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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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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갔을 때 나는 미국의 싸이월드,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를 처음 접했다. 후자의 경우 내가 쓰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아예 손을 대지 않았지만, 접근성이 좋고 당시 미국 고교생들 모두가 하나쯤 가지고 있던 페이스북은 재빨리 계정을 만들었더랜다. 하지만 08년도만 해도 우리 손에는 폴더폰이 있던 시대,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페이스북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지냈다. 가끔 외국 친구들과 연락하는 용도로 쓰긴 했지만, 그것도 그뿐, 입시철이 되자 그 이국적인 SNS를 사용할 일이 도통 없었다.

 

그러다가 2010년 연말, 내 수능이 끝난 후, 한국에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한다.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특정 사이트들이 '나'라는 개인과 보다 강하게 연결되었다고 우리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여기 지나친 비약을 감히 덧붙이자면, 나는 스마트폰의 출현과 싸이월드의 종말 사이에는 꽤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이라는 기계가 제공하는 환경이 '싸이월드'보다는 '페이스북'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리기 위해서는 싸이월드-페이스북을 비교하고 스마트폰의 특성을 정리해야한다. 하지만 이 리뷰는 그런 논증을 위한 것이 아니며, 때문에 나도 그냥 직관을 발휘해보겠다.)

 

어쨌거나.

페이스북이 한국을 휩쓸기 시작한건 2011년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카카오톡, 트위터 등의 SNS가 활발해졌고, 2015년인 지금 이 SNS 중 하나도 사용하지 않는 핸드폰 유저를 찾기는 정말이지 어렵다. 우린 흔히 메신저로 SNS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SNS와 메신저 사이에는 하나의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다. 바로 '자기 표현'의 영역이다. SNS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꾸민다. 페이스북에서 그렇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프로필 메시지가 그러하며, 트위터에 올리는 짧은 트윗과 리트윗 등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 자기표현은 본질적으로 시청자를 설정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SNS가 현대인을 조종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페이스북 심리학>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자기표현이 가능하다는 특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책은 꽤 상세하게 다룬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가 되고 싶은 누군가가 되도록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며, 어떤 경험을 느끼기 보다 그 경험을 통해 타인의 반응을 얻길 원한다. 계속해서 관중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들로부터 얻는 손쉬운 격려와 지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순간 개인의 경험은 현실에서 유리되고, 쇼윈도 뒤의 장식품 같은 존재가 된다. 책에서 소개하는 한 끔찍한 일화는 이러한 경향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

 

"페이스북에서 가장 불쾌했던 것은 뉴스피드를 확인하다가 아기가 관에 들어있는 사진을 본 일이다. 내 친구는 생후 3개월 된 딸아이가 죽었을 때 관에 담긴 모습을 진지하게 찍어서 올렸다."

-페이스북 심리학, p.267

 

이 사례에 나오는 친구는, 딸의 죽음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고 이에 대한 반응을 얻는다. 물론 그녀가 이런 행동을 했다 해서 딸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뜻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이토록 개인적이고 사적인, 어찌보면 쉽게 애도가 끝나지 조차 않을 일을 '올려야 하는 일' 혹은 '알려야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건 분명해보인다. 그것도 아는 친구들에게만이 아니라 꽤 공적인 공간인 페이스북에 전시해야한다고 여기는 건 묘한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페이스북의 구조를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친구 중 한명만 내 글에 좋아요를 눌러도,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공개될 수 있는 곳이다.

 

<페이스북 심리학>은 이런 페이스북의 '사생활'들이 어떻게 전시되는지, 이에 대해 한 개인이 느끼는 압박은 무엇인지, 그리고 페이스북이라는 매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폭력과 인간형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지점은, 내가 아니라 10대들의 페이스북이다. 20살에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알게된 나와 달리, 지금 10대들은 훨씬 어린 시절부터 스마트폰, 페이스북과 함께 자랐다. 말하자면 SNS NATIVE 다. 현실에 대한 그들의 인식, 기술과의 밀접성은 당연히 나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읽게 된 10대들의 SNS 문화는 충격적이었다. 일단 SNS가 집단 따돌림의 매개체가 될 수 있고, 직접적인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10대들이 SNS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재미있었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SNS를 '성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는 지가 아주...) 이들이 그대로 어른이 된다면, 기성세대보다 훨씬 '전시하는' 삶에 익숙한 세대가 될 텐데 이런 삶의 경험이 어떤 인간형을 만들어낼지 두고 볼 일이다.

 

읽으면서 종종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가 떠올랐다. 이 철학자의 예지력이란 놀라울 정도인데, <페이스북 심리학>이 그 철학적 단상이 기대고 있는 실제의 현상들을 꽤 단순하고 읽기 쉽게 정리했다는 생각이다.

다만, 책을 읽는 내내 조금 아쉬웠던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페이스북 심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상에 대한 분석이 크게 심도있지는 않다는 느낌이었다. 어렵지 않은 책은 물론 좋지만, 음, 어렵지 않다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얕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특히 대안 제시 부분에서 그러했는데, 지나치게 상투적인 말이 많아 유독 그런 느낌이 심했던 것 같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는 부분은 대부분 좋았으나, 그보다는 이상적인 말이 많은 느낌이었다.

 

둘째로, 페이스북에 있는 감정조정자들에 관한 분류에서 투박하고 엉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 감정조정자들은 현실에서 성격장애 및 여러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일텐데, 이를 단순히 '페이스북에 나타나는 누군가들'로 환산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현실과 페이스북을 완전히 구별해버린 느낌이 들어 이 부분이 좀 더 세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옛날에 '소시오패스를 보면 무조건 피하라'라는 말과 소시오패스의 행동특성만 제시할 뿐 그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해결방법 등등을 얘기하지는 않은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은 책이었고,굉장히 최근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더할나위 없었으리란 생각을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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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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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책은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 미국에서는 유명한 작가이고, 그의 유작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처음 읽는 필립 로스 작가의 책이었는데, 전개 방식이 상당히 독특했다.

'상당히 독특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조금 풀어보도록 하자.

책의 결말부분 직전까지 독자는 이 소설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황, 장소, 인물에 대해 제 3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전개 과정을 보면 영락없이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느껴지며, 중간중간 ‘–‘를 통해 나오는 독백 같은 서술 또한 필립로스의 독특한 서술 방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결말을 보고 난 후에는,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챈슬러 애비뉴 놀이터의 한 소년의 시점에 의해 전개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순간이 바로 <네메시스>가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의 독서를 유도하는 부분이다. 결말을 보고 책을 다시 완독하는 순간, 모든게 다르게 느껴지는 소설은 흔치 않았는데….

소설 살육에 이르는 병처럼, 같은 내용이지만 서술자의 정체에 따라 또 다르게 느껴지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소설을 오랜만에 접하는데전개 장치가 상당히 정교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간략하게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이렇다.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핵심 화두라 할 수 있는데, 소설은 애비뉴 놀이터의 감독인 버키라는 인물이 전염병이라는 상황과 만나게 되면서 겪는 일을 그린다. 열정과 올바른 가치관, 도덕관념을 지닌 모범적인 인물이 폴리오라는 전염병으로 인한 비극 속에서 어떻게 갈등하는지,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를 제 3자의시선을 통해 잔인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최근 메르스 이슈가 있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네메시스가 매우 현실감있게 다가온 부분이었다.

초반부, 네메시스를 통해 전염병이라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두려움, 목적없는 분노, 슬픔과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굳건한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한 편의 모범적인 감동소설을 보는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극 중반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폴리오. 감염경로도, 치료법도 없다는 극한의 두려움에 노출된 사람들을 대하며 버키는 조금씩 무너저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책 뒷면에 적혀있는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타락시켜. 두려움을 줄이는 것. 그것이 자네의 일이고 내 일이야라는 대사처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버티면서 휩쓸리지 않고 두려움을 줄여나가던 버키는 두려움으로 인한, 갈 곳 없는 분노에 마주치며 점차 스스로가 소진되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때에 약혼자인 마샤의 인디언 힐의 물놀이 감독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수락하게 되면서 버키의 내면은 겉잡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가득차기 시작하는데...

폴리오라는 재해에 있어서, 개인이 느끼는 책임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주인공이 느끼는 책임은 거의, 소위 말하는 '끝판왕' 수준이다. 도덕 종결자 수준이라고나 할까.

본래 이렇듯 선량하기만한 주인공의 모습에는 선뜻 이입하기 힘든데,  필립 로스는 과장없이 얘기를 전개해나가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미국 대표 작가의 위엄이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버키는 본인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인디언힐에서도 행복을 붙잡지 못한채 끊임없이 신의 존재 이유, 본인의 의무에 대한 책임감, 도피로 인한 죄책감을 물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 폴리오 감염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비극은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마치 순교자처럼,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주인공은 본인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자연스럽게 포기한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그 모습이 사실 선뜻 이해하기 쉬운 것만은 아니다. 마지막, 약혼자의 절규는 이런 버키에 대한 타자들의 견해 중 하나를 잘 대변해준다.

너는 우둔하게 굴고 있지만, 사실 너는 우둔하지 않아. 너는 무지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무지하지 않아. 너는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 사실 너는 미치지 않았어'

 

개인적으로는 전염병이라는 극적이지 않은 주제와, 비현실적인 주인공으로 개인의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고뇌를 이렇게까지 파헤치는 중에도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끊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굉장한 수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네메시스>는 독서 내내 특정 상황에 대한 개인의 책임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를 묻게 한다. 놀이터 감독으로서 주인공이 지고자 하는 책임은 도의적일지 모르나, 과해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전파 경로도, 예방 방법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두려움을 줄이던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초인적인 것이었으니까.

뉴어크에서 인디언 힐로 이직한 것 또한, 남들이 비난할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겨진다.

아무것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넓지 않으니까. 폴리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직했다고 비난을 받는다면, 글쎄... 과한 도덕과 이상론은 사람을 설명하지도, 지켜주지도 못한다.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솔직히 인디언 힐에서 주인공이 하는 고뇌를 읽으며, 버키라는 인물이 너무 착해서 이런 자책감에 빠져있구나, 하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들었다. 뭔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심리 자체에는 나를 이입시킬 수 없는 느낌?

하지만 주인공이 폴리오 보균자라는 상황이 오면, 이 이입이 조금 더 쉬워진다. 근래 한국의 상황이 겹쳐졌던 탓일까. 이 지점에서 버키가 직면한 죄책감의 무게가 묵직히 와닿기 시작했다. 본인이 괴로워하던 상황, 본인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죽어버린 비극의 원흉인 폴리오. 바로 본인이 그 폴리오 보균자였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이후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에도 납득이 되던 이유는, 그런 포기가 개인의 윤리적 가치관에 기반해있었기 때문이다. 현실과 아두 유리되어있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윤리적, 보편적 가치관 말이다.

"내가 결혼을 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나가는 불치병에 걸렸다면 배우자를 놓아주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닐까?"

한번쯤은 던져보게 되는 질문이고, 그 상황에 직면하면 더 절절하게 되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아마 모두 한번쯤 상상해봤을 테고.

 

다만 좀 답답한 건, 주인공이 그 어떤 다른 길도 포기한채 스스로의 세계에 본인을 가뒀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 스스로는 순교자처럼 본인을 생각하겠지만…. 글쎄. 독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비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데도 모든 것을 짊어지며 이게 최선이었다라고 자위하는 모습에 속이 답답해졌다고나 할까. 이런 답답함은 마지막으로 가면서 묘한 연민처럼 변화하는데, 이런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솜씨가 아주 수려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상황에 대한 본인의 책임의 범주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묻게 만드는 책. 읽어봄직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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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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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현재의 20대(보다 정확히 20대 중후반)를 3포세대라고 한다. 근래 들어 유독 많아진 20대 청년들의 성향을 지칭하는 말 중 하나인 이 '삼포'세대는 말 그대로 3개를 포기한 세대다. 연애, 결혼, 출산. 한국에서 이 셋 모두를 감당하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지 보여주는, 다소 해학적이면서도 슬픈 별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을 다루는 소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인 듯 한데, 아무래도 연령대가 비슷한 탓도 있을 테고, 현재 20대가 경제적으로 워낙 어려운 세대로 지목되면서 여러 세대갈등 양상이 나타나는 탓도 있을 것 같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이런 한국 청년이 가지고 있을 법한 고민과 '한국'이라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복잡다단한 감정을 맛깔스럽게 풀어낸 소설이다. 본래 공대를 나와 회사에 다니다가 기자가 되고, 이후 전업작가가 된 장강명의 놀라운 이력이 증명하는 그의 유연성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분명 지금 약 40대의 작가가 쓴 글인데, 꼭 옆에 앉은 친구가 하는 말처럼 친근하고 부드럽다. 더군다나 그 글에서 느껴지는 묘한 여성스러움과, 살아 숨쉬는 듯한 인물이란. 아주 잘 읽히는 글이어서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지만, 기실 그렇게 만드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감안하면 글솜씨가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싫어서』는 제목에 충실하게, 한국이 싫어서, 한국에 살 수가 없어서, 한국의 경쟁구도와 그 모든 '참고' 살아야하는 것들을 포용할 수가 없어서 호주로 떠나기로 한 계나의 이야기다.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계나는 나름대로 좋은 학교를 나와 나름대로 대기업에서 일하며, 오래도록 만나온 남자친구까지 있지만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왜냐면 한국에서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은 경쟁 문화나 대화가 허공에 떠도는 것만 같은 인간 관계 등, 그녀가 토해내는 불만에 공감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 계나에게 호주는 꼭 꿈의 나라처럼 보이고, 계나는 호주로 떠난다. 

물론, 그런 호주가 유토피아처럼 서술된다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호주는 당연히 사람사는 곳이지 유토피아가 아니며, 한국만큼이나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인종차별 같은 것들. 하지만 계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에 살기를 선택한다. 장강명은 계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여주면서, 계나와 대치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 다른 삶의 가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1인칭 화자인 계나가 가진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탓에 소설이 조금 편협해보이는 것이 단점.) 약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분명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는 것이 맞는데, 꼭 작품이 한 쪽편에서 서술되어있어서 상대방이 괜히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 (그것을 작가가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특히 그 점이 두드러지는 장면은 계나가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다. 몇 년이 지나도 똑같이 시어머니 흉을 보고 IT회사 흉을 보는 친구들을 만난 계나는 친구들이 '본질적'인 문제를 바꿀 용기는 없고 그저 불평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라고 느낀다. 물론, 계나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나의 친구들이 선택한 그 방법(말하자면, 그저 불평하기)은 문제적일지 언정, 분명히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시어머니에게 대놓고 화를 내지 않는 이유가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존재한다. 

작품 후반에서, 계나는 이 점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행복한 사람, 저렇게 행복한 사람, 우리는 유형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지속적으로 발화한다. 호주에서 사는 게 여기서 사는 것 보다 나을껄? 호주에서 웨이트리스 하는 게 한국에서 동사무소 일 하는 것보다 나을 껄? 계나는 호주에 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말을 거침없이 뱉어낸다. 그런 계나의 모습은, 글쎄, 쿨해보이기는 하지만 그것 이상을 느끼기가 어렵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뒷부분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평론가는 그것을 '존재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체 '존재'하는 삶이라는 건 뭔가? 그리고 대다수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나는 친구들에게 '본질'적인 것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문제적 상황에 부닺힌 계나 본인의 선택은 호주로의 도피였다. 나는 계나가 무슨 운동가처럼 제도와, 팽배한 사회 분위기와, 고정관념, 혹은 이른바 '꼰대' 들과 싸워야 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녀는 적어도 본질이 무엇인지는 보여주어야 했다. 계나의 말은 너무 가볍고, 외피만을 건드린다. 이런 저런 투정, 이런 저런 행태, 이런 저런 것들, 그런 것들은 그런데 왜 생기고, 왜 한국은 그것들을 계속 유지하면서 나아가려고 한단 말인가? 소설은 그 핵심에 대한 발화는 살짝 피해간다. 대신 이런 저런 현상들을 쭉 펼쳐준다. 물론 그것으로도 좋다. 소설이기 때문이다. 계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조금은 불편하면서도 꽤 즐겁고 경쾌하다. 다만 아쉽다. 묵직하게 물음을 남기는 것 없이 넘어간 페이지들이 기억을 치고 올라올 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계나가 가지고 있던 본질적 물음과 그녀의 견해가 조금은 궁금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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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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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 적, 읽고 엉엉 운 책이 있다. 제제와 뽀르뚜까가 나오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다.

나는 그 이후, 나이 든 사람과 어린 사람 사이의 우정에 관한 묘한 로망 같은 것이 생겼다. 이를테면, <세인트 빈센트>나 <기쿠지로의 여름> 같은 것에 대한 환상 말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처음 읽을 때에도, 어렴풋이 '그런 이야기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웬걸.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하기 전까지도 '사샤'라고 불리는 사르트르는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미셸은 그저 자신이 그닥 극적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그 클럽에 사르트르가 있다는 것을 알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가 가벼운 무안을 당하는 정도로 1권은 끝이 난다. 도리어 중요해보이는 것은 미셸과 그 클럽에 있는 다른 인물들의 서사이다. 물론, 사르트르는 그 이후 점점 커지며 서사를 장악해오지만 말이다.

 

사실, 처음 우리는 한 사상가를 묻는 이 책을 읽으며 '사르트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파시즘을(정확히 말하면 파시즘적 성향을 보이는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자신이 틀린 것을 어쩌면 알고 있었으나 끝까지 주장을 번복하지 않던 사르트르. 그는 어쩌면 최후의, '낙천주의자' 였을 것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이 사르트르의 문제를 조급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야기는 미셸로부터 시작한다. 독서하는 아이, 수학을 못하는 아이, 테이블 테니스를 잘 하는 미셸을 통해 점차 시대상이 드러난다. 알제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 반면에 만연해있는 '트로츠키'주의자와 이외 공산주의자들, 프랑스로 망명온 다국의 사람들까지, 모두가 미셸의 삶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낙천주의자들이 모여있는 체스클럽이 나온 후, 소설은 미셸과 이들 인물 각각의 삶을 조금씩 섞는다. 어떻게 서로 반대편이던 러시아인들이 합쳐졌는지, 헝가리에서 온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소련에서 온 비행사는 어떤 연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등등. 그 이야기 하나하나에 시대가 녹아있고, 인물들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당시의 분위기가 묻어난다. 마치, 우리의 많은 후일담 소설들이 그러하듯.

 

물론 그것들은 낯설고 생소하다.

91년, 정확히는 92년에, 우리의 앞에서 공산주의는 끝을 고했다. 인류의 실험은 끝이 났고, 많은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져들면서도 해방감을 누렸다. 92년 생인 나는 그 감각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들을 체감할 수 없는데, 때문에 소설 속에 나오는 세실의 말이나 사라져버린 피에로의 말 같은 것을 읽노라면 궁금증이 밀려온다. 그 이상, 그 생각은 대체 어떤 느낌이었단 말인가?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로 가장 빈번하게 지적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적'과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다. 이 생각은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그려내는 사회에서 유효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의 세상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세상,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이다. 틀렸음을 어쩌면 알면서도 믿지 않을 수 없던 사람, 졸지에 먼 타국에 와 있게 된 사람, 순식간에 가족을 잃은 사람, 핑크빛 미래를 점차 잿빛으로 물들이다가 돌아가버린 사람까지. 그곳의 모두는 외롭고 쓸쓸해보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지탱한다.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옭아매어 뿌리내리게 돕는다. "그런 식으로 사람은 자기가 걸어갈 길을 걷게 된다."(p.284)

 

그리고 삶은 변해가고, 시대 역시 변해간다.이 방식은 아주 은근하고 일상적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미셸이 로큰롤을 좋아하는 것 만큼이나 일상적이며, 삶에 스며든다. 변화란 그런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은근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비춰준다. 마치 그 시대의 연애, 그 시대의 사랑, 그 시대의 친구를 노래하는 옛날의 소설들처럼. 그래서 일까? 분명히 낯선 타국의 이야기, 낯선 시대의 이야기인데도 빈번하게 우리의 옛날과 소설은 겹쳐보인다. 그땐 그랬지,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지, 읽는 내내 그 소리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좋은 소설이 그렇듯, 때로 작품은 체감할 수 없던 것은 체감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문학의 힘이란 어쩌면 그런 동일시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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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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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3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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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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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최근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한국에 가장 잘 알려졌을 작가, 줄리언 반스. 영국문학에서는 입지가 탄탄한 작가라고 하는데, 나는 <예감은~>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였다. 이번 작품이 내가 읽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나는 <예감은~>을 매우 재밌게 읽은 독자 중 한명인데, 그래서 앞으로도 아마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쭉- 찾아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한 작품이 재미있으면 다음 작품을 읽고, 혹 그래서 실망하면 더 이상 그 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는 것이 내 못된 버릇인데, 다행히 줄리언 반스는 앞으로도 꾸준히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용감한 친구들>이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른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내는 작가이니 만큼, 줄리언 반스가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생애와 조지의 삶을 다루기도 결정한 것은 놀랍지 않았다. 반스는 <예감은~>에서도 묘한 트릭을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서사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미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용감한 친구들>은 사실 그 묘한 장르적 쾌감, 트릭과는 살짝 거리가 멀다. 이 소설은 분명 조지 에들지 사건을 다루지만, 그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홈즈와 조지의 삶이 중심이고, 거기 잠시 사건이 삽입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지는 성실하고 올바른, 다소 고지식한 영국 성공회 목사의 아들이며, 홈즈는 어릴 적부터 기사도 정신과 어머니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지켜온 백인이다. 작품이 '용감한 친구들'이라는 제목을 취하고 있음에도, 이 둘은 1권이 끝날 때 즈음 되어서야 겨우 한 번 교차하고, 2권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만난다. 그나마도 대단한 우정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소개하면서 에들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란 굉장히 어려운데, 분명 일대기적 서사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그 사건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며, 그 사건을 논의하지 않고 정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 중 한명인 아서 코난 도일은 워낙 유명하지만, 또 다른 주인공 조지에 대해서는 간략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사실 나처럼 꼼꼼하지 못한 독자라면, 조지의 정체를 처음부터 단번에 알아차릴 수는 없다. 조지는 매우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 교회의 말씀을 가장 옳은 것으로 내면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는 아이다. 그의 시점으로 서술된 부분부분에서 그는 언뜻 조금 이상한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사교성이 없고, 긴장을 쉽게 한다. 무엇보다 주변에는 그를 빈정대는 아이들, 놀리는 친구들이 너무 많고, 그는 특별한 이유가 없이 외톨이인 것처럼 보인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차츰 독자는 그가 왜 외톨이인지 알게 된다. 그것도 조지의 발화를 통해서는 아니고, 조지가 서술하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 알게 되는 식이다. 이를테면, 조지를 놀리던 동료 중 하나는 햇볕 아래에서 탄 자신의 팔을 조지의 팔과 비교하며 이제 똑같아졌다는 식의 반응을 한다. 그에게 '진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이런 발화를 통해 독자는 천천히, 조지가 백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지는 인도계의 피가 섞인 영국인, 흔히 말하는 '튀기'다.

 

<용감한 친구들>은 이 조지가 그의 마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 가축 살해 사건의 가해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고, 3년 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 사건을 보여준다.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마을을 담당하는 경찰들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판결과 배심원 역시도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조지는 3년을 복역하다가 이유 모를 감면을 받아 출소하고, 조지의 사건을 알게 된 아서를 만나게 된다. 눈이 좋지 않은 조지와 달리 보는 것을 중요시 하는 아서는, 조지를 보자마자 "나는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은 함께 사건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 애쓴다.

 

만약, 일반장르소설이나 청소년 성장소설이었다면, 아마도 이 둘,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둘은 서로에게서 장단점을 배우고 성장하고,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되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다. 작가는 둘이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아서의 행동이 조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조지의 행동이 아서에게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번번이 교차된다. 덕분에, 독자는 조금 객관적인 위치에서 둘을,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마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과 그가 듣는 베로니카의 진술, 그리고 그가 보낸 과거의 기록물들이 나타나면서 주인공이 객관적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줄리언 반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고, 묘한 단점이라면 단점일텐데, 사실 그런 그의 태도 자체가 누구보다도 문학적이다. 계속해서 균열을 제시하는 그의 방식을 나는 좋아한다.

 

비록 두 책 밖에 읽지 않았지만, 하나의 말이 어떻게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같은 사건에서 누구는 무엇을 보았고 또 다른 누구는 무엇을 보았는지, 진실은 무엇인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우리의 요소들을 감안할 때, 역사라는 것, 기록이라는 것, 판결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반스는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개인적으로는 <용감한 친구들> 보다는 <예감은~>을 더 즐겁게 읽었고, 그 책이 좀 더, 마치 논문 쓰듯이 책을 쓴다는 반스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용감한 친구들>은 실제로 아서 도일의 편지와 실제 사건, 조지라는 인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독서 전의 흥미는 <예감은~>보다 조금 더했던 것 같다.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홈즈라는 인물의 창조자, 아서 도일이 가진 인간적 특징들을 반스보다 객관적으로 제시해줄 작가를 찾기는 아마 힘들 것이다. 흥미로운 건, 비록 반스가 그토록 도일의 여러 면(이를테면 외도와 같은)을 숨기지 않으며 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코난 도일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거다. 물론 조지가 보여주듯이, 그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람 나름이겠지만.

 

아쉬웠던 점은, <예감은~>에 비해서 책장을 덮고 난 후에 온 전율이 덜했다는 것. 반스의 냉정한 시선이 때로는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인종적 편견의 문제점이라던가, 여성 참정권에 대한 시대적 견해의 문제 등의 힘을 약하게 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독자가 조지의 문제에 공감하게 할 수 있었는데, 바깥에서 떠도는 관찰자에 멈춘 느낌이 없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반스의 시선인가 싶기도 한데, <예감은~>이 어떤 확정적 단언이었다면, <용감한 친구들>은 반스 스스로에게도 일종의 물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하는, 작가 스스로에게도 풀리지 않는, (그리고 아마 사람이 독립적인 개체임을 감안한다면) 풀리지 않을 물음 자체를 던지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그런 점이 여러모로 아쉽다. 반스의 작품을 조금 더 읽어보고 싶은데, 개중에서도 그가 무언가를 뜨겁게 외치는 작품, 혹은 아주 들끓지는 않더라도 무언가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하는 작품을 조금 보고 싶다. 이 정도로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무언가 외치는 힘을 함께 가지게 된다면 참 좋은 작품이 나올텐데,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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