 결국 지나가 버리지만 마음속 깊이 오래도록 남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두 편의 소설은 그런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잔잔하게 그리고 애잔하게 그런 잔물결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너울지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소설 혹은 문학이라는 것들은 글자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그 속에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감각들이 존재한다. 어떤 소설은 격심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아주 미약한 떨림만을 가진 것들도 있다. 이 소설들은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이러한 감각들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아니 느끼기 위해서는 온몸을 긴장시켜 몸의 솜털까지 세워야 한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은 아주 연약하고 미약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들은 쉽게 바스라지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는다면 이 소설들이 지닌 내밀한 감각들은 휙 지나쳐버리고 말 것이다.

2. 진실들

만약 소설이 진실을 보여주거나 혹은 교훈 같은 것을 전해주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설()의 사상 속에 있지도 그렇다고 소설의 주제나 중심 사건 속에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진실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늘려 있을 것이다.

나는 결혼도 안 했고 그러니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지만 모자는 순식간에 격렬히 싸우다가도, 그 분노는 이내 무언의 친밀감처럼 둘을 감싸버려 영문을 알 길 없는 헨리만 멍하니 따돌림을 받는 기분이었다.”(<약국>, 13)와 같은 서술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다. 격렬한 싸움이 무언의 친밀감으로 변해버리는 순간을 마치 나는 경험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로버트와의 관계를 콜린에게 들킨 후의 헤더의 내면. “대신 나는 키스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주기를 바라면서 그저 그에게 키스를 하려 했고 그는 나의 키스를 피해버렸다.”(<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118) 헤더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로버트와 친하게 지내는 것일 뿐, 사랑의 말을 속삭이거나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 다만 마음속으로만 로버트를 생각하고 있었노라고, 하지만 정말 내가 사랑하는 것은 로버트가 아닌 콜린 당신이라는 사실을, 그 복잡한 마음을 헤더가 콜린에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헤더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진심을 담은 키스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장면은 데니즈가 자신의 남편(그의 이름도 헨리다)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려오는 장면이다.

어느 토요일, 집에서 점심으로 치즈를 넣고 구운 게맛살 샌드위치를 먹을 때였다. 크리스토퍼가 샌드위치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는데 전화벨이 울려 올리브가 전화를 받으러 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크리스토퍼는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기다렸다. 헨리는 마음속으로 그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거실에서 올리브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아들이 직감적으로 예를 갖췄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불쌍한 것,” 전혀 그녀답지 않게 낙담했던 올리브의 그 목소리를 헨리는 그후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약국>, 36)

흔히 정신분석학자들은 기억은 전유와 환유와 같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조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버릇없는 크리스토퍼가 직감적으로 죽음의 공기를 느끼고 예를 표한 것이 아니라 데니지에 대한 헨리의 안타까움과 고통스러움을 투영했기 때문에 생긴 착각에 불과하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이야말로 정신병자라고 생각한다. 경이로움들, 환상적인 것들, 불가해한 것들, 이런 것들을 믿지 않으며, 어떻게든 인간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려는 그들이야말로 편집증 환자이거나 저열한 수준의 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토퍼의 직감 같은 것이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로버트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콜린에게 들킨 헤더가 더 이상 로버트를 만날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 로버트의 아파트에 찾아온다. 헤더는 그런 말을 꺼내면서도 한편으로 로버트가 질투의 감정을 느끼기를 바란다. 로버트는 그런 헤더를 모두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헤더는 화가 난다. 이 화의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 소설가는 나는 그때 그가 너무나 쉽게 나를 이해해버리는 것 같아 화가 났지만,”(<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122)이라고 적고 있다. 적어도 모든 화가 그렇진 않겠지만, 분명 이런 경우에 화가 나기 마련이다. 너무 빨리 수긍하거나 너무 빨리 이해할 때, 화가 들끓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다. 이 작가는 이런 경우에 화가 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살아가도록 만든다. 이들은 실제로 피와 뼈와 살을 지닌 사람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소설 속에 살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에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소설이 삶이 아니라 소설이라면 어떻게 이런 진실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는가.

3. 남자들

개인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내가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라는 팟캐스트에서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것을 들었는데, 정작 이 소설들을 읽을 때는 소설이 내는 목소리 대신 김영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김영하를 생각했다.

이 소설들에는 각각 나이 많은 두 남자가 로버트와 헨리가 등장한다. 헤더가 로버트를 만났을 때 로버트는 쉰 줄에 들어선 남자였다. 헨리는 예순이나 일흔이 되어서 20~30년 전에 만났던 데니즈를 추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삶의 격정, 삶에 대한 열정, 그리고 들끓어 오르는 욕구와 욕망들이 가라앉을 데로 가라앉아 평안해진 그런 남자들이다. 나이는 많지만, 점잖고, 예의 바른 남자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은 김영하는 분명 그들을 동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김영하가 이 두 편의 소설을 읽었다는 것 외에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가 이 나이 많은 남자들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니 제발 그가 그랬으면 한다. 왜냐하면 저 나이 많은 남자들을 부러워하는 것이 사실은 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들을 김영하에게 투영해 버린 후 (나는 좀 홀가분한 마음으로 혹은 나는 그런 적 없다는 듯이)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늙음을 동경하는 김영하를 욕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좀 놀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를 놀릴 수는 없으니 김영하를 말이다. 그러니 나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은 사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레비의 회고 연구>라는 제목으로 붙여져야 옳다. 여하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분석을 따라가보자. 그러면 아감벤의 정치철학의 지향점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가 말하는 생명정치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에서 작동했던 이슬람교도에 대해 치밀히 분석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는 삶에 대한 의지도 죽음에 대한 의지도 갖지 못한 비인간이다. 그들은 극도의 영양실조로 아사 직전에 처해 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기도를 할 때 어깨를 흔드는 모양으로, 마치 좀비처럼 걷는다. 그래서 그들은 아우슈비츠의 다른 수감자들과 분리되어 이슬람교도라는 은어로 불린다. 그들은 죽음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살아 있음 조차 느끼지 못하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다. 그들은 삶에 대한 의지도, 심지어 자살에 대한 의지조차도 갖지 못한 자들이다. 잘루스는사람은 결코 참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꼭 참아내야만 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어째서 이런 극도의 고통에는 더 이상 조금도 인간다운 것이 없는지 꼭 보아야만 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최극단까지 간 사람, 그래서 어떤 인간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 인간으로서 불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참아낼 수 없는 것조차 참아낸 사람들, 이들을 인간으로 부를 수 없다는 말일 께다. 아우슈비츠의 수인과 이슬람교도는 그런 점에서 비인간이다.

수용소에 있던 누구라도, 익사한 자건 살아남은 자건, 참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바라지 않았을 것까지도 혹은 참아야 하지 않아야 했던 것까지도 참았다. 극도의 인내’, 이러한 가능성의 소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인간적인 힘이 비인간적인 것에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성은 또한 비인간성을 견디어낸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인들, 유대인들을 관리하고 감독했던 그 가해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수인들과는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가해자들 역시 고통을 견뎌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 역시 비인간이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그들 역시도 수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감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분명히 그들 역시 모든 것을 참아냈고 참아낼 수 없는 것조차 참아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이후 전범 재판에서 거의 모두가 그랬듯이 어쩔 수없이 명령을 따랐고, ‘할 수없이 행했을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우슈비츠에서 행했던 행위들을 온전히 경험하지 않았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경험이나 행위를 내면화하지 않았으며, 그 행위의 의미도 모른 채 기계처럼 그 일을 행했을 뿐이다. 이들은 그 당시 자기 자신이 아닌 명령을 따르는 로봇이었다고 변명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지켜냈으며, '비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감벤은 왜 아우슈비츠의 가해자들이 '인간'이었고, '이슬람교도'를 비롯한 수감자들이 '비인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러한 분리를 통해서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죽음이 일상화 되어버린 공간에서 죽음을 품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결단을 행할 수 없는 자들, 죽음을 통해 비고유성과 비본래성을 전유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린 자들을 우리는 오늘날 왜 다시 사유하여야 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이 책을 썼다.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는 시를 쓸 수 없다또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그 절박한 비판을 포함해,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와 같은 아도르노의 말에 아감벤은 매우 격분한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태도는 아우슈비츠의 고유한 범죄를 특정하지 못하는 이성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그리하여 아우슈비츠에 대한 전체적 기억을 말소하고 아우슈비츠에 관한 역사 전체를 지워버리는 술수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결코 매장해버릴 수 없는 진정한 라르바’(악령)이다. 결코 매장될 수 없는,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사유함으로써 아감벤은 근대적 정치의 중요한 특징을 포착하고 있다.

아감벤은 현대 정치의 핵심을 '생명정치'라고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호모사케르>를 참조하는 것이 좋다). 생명정치란 정치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통치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 안전만을 문제 삼는 정치다. 이러한 생명정치는 근대 이전의 정치와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근대의 정치는 배제의 방식 즉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이전에도 대량학살은 있었지만,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법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전의 정치가 '죽이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정치'라면, 근대의 생명정치는 '살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정치'다.

근대의 생명정치의 다스리지 않음, 이것을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휴지(休止)'인데 이를 기입함으로써 통치를 가능케 한다. 휴지가 기입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근대의 생명정치의 극단에 왜 아우슈비츠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생명정치는 인간과 인구 사이에 휴지를 만든다. '인간'이 통치의 영역이라면 '인구'는 비통치의 영역이다. 인구는 숫자로 존재하며, 인구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나치는 이러한 인구를 다시 아리아인 혈통과 비아리아인 혈통이라는 휴지를 만든다. 비통치의 영역에 비아리안 혈통을 구분하고 다시 비아리아인을 유대인과 혼혈인으로 분리하며, 다시 유대인을 유형인과 수인으로 분리하며, 다시 수인을 수인과 이슬람교도로 분리된다. ‘이슬람교도는 더 이상의 휴지가 불가능한 지점 곧 인간의 가장 극단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자들이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이다. 그들은 다스리지 않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근대적 생명정치의 극단, 다스리지 않는 공백 혹은 배제의 가장 자리에 놓여 있다. 그 극단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으로 다뤄진다.

통치의 말단에 이슬람교도가 있으며 우리 역시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2001년 이후 그러한 생명정치가 노골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9.11이후 미국이 보인 그들의 태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이겨내겠다는 미국 정부의 발언은 이러한 생명정치의 전형이다. 이 말은 결국 민주주의의 바깥에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을 위치시키자는 것이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을 통치의 영역에서 제외한 후 살리거나 죽게 놔둔다.” 관토모 수용소가 그 한 극단이다. 이에 더하여 국제법상 북한을 고립시키려 했던 정치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윤리학이 필요하다. 더 이상 인간성, 존엄성 따위가 통용되지 않는 상태, 죽음이 일상화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버려진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그와 같다면 여기에서 윤리학이 새롭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개정증보판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있는 것들로 채우면서 하나의 주제로 통합해 간다. 그의 글은 어떤 글쟁이의 글보다 구조적이고 어떤 흥미로운 글보다 뛰어나다. 저자는 과학적 재능에 글쓰기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그는 理와 文을 갖추었으며 문리를 통했으니 현자의 지경에 들었음이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