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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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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은 종종 가르치셨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어릴 적에는 그런가보다, 저게 역사과목의 '의의'니까 열심히 외워야겠다, 하고 외웠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 수록, 과연 이게 정말 역사의 의의일까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그게 역사기록이 존재하는 의미라고 하기에는, 속된 말로 하자면, 지금 현재가 너무 '구리다'.

독재를 겪고도 다시 독재 속으로 들어가는 나라, 포퓰리즘을 겪고도 포퓰리즘에 휘말리는 사람들, 부패를 척결하고 나서 다시 부패로 돌아오게 되는 사회. 이런 모습을 보면,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지만" 정말로 "배우는가"는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동네 아이들>은 이 지점을 서구사를 통해 건드리는 이집트 소설이다. '이집트' 소설이라고 하니 굉장히 생소한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성경(구약, 신약)과 마호메드의 이야기,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소설 속의 상징도 무엇을 뜻하는지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서문에서 화자가 밝히는 대로, 이 책은 '우리 동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체가 '인류사'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인류사'에서 동양인으로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양, 즉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은 배제되어있다는 점이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소설은 우리 동네에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대저택, 흡사 에덴처럼 묘사되는 이 저택에서 이드리스가 쫓겨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택의 주인 자발라위의 첫째 아들 이드리스는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막내이자 천한 어머니를 가진 아드함이 뽑히자 아버지 자발라위에게 반감을 품고 그에게 반발한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저택 밖으로 쫓겨난다.

이드리스는 이후 꾀를 부려 신실한 아드함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데, 이때 아드함을 부추기는 것은 그의 아내 우마이마다.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만한 이 구도는, 바로 아담-사탄-이브의 구도다. 이렇게 볼 때, 저택의 주인 자발라위는 '신'을 표상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카인과 아벨, 모세, 예수, 마호메드의 이야기를 차례로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는 언뜻 역사의 이야기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를테면 마호메드의 상징인 '까심'이라는 인물의 경우 나이가 많은 상속녀와 결혼하고, 예수의 상징인 리파아는 아내(즉, 유다)의 밀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 덕에 술술 읽히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그 탓에 예상가능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드함-후심-자발-리파아-까심-아라파(아담-아벨-모세-예수-마호메드-근대인) 이 순서로 내려가면서 점점 자발라위와의 접촉점이 없어지는 것처럼 형상화되었다는 데 있다. 아드함은 자발라위(신)의 아들이었고, 그와 직접 대면했지만, 자발은 어두운 곳에서 그를 만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리파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까심은 그의 하인을 만나는 식이다. 즉, 자발라위와 아드함의 후손은 점차점차 멀어진다. 그러더니, 근대 과학을 상징하는 '마법'을 쓰는 아라파에 이르러서는 아예 자발라위가 죽어버린다. 과학의 시대 이후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고 찾지 않는 인간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화 해놓은 점이 이 소설의 탁월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일하게 어떤 광채도, 어떤 지적인 힘도, 강한 의지도 없는 아라파의 모습이 유독 인상깊고 씁쓸하다.

 

 우리 동네에 망각이라는 전염병이 돌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본보기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망각은 동네에 전염병처럼 늘 창궐한다. p.304 (<자발>편이 끝나면서)

 

어쨌든 사람들은 안락한 생활을 더없이 기뻐하며 즐거운 삶을 누렸다. 그들은 자신감에 차 확실하게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망각은 전염병처럼 우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까? p.440 (<리파아>편이 끝나면서)

 

 

 

소설은 매 편이 끝날 때마다 '망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망각은 계속해서 평온해진 마을을 다시 휩쓸고, 마을 사람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수장과 관리인을 출현하게 만든다. <까심> 편에서 사람들은 이제 망각을 완전히 몰아내야할 때가 왔노라고 이야기하지만, 마호메드 이후 이슬람을 생각할 때 그 말은 아주 공허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까심 뒤에 오는 자를 보라. 그는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근대인, 가장 초라한 주인공 아라파다.

 

다행스러운 건, 바로 그 아라파, 용기없고 비겁한 아라파가 마지막 순간 하나슈에게 비밀의 노트를 남기고 떠난다는 점이다. 그 소식만을 믿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기다린다. 하나슈가 언젠가 나타나 이 마을을 다시 불의 없는 마을로 바꿔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인내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보게 될 거야."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다면, 우리는 그 앞의 압제와 그에 맞서 이긴 정의를 배우는 것이 아닐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보다 우리는 하나의 패턴을 배운다. 무언가가 과도하게 일어서면, 반드시 반대 급부가 생긴다. 부패가 만연하면 문제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 일어난다. 그가 세운 정의는 시간이 지나면 퇴색한다. 곧 다시 부패가 일어나고, 이에 대한 반(反)으로 정의가 일어난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진보해나가고, 그 결과 언젠가는 최상의,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글쎄, <우리 동네 아이들>을 보다보면, 나아지는 것은 기술이고 물질일 뿐 사람의 정신이란 참 엇비슷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다. (게다가 최근 한국사회를 보면, 이 정신이라는 것이 결코 근대적 교육만으로 향상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이드리스의 딸과 아드함의 아들이 결합해서 나온,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선과 악, 무지와 교활함을 뒤섞어 놓은 생명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반복, 이 무한한 망각 자체가 인류의 운명이 아닌지,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지,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이 ​폭력에 대한 무기력감으로 번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반복은 커녕 고통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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