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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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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은 종종 가르치셨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어릴 적에는 그런가보다, 저게 역사과목의 '의의'니까 열심히 외워야겠다, 하고 외웠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 수록, 과연 이게 정말 역사의 의의일까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그게 역사기록이 존재하는 의미라고 하기에는, 속된 말로 하자면, 지금 현재가 너무 '구리다'.

독재를 겪고도 다시 독재 속으로 들어가는 나라, 포퓰리즘을 겪고도 포퓰리즘에 휘말리는 사람들, 부패를 척결하고 나서 다시 부패로 돌아오게 되는 사회. 이런 모습을 보면,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지만" 정말로 "배우는가"는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동네 아이들>은 이 지점을 서구사를 통해 건드리는 이집트 소설이다. '이집트' 소설이라고 하니 굉장히 생소한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성경(구약, 신약)과 마호메드의 이야기,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소설 속의 상징도 무엇을 뜻하는지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서문에서 화자가 밝히는 대로, 이 책은 '우리 동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체가 '인류사'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인류사'에서 동양인으로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양, 즉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은 배제되어있다는 점이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소설은 우리 동네에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대저택, 흡사 에덴처럼 묘사되는 이 저택에서 이드리스가 쫓겨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택의 주인 자발라위의 첫째 아들 이드리스는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막내이자 천한 어머니를 가진 아드함이 뽑히자 아버지 자발라위에게 반감을 품고 그에게 반발한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저택 밖으로 쫓겨난다.

이드리스는 이후 꾀를 부려 신실한 아드함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데, 이때 아드함을 부추기는 것은 그의 아내 우마이마다.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만한 이 구도는, 바로 아담-사탄-이브의 구도다. 이렇게 볼 때, 저택의 주인 자발라위는 '신'을 표상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카인과 아벨, 모세, 예수, 마호메드의 이야기를 차례로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는 언뜻 역사의 이야기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를테면 마호메드의 상징인 '까심'이라는 인물의 경우 나이가 많은 상속녀와 결혼하고, 예수의 상징인 리파아는 아내(즉, 유다)의 밀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 덕에 술술 읽히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그 탓에 예상가능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드함-후심-자발-리파아-까심-아라파(아담-아벨-모세-예수-마호메드-근대인) 이 순서로 내려가면서 점점 자발라위와의 접촉점이 없어지는 것처럼 형상화되었다는 데 있다. 아드함은 자발라위(신)의 아들이었고, 그와 직접 대면했지만, 자발은 어두운 곳에서 그를 만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리파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까심은 그의 하인을 만나는 식이다. 즉, 자발라위와 아드함의 후손은 점차점차 멀어진다. 그러더니, 근대 과학을 상징하는 '마법'을 쓰는 아라파에 이르러서는 아예 자발라위가 죽어버린다. 과학의 시대 이후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고 찾지 않는 인간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화 해놓은 점이 이 소설의 탁월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일하게 어떤 광채도, 어떤 지적인 힘도, 강한 의지도 없는 아라파의 모습이 유독 인상깊고 씁쓸하다.

 

 우리 동네에 망각이라는 전염병이 돌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본보기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망각은 동네에 전염병처럼 늘 창궐한다. p.304 (<자발>편이 끝나면서)

 

어쨌든 사람들은 안락한 생활을 더없이 기뻐하며 즐거운 삶을 누렸다. 그들은 자신감에 차 확실하게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망각은 전염병처럼 우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까? p.440 (<리파아>편이 끝나면서)

 

 

 

소설은 매 편이 끝날 때마다 '망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망각은 계속해서 평온해진 마을을 다시 휩쓸고, 마을 사람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수장과 관리인을 출현하게 만든다. <까심> 편에서 사람들은 이제 망각을 완전히 몰아내야할 때가 왔노라고 이야기하지만, 마호메드 이후 이슬람을 생각할 때 그 말은 아주 공허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까심 뒤에 오는 자를 보라. 그는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근대인, 가장 초라한 주인공 아라파다.

 

다행스러운 건, 바로 그 아라파, 용기없고 비겁한 아라파가 마지막 순간 하나슈에게 비밀의 노트를 남기고 떠난다는 점이다. 그 소식만을 믿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기다린다. 하나슈가 언젠가 나타나 이 마을을 다시 불의 없는 마을로 바꿔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인내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보게 될 거야."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다면, 우리는 그 앞의 압제와 그에 맞서 이긴 정의를 배우는 것이 아닐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보다 우리는 하나의 패턴을 배운다. 무언가가 과도하게 일어서면, 반드시 반대 급부가 생긴다. 부패가 만연하면 문제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 일어난다. 그가 세운 정의는 시간이 지나면 퇴색한다. 곧 다시 부패가 일어나고, 이에 대한 반(反)으로 정의가 일어난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진보해나가고, 그 결과 언젠가는 최상의,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글쎄, <우리 동네 아이들>을 보다보면, 나아지는 것은 기술이고 물질일 뿐 사람의 정신이란 참 엇비슷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다. (게다가 최근 한국사회를 보면, 이 정신이라는 것이 결코 근대적 교육만으로 향상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이드리스의 딸과 아드함의 아들이 결합해서 나온,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선과 악, 무지와 교활함을 뒤섞어 놓은 생명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반복, 이 무한한 망각 자체가 인류의 운명이 아닌지,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지,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이 ​폭력에 대한 무기력감으로 번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반복은 커녕 고통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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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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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가만히 누워 생(生)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가 아니라, 나는 어디서 왔을까, 왜 왔을까, 정말 이유가 있어서 왔을까, 사실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 모든 것이 무용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 불현듯 서럽고 무서워지면서, 계속 이렇게 불안한 상태로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어 끝을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산다는 건 참 그렇다. 불안과 삶은 뗄 수 없는 관계여서, 사람은 늘 불안을 삼키고 살아가는 듯 하다. 나는 언제 죽게될까, 어떻게 죽게 될까, 어떤 사람으로 살게 될까, 그 삶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죽을 때는 많이 아플까. 그런 기우들은 불안에서 파생되어 나와 때로 삶을 잠식한다. 너무 깊게 빠져들면 의미라곤 없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순간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참 쉽지가 않다.

 

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는 사실 <리모노프>보다도 빨리 읽었다. 자살을 시도하던 백인 교수와 얼떨결에 그를 구한 흑인 목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극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이 짧은 소설을 읽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던 반면, <리모노프>는 워낙 장편의 대서사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셋 리미티드>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독서 후 생긴 동명의 영화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영화 선셋 리미티드를 꼭 보고 싶어 찾아다녔는데 찾지 못해서 아직도 그게 조금 아쉽다. 극 형식의 소설이라지만 사실 희곡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재담을 가지고 펼쳐지는 이 소설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물론 단순히 영화를 보지 못해 글을 쓰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어떻게, 무엇이라고 적어야 할지 꽤 오래도록 고민해야 했다. 소설은 단순히 '자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해 살아가는 르네상스 이후의 인간, 혹은 근대의 인간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나는 그 일원으로서, 그것도 이 소설에 나오는 백인 교수와 꽤 비슷한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근대인 중 하나로서, 이 글에 대해 '쓰기'시작할 때 그 행위가 내게 미칠 여파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글을 쓰다가 우울해질까봐 글을 쓰는 일이 꺼려졌다.

 

소설에서 나오는 흑인과 백인은 인종을 넘어서 흑과 백, 그리고 서로 반대되는 방향에 있는 인간군상을 드러내보인다.

목사인 흑인은 자신이 신을 '체험'했다는 것을 들어 백인의 자살을 막으려고 하지만, 백인은 신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그는 비단 신 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한다'라고 합의되어진 가치의 절대성 자체 마저 신뢰하지 못한다. 문화, 예술, 문명의 가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가 믿는 그 가치들은 결국 "연기가 되어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굴뚝으로 날아가버린" 가치들일 뿐이다.

 

<영화 '선셋 리미티드'의 한 장면으로 추측됨. 사진 출처는 구글>

 

이런 백인 교수는 인간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성으로 파악한 세상은 부조리하고, 도통 모든 일에 '의미'가 있는 조화로운 세계 같지 않다. 그는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규범에 냉소적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도 어려움에 처해있으면 도와야한다는 목사의 말에 그는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며, 모든 것은 '합의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그의 세계에 절대적인 가치나 믿음은 없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그의 삶이란 척박하고 끔찍하다. 그래서 그는 시속 130km로 달리는 기차 선셋 리미티드에 뛰어들려 하는 것이다.

 

그런 반면, 그 백인 교수를 말리기 위해 그를 잠시 자신의 집으로 끌어온 흑인 목사는 살인전과가 있지만 신을, 예수를, 성경을 믿는다.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얘기하기 껄끄러운 장소인 교도소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그곳에서 자신은 신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살 하려 했던 교수를 술꾼에 비유하며 "술꾼이 걱정하는 건 술로 죽을 기회가 오기도 전에 술이 떨어지는 것"이라 단언한다. 술꾼은 진짜로 원하는 것, 즉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은 진짜로 원하지도 않는 술을 끊임없이 갈구한다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라캉이 연상되는 것은 나 뿐일까?) 그렇게 말하며 목사는 교수가 갈구하는 죽음이 바로 이 술꾼의 술과 같은 것이라 단언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지만 얻을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에 교수는 죽음을 원하는 '체' 한다는 것.

 

이렇듯 서로 너무나도 다른 포지션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립하고 계속해서 대화하지만 끝내 생각의 차이를 좁혀가지 못한다. 백인 교수는 흑인에게 이끌려 잠시 생을 연장했지만, 결국 다시 떠나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처럼 느껴진다. 잠시간 믿음의 세계에 이끌려왔지만, 결국 끝에는 그곳에서 떠나가야하는 인간들에 대한 비유 말이다.

 

언젠가 수업에서 역사학과의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인간의 권리라는 것, 이른바 '천부인권'이라는 것은 모두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교수님은 거기에 첨언하시기를, 그렇게 만들기 까지,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보장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노력이 필요했는지를 상기하고 그 소중함을 느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현존하는 어떤 종교 교리 내에서의 신과 같은 존재는 믿지 않고, 그런 신들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신'이라고 우리가 규정하는 어떤 존재의 현존은 정말이지 믿고 싶다. 그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와 무관하게, 그런 것이 있으리라 믿고 싶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과 달리 정말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우리 삶에 어떠한 종류의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존재일테니까.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욕구와 함께 의문이 따라온다. 신이 정말 있다고? 그렇다면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그 신은 왜 우리를 만들었고, 우주를 만들었는데? 하는 의문 말이다. 아마 이런 끊임없는 불안을 생산해내는 능력이 지성을 발달시킨 인간에게 주어진 원죄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는데, 에잇, 어차피 죽을 용기는 없으니 어찌됐건 필연적으로 끝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일단 살아보자!는 것이다. 끝이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일단 주어졌으니 살아보자는 것. 하지만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선셋 리미티드>의 교수가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못하는 인간의 규범과 존엄성은 물론 만들어진 개념이다. 현대에서 인식하는 사랑, 연애 그런 개념이 만들어졌듯. 하지만 그 개념들이 만들어진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 개념들의 효과로 우리는 지금 동등하게(혹은 서로가 동등하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맹신하지 않지만 나는 간혹 생각한다. 그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던 시기에 내가 태어났더라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었을지를. 그 상상을 하다보면, 존엄성 자체의 절대적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존엄성의 필요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규범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지켜져야하는 것이 아닌지, 변화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레 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도 불안하다. 산다는 건,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건 항상 불안을 품고 있는 일이니까. 매카시가 건드리는 인간의 필연적인 고뇌를 읽으며 또 한 번, 이깟 인생, 하고 생각할 만큼 항상 요동칠 준비를 하고 살아간다는 건 버겁고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아, 무엇이 어찌되었든 나는 살고 싶다.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덜 아프게 살고 싶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의 매 순간마다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으니, 살아 있을 수 있을 때는 항상 최선으로 살고 싶다. 그러나 그 일은 왜 그다지도 어려운가? 왜 우리는 생에 충실하자 다짐하면서도 미지의, 그러나 반드시 올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불안감 앞에서는 이토록 무력한가?아, 산다는 건 정말이지, 전부 이런 것일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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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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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독서가 나를 이루고 있는 성분을 증명할 때가 있다. 아는 얘기, 모르는 이야기, 알지만 사실은 모르는 이야기, 그런 것들이 섞여 들어간 책을 읽을 때 나는 내가 어느 시대에 태어나 언제를 살아왔는지를 절감한다. 말이 묘하게 거창하다. 다시 말하자. 나는 90년대 초반 생이고, 막 페레스트로이카가 일어난 후 세상에 태어났고, 살면서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책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이런 설명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다름아닌 <리모노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이 소설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의 야권 인사 <리모노프>의 인생을 다룬 전기소설이다. '전기소설'이 되면서 이 소설은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줄다리기를 선보이는데, 덕분에 독서하면서 여러 번 나를 텍스트 바깥으로 꺼내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게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될 것 같아서.

 

카레르는 <리모노프>를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 한다. 그는 소설 안에서 '나'로 등장하며, 나는 리모노프에 대한 소설을 쓴다. 즉, 소설 속에서 소설을 쓰는(그렇다고 이걸 메타 소설로 보기는 어려울 듯한데) 구도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한다. 이 때 자신은 뭘 하고 있었고, 어떤 느낌을 받고 있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리모노프의 인생과 맞물려 나가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독자에 따라 호오가 있겠지만, 나는 이 방식이 '리모노프'라는 문제적 인물을 조명하는 데 꽤 효과적일 수 있는 방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리모노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곁에 있는, 고생을 좀 거쳤지만 마음만은 선하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고, 카레르가 계속해서 그런 사람도 '있다',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던 그 러시아의 민중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리모노프>

 

말하자면, '전기'를 썼음에도 카레르는 리모노프를 영웅으로 추앙하거나 추켜세우지 않는다. 리모노프는 일종의 파시스트이며, 극우세력이기도 하고, 스탈린과 나치를 옹호하는 사람이다. 그는 백혈병 걸린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속으로 욕을 퍼부을 정도로 우리의 시각에서는 '비인간적'이고, 폭력, 난교, 살인 등에도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도리어 그것들과 함께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은 그런 리모노프가 거쳐온 일생을 찬찬히 정리하면서 현재 리모노프의 위치까지를 서술하는 데에서 끝이 난다. 안타깝게도, 소설 내내 풍운아처럼 온갖 고생을 거치며 살아온 리모노프의 현재는, 굳이 서술하자면 '별 볼일 없다.' 독자도 작가도 이걸 잘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마치 우리의 고생을 성공에게 바치는 대가처럼 생각해서 일 것이기도 하고(마치 그게 등가교환이 되는 것이라는 것처럼), 리모노프가 보여주었던 강렬한 모습이 결말에는 견지되지 않아서 일 것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그 헷갈리는 러시아식 이름과 지명을 계속 감내하고,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장장 53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전부 읽었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시시한 재야인사가 되어버렸단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억울했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건 소설이 아니라 '전기 소설'이고, 현실은 소설 같지 않으니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가장 현실을 훌륭하게 모방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게 소설의 본령이라는 점을 나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도 프랑스판 '리모노프'>

사실 이 소설을 며칠 간 들고다니면서 읽었고, 그 때마다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가 만들어간 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책에 숨어 있었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옐친이 이끌던 이른바 '민주적'인 정부의 말로, 잠깐 동안의 쿠데타와 푸틴까지. 리모노프라는 사람이 그 굴곡을 겪으면서 살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가 이미 신기하다. 그런 리모노프의 정신세계는 더더욱 신기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리모노프와 카레르의 세계가 양 쪽에서 나타나는 구성이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하는데, 각각 러시아-프랑스라는 출신의 특성상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그 당시 그 사회가 품고 있던 가치와 문화의 틀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리모노프는 프랑스인 카레르가 옳다고 배운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사람이지만, 공산주의 이후 경쟁적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이식하지 못한 러시아인들의 어떤 정서가 그런 리모노프를 지지했고, 그를 정치권의 인사로 만들었다. 카레르와 서방은 그런 리모노프에게 호의적일 수 없었겠지만, 그런 한편,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자행하는 일에도 호의적일 수 없었다. 러시아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방식의 껍데기를 뒤집어쓰던 간에 독재적이었고, 서방은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어떤 행태를 보이는 지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연 우리가 옳다고 믿는 모든 가치는 강제되는 순간 위험해진다. 그 내용이 얼마나 선하고 '인간'적이며 좋은 지에 전혀 무관하게.

 

카레르는 이런 부분을 꼬집으면서, 리모노프가 보여주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린다. '점잖은 사람'이자, 일종의 득도한 사람처럼 보이는 리모노프의 이중성을 건드리면서 그를 특별한 사람처럼 만들어보이지만, 사실 이런 카레르의 시선은 러시아 나츠볼들을 보는 내내 지속된다. 폭력적인 언사를 아끼지 않지만 순박하고 의리있는 사람들. 순박하고 정이 있지만 폭력을 자행하기 꺼리지 않는 사람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카레르가 마치 그것이 이 사람들의 독특함인 것 처럼 느껴지도록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이미 계속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폭력성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말하자면, 현재 서구의 '교양인'처럼 문명화되고 교육받은 우리는 리모노프와 무엇이 그리 다른가? (삶의 어떤 양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떠오르는 생각의 문제에서.)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다르다.

다른 삶을 거쳐왔고, 다른 체제에 살았으며, 다른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그 다름을 당신이 인정할 수 있는가다. 정말로 당신은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있나? 그 시절을 이해하고 있을까? 제국의 영토를 가지고 있던 나라가 한 순간에 해빙으로 나아가면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자국민들이 가지는 느낌을 우리의 측면에서 상상하고 생각해 소거하는 건 아닌가? 타자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가 옳다고 믿는, 우리의 삶을 지배해온 가치관에서 공산주의를 볼 때 흔히 벌어지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을 경계하자.

 

나는 90년대 초반에 태어났고, 공산주의는 전혀 알지 못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상상해야 한다. 그 시절 그 이념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이미 그 이념이 현실에서 구현되었고, 그 결과 실패했다고 배웠다. 그 지식이 내게 준 선입견을 경계하며 세상을 읽지 않으면, 결국에는 내 세상 속에 갇혀버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삶이 내 인생의 결과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리모노프>가 내게 준(카레르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하나의 교훈은 이것: 너 자신을 알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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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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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이 증명하는 언어라는 것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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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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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그 중 특히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 중 이른바 '교양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나는 마치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기분이 든다. "현대인들 중 속물 아닌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글쎄, 여기서 말하는 '속물'을 정확히 무어라고 지칭해야 할까? 선한 척 하지만 사실 선하지 않고, 도덕적인 체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며, 심지어는 '도덕적'인 것 조차 자신의 특성과 명예가 되기 때문에 선택할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 혹은, 우리가 흔히 '속물'을 지칭할 때 말하듯 교양이 없고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

 

나는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사실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가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대중소설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없는데, 그래서 그런 쪽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기도 하다. 현실에 숨쉴 것 같은 속물, 나를 보는 것 같은 인물의 허영과 이중성을 밀고하는 듯한 글을 읽는 것보다, '캐릭터'의 완전하고 논리적인 세계를 보는 게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앞면은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 않으나..>

 

하지만, <플래너리 오코너>는 결단코 그런 위안이 되는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끈질기게 문학의 본분을 실현하려는 듯 독자를 붙잡는다. 약 30편에 달하는 단편을 묶어둔 단편집이니만큼 읽다보면 저자인 오코너 자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얼핏 이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내가 상상한 오코너는 이런 이미지였다.

 

얼굴 하얗고 창백한데 동그란 알이 달린 1900년대 지식인풍 안경을 쓰고 늘 책을 보는 머리 좋은 여자.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는 얼굴로 앉아 '그게 진짜 그런가?'하고 딴지 거는 사람. 세상이 아름답다고는 도통 믿을 수 없고, 사람의 미덕 역시 믿지 못하며,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낭만적 인간형 따위는 우습게 생각하는 여자.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 <플래너리 오코너>를 한 번 손에 들고 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소설을 전부 읽어나가 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 평가조차도 후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코너의 단편에는 몇몇 소재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시골-도시','검둥이','기독교','예수' 등이 단편적인 예시다. 오코너는 이런 소재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활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전개시켜 나간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녀는,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알고 있다'는 인간의 자의식과 자신감을 가볍게 비웃는다. '선(善)'하면 복을 받는다는 순진한 권선징악 정신이나 '선' 혹은 "사랑"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리라는 생각 역시도 조소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오코너가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사랑이나 정의감으로 구원받는 얘기? 그건 소설 속에나 있는 거고."

 

그래서일까?

분명히 상징이 들어가 있고 부조리하게 느껴질 법한 상황으로 점철되어있는 소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오코너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단면을 읽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두께가 어마어마하다. 한꺼번에 다 읽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뿐 더러 좋은 글임에도 질리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탕 아껴먹듯 읽어야 한다! ㅠㅠ>

 

그 어떤 단편에서도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리라 '예상'하거나, 자신의 기준에 맞춰 타인을 재단하고 '상상'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기대며 예상은 모조리 배반당한다. 검둥이는 모두 아틀란타에서 왔다, 검둥이는 자신보다 아래다, 라고 생각한 노인은 옆집 이웃으로 뉴욕 출신 흑인을 만나게 되고, 자신은 우월하고 선량한 백인이라 생각하던 부인은 자신이 '백인쓰레기'라 평한 여자를 앞에 두고, 여대생에게 "지옥"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듣는다. 플로리다에 범죄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플로리다 여행일정을 취소한 할머니는 자기 고집대로 가족들을 이끌고 가지만, 범죄자는 플로리다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 앞에 나타난다.

 

뿐만인가?

'사랑'으로 뛰어난 아이에게 기회를 주려 했던 선생은 아이의 비웃음과 조롱을 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와의 커넥션 마저 잃어버린다. '추방자'를 데려와 농장의 일원으로 삼자 도리어 농장에서 누군가는 추방되고, 추방자만 추방시키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생각했건만, 추방자의 추방과 함께 모든 것의 몰락이 찾아온다. 오코너의 소설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삶의 아이러니, 사람들의 이중성, 그리고 완고한 기독교적 믿음이 가진 허상성을 가감없이 다룬 오코너의 언어 하나하나가 신랄하고, 그걸 읽어나가다보면 뭐랄까 좀, 씁쓸해진다. "사람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걸까?" 이 질문이 절로 나오게 하는 힘이 소설 안에 있다.

 

오코너의 소설은 당연하게도,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글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힘들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대안이 있음을 말하는 소설이 있는 반면, 오코너의 소설은 대안이 아니라 그저 후벼파고, 이면을 바라보게 하고, 문명 안에서 "푸줏간"과 "경찰관"의 존재 덕에 유지되는 이 거대한 인간사회라는 실험관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뺨을 내리치는 소설에 가깝다.(물론 푸줏간과 경찰관은 콘레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이지만.)

 

단점이 있다면, 수록된 단편의 수가 많다보니 한꺼번에 읽으면 약간 버거워지고, 세상이 싫어지고, 그냥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몰려오게 된다는 점! 하나하나 따로따로 보는 미덕이 필요하다. 나는 하루에 6-7편씩 읽었더니 나중에는 어으어...이런 상태가 되어서 무슨 괴기 독서몬 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들을 몇 가지 언급하자면,

 

<좋은 사람은 드물다> <불 속의 원> <인조 검둥이> <추방자> <좋은 시골 사람들>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 <계시>

 

특히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가 가장 인상 깊었다. 인간의 이성, 사회에 팽배한 믿음, 사람에 대해 문명이 전제하는 것들을 모두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당연히 응당 사람이라면~해야지! 하는 생각을 뒤집는 솜씨도 일품. 기독교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부분 자체에도 공감 가는 구석이 많았다. <추방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사람들이 미국에 일꾼으로 오게 된 상황을 다뤘는데, 인간의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겹의 사람(이 개념을 뭐라 해야할지. 서벌턴이라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은데..), 그 층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던 소설이다. <계시>도 마찬가지.

 

읽으면서 계속 함께 생각났던 다른 작품들이 꽤 있는데,

먼저 <케빈에 대하여>와 <다섯번째 아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이 그저 존재하는 '악'과 같은 아이와 사회화된 사람 사이를 다룬 두 명작이 계속 떠올랐고,

조지프 콘레드의 <어둠의 심연>(영화화한 <지옥의 묵시록>도) 역시 간간히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최근 읽었던 한국 단편 소설로는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를 같이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그러고보니 김연수 작가가 이 오코너의 소설 중 <좋은 사람은 드물다>를 추천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음, 확실히 읽어봄직 한 소설. 내가 느끼기로는 현대소설 중 오코너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은 정말 많은 것 같다. 다만 오코너처럼 표현하는 작품은 오코너의 것일 뿐. 그리고 그건 어떤 작품 간의 우열의 문제는 아닐테다.

 

벅찼던 독서량에 부지런한 독서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준 책에 감사를 표한다. 흑.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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