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북매일 실었던 칼럼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한 권의 책이 있다. 이 책은 199610월에 출판되었고 두 달 후 음란물로 지정되어 폐기처분 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199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며 나는 흥분했고 이 책을 어떻게든 구해서 읽었다, 아니 읽어야 했다. 무라카미 류가 변태와 일탈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20년 전에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는데, 그 아류쯤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하는 이 나라에 분노했다. 어찌되었던 그는 당시 신화였고 혁명 그 자체였다.


그랬던 그는, 처음엔 전시가 거부되었다가 미술관의 중요 소장품이 된 뒤샹의 변기처럼 권좌에 올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칼럼을 쓰고, 저자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혹자라 칭하고, 그 책의 단 한 부분을 읽고 예술을 통한 혁명은 신화라고 단언한다. J.G. 프레이저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처럼,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다시 아버지가 되어 이제 자식을 살해한다. 이쯤 되면 그가 누군지 알겠지만 그래도 그가 장정일이라는 것을, 혹자가 이지영이며 그 책이 ‘BTS 예술혁명이라는 것을 굳이 밝힌다.(이 글에서 문제 삼는 장정일의 글은 장정일 칼럼: 증류된 순수성의 이면이다.)



장정일의 자식 잡는 칼춤에 일일이 반론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 책이 신화라는 그의 조롱을 되돌려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책을 오독한 부분은 바로잡는다. 장정일은 이 책이 대중음악이 세상을 변혁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읽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음악과 그 메시지를 재생산하는, 모바일 네트워크를 통한 ‘BTS-아미’(방탄소년단과 그 팬클럽)의 수평적 소통과 상호작용에 방점이 찍혀있다. 기존의 영화 이미지 너머 네트워크 이미지를 통해 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핵심이다.

 

방탄소년단은 뮤직비디오를 생산하고 아미들은 그 사이의 빈 곳을 채우는 콘텐츠를 생산하며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이제 예술은 예술가와 관람자, 생산자와 수용자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기성 권력을 뒤흔들며 풀뿌리처럼 비중심화된 체계로 나아간다. 이는 방탄현상의 특징으로, BTS 예술이 세상의 변혁을 징후적으로 표현한다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정일로 대변되는 기성세대들이 방탄소년단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책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을 대중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급변하는 기술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는 세대들이 창출하는 문화를 저속한 것으로 매도하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한다. 즉 이들은 문학이나 영화는 말할 가치가 있지만,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나 배틀그라운드와 같은 게임은 분석대상이 될 수 없다는 꼰대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정신분산(Zerstreuung)’일 것이며, ‘꼰대들은 이것을 도무지 용납하지 않는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 예술의 특징으로 보았던 정신분산(Zerstreuung)’은 아마도 보들레르가 번역한 군중 속의 남자’(애드가 앨런 포)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 ‘D 커피하우스의 커다란 유리창에 앉아 런던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쇠약한 노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뒤쫓게 된다. 이 남자는 교차로, 시장, 극장, 더러운 골목, 호텔 등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찾아 밤부터 다음 날까지 지치지 않고 군중 속을 헤매고 다닌다.

 

군중 속의 남자는 정신을 분산시켜 사람, 상품, 건물 등을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온몸으로 감각한다. 벤야민 식의 정신분산이 현대에서는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이뤄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4차 혁명(클라우스 슈밥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긴 하지만) 핵심인 인터넷, 유비쿼터스, 모바일에서 기인한다. ‘웹툰을 보다가 카톡을 보내고, 찍은 사진을 순식간에 편집하여 페북에 올리고, 다시 웹툰을 보다가 음악을 바꾸고, ‘좋아요개수를 확인하는 일이 지하철 좌석에서 채 한 정거장을 이동하기도 전에 일어난다.

 

 

한병철은 이런 정신분산멀티태스킹이라 부르면서 동물의 생존 방식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멀티태스킹은 동물이 먹이를 먹으면서 천적을 경계하고, 짝짓기 상대를 물색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동물들이 삶의 질이 아닌 생존 자체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오늘날 인간의 삶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결론인 이유는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조건이 주어졌으므로 멀티태스킹을 한다. 이러한 물리적 토대 위에서 수용자는 동시에 생산자의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혁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미래의 문맹자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모홀리 나기의 말이지만 벤야민이 인용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 말이다. 저 예견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아는 어린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하겠다고 백을 추천해달라는 글을 페이스 북에 올렸다. 그랬더니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말 보다는 사진으로 보여주었고, 순식간에 이상하게 생긴 핸드백 전시장이 되었다. 훌라후프처럼 생긴 아주 큰 핸드백이 등장하기도 했고, 새끼손가락처럼 작은 가방을 올리는 아이도 있었다. 이 친구는 참다못해 말을 말자라는 의미로 김 위에다가 말()을 김밥말이로 마는 이미지를 올렸다. 장난기가 발동한 다른 녀석이 흰색 비닐봉지를 가방처럼 메고 다니는 사진을 추가했다. . 친구들의 장난에 완전히 넋을 잃은 친구는 시바신상에 담배와 담배연기를 합성한 아주 불경스러운 사진을 가지고 와 시바(Siva), 할 말이 없다라고 썼다.

 

요즘 10대나 20대는 유치하게 문자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지로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 활용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 왜 책을 읽지 않냐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한다. 말은 음성언어다. 생각을 음성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문자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는 떨어질 수 없는 짝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론의 여지가 많지만) 우리는 생각을 언어가 아닌 이미지로 한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말이나 문자로 번역한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이미지를 말로 하는 것은 쉽지만 문자로 번역하는 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전달도 어렵다. 그렇다면 이미지로 된 생각을 사진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쉽지 않을까?

 

미디어의 발전 속에서 문자언어는 가장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미지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웹툰과 그래픽 노블, 게임 산업 등은 모두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다. ‘국제시장과 같이 대중의 인지도만 높은 영화가 많듯이 ‘GTA’와 같은 질이 좋지 않은 게임도 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같이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영화가 있는 것처럼 그와 비슷한 수준의 라스트 오브 어스와 같은 게임도 있다. ‘토리노의 말과 같은 예술영화가 있듯이 그에 상응하는 아빠와 나’, ‘순례자의 길같은 게임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삼국지보다는 웹툰인 미생을 보며 처세술을 배운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외딴 방




과 같이 노동문자와 사회문제를 다룬 소설이 있다면, 최규석의 웹툰 송곳은 그 어떤 소설보다 심도 깊게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의 지난함을 묘파해내고 있고, 강풀의 ‘26은 그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5.18문제를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다

  

과연 기존의 예술이 새로운 미디어 매체들이 생산하는 문화를 따라올 수 있을까? 기술과학의 발전 앞에서 요즘 애들은 문제야! 책을 안 읽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렇게 말하는 우리는 왜 요즘 아이들이 하는 게임을 하지 않고, 웹툰을 보지 않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 혁명은 기존의 예술을 폐기하고 있다. 다만 칼을 든 자는 결코 말하지 않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믿는 자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 것. 저들은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죽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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