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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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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다흠의 용기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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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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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이상문학상 수상집. 이번에도 좋은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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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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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책은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 미국에서는 유명한 작가이고, 그의 유작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처음 읽는 필립 로스 작가의 책이었는데, 전개 방식이 상당히 독특했다.

'상당히 독특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조금 풀어보도록 하자.

책의 결말부분 직전까지 독자는 이 소설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황, 장소, 인물에 대해 제 3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전개 과정을 보면 영락없이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느껴지며, 중간중간 ‘–‘를 통해 나오는 독백 같은 서술 또한 필립로스의 독특한 서술 방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결말을 보고 난 후에는,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챈슬러 애비뉴 놀이터의 한 소년의 시점에 의해 전개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순간이 바로 <네메시스>가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의 독서를 유도하는 부분이다. 결말을 보고 책을 다시 완독하는 순간, 모든게 다르게 느껴지는 소설은 흔치 않았는데….

소설 살육에 이르는 병처럼, 같은 내용이지만 서술자의 정체에 따라 또 다르게 느껴지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소설을 오랜만에 접하는데전개 장치가 상당히 정교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간략하게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이렇다.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핵심 화두라 할 수 있는데, 소설은 애비뉴 놀이터의 감독인 버키라는 인물이 전염병이라는 상황과 만나게 되면서 겪는 일을 그린다. 열정과 올바른 가치관, 도덕관념을 지닌 모범적인 인물이 폴리오라는 전염병으로 인한 비극 속에서 어떻게 갈등하는지,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를 제 3자의시선을 통해 잔인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최근 메르스 이슈가 있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네메시스가 매우 현실감있게 다가온 부분이었다.

초반부, 네메시스를 통해 전염병이라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두려움, 목적없는 분노, 슬픔과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굳건한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한 편의 모범적인 감동소설을 보는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극 중반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폴리오. 감염경로도, 치료법도 없다는 극한의 두려움에 노출된 사람들을 대하며 버키는 조금씩 무너저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책 뒷면에 적혀있는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타락시켜. 두려움을 줄이는 것. 그것이 자네의 일이고 내 일이야라는 대사처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버티면서 휩쓸리지 않고 두려움을 줄여나가던 버키는 두려움으로 인한, 갈 곳 없는 분노에 마주치며 점차 스스로가 소진되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때에 약혼자인 마샤의 인디언 힐의 물놀이 감독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수락하게 되면서 버키의 내면은 겉잡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가득차기 시작하는데...

폴리오라는 재해에 있어서, 개인이 느끼는 책임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주인공이 느끼는 책임은 거의, 소위 말하는 '끝판왕' 수준이다. 도덕 종결자 수준이라고나 할까.

본래 이렇듯 선량하기만한 주인공의 모습에는 선뜻 이입하기 힘든데,  필립 로스는 과장없이 얘기를 전개해나가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미국 대표 작가의 위엄이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버키는 본인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인디언힐에서도 행복을 붙잡지 못한채 끊임없이 신의 존재 이유, 본인의 의무에 대한 책임감, 도피로 인한 죄책감을 물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 폴리오 감염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비극은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마치 순교자처럼,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주인공은 본인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자연스럽게 포기한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그 모습이 사실 선뜻 이해하기 쉬운 것만은 아니다. 마지막, 약혼자의 절규는 이런 버키에 대한 타자들의 견해 중 하나를 잘 대변해준다.

너는 우둔하게 굴고 있지만, 사실 너는 우둔하지 않아. 너는 무지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무지하지 않아. 너는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 사실 너는 미치지 않았어'

 

개인적으로는 전염병이라는 극적이지 않은 주제와, 비현실적인 주인공으로 개인의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고뇌를 이렇게까지 파헤치는 중에도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끊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굉장한 수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네메시스>는 독서 내내 특정 상황에 대한 개인의 책임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를 묻게 한다. 놀이터 감독으로서 주인공이 지고자 하는 책임은 도의적일지 모르나, 과해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전파 경로도, 예방 방법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두려움을 줄이던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초인적인 것이었으니까.

뉴어크에서 인디언 힐로 이직한 것 또한, 남들이 비난할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겨진다.

아무것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넓지 않으니까. 폴리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직했다고 비난을 받는다면, 글쎄... 과한 도덕과 이상론은 사람을 설명하지도, 지켜주지도 못한다.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솔직히 인디언 힐에서 주인공이 하는 고뇌를 읽으며, 버키라는 인물이 너무 착해서 이런 자책감에 빠져있구나, 하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들었다. 뭔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심리 자체에는 나를 이입시킬 수 없는 느낌?

하지만 주인공이 폴리오 보균자라는 상황이 오면, 이 이입이 조금 더 쉬워진다. 근래 한국의 상황이 겹쳐졌던 탓일까. 이 지점에서 버키가 직면한 죄책감의 무게가 묵직히 와닿기 시작했다. 본인이 괴로워하던 상황, 본인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죽어버린 비극의 원흉인 폴리오. 바로 본인이 그 폴리오 보균자였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이후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에도 납득이 되던 이유는, 그런 포기가 개인의 윤리적 가치관에 기반해있었기 때문이다. 현실과 아두 유리되어있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윤리적, 보편적 가치관 말이다.

"내가 결혼을 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나가는 불치병에 걸렸다면 배우자를 놓아주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닐까?"

한번쯤은 던져보게 되는 질문이고, 그 상황에 직면하면 더 절절하게 되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아마 모두 한번쯤 상상해봤을 테고.

 

다만 좀 답답한 건, 주인공이 그 어떤 다른 길도 포기한채 스스로의 세계에 본인을 가뒀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 스스로는 순교자처럼 본인을 생각하겠지만…. 글쎄. 독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비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데도 모든 것을 짊어지며 이게 최선이었다라고 자위하는 모습에 속이 답답해졌다고나 할까. 이런 답답함은 마지막으로 가면서 묘한 연민처럼 변화하는데, 이런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솜씨가 아주 수려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상황에 대한 본인의 책임의 범주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묻게 만드는 책. 읽어봄직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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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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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현재의 20대(보다 정확히 20대 중후반)를 3포세대라고 한다. 근래 들어 유독 많아진 20대 청년들의 성향을 지칭하는 말 중 하나인 이 '삼포'세대는 말 그대로 3개를 포기한 세대다. 연애, 결혼, 출산. 한국에서 이 셋 모두를 감당하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지 보여주는, 다소 해학적이면서도 슬픈 별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을 다루는 소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인 듯 한데, 아무래도 연령대가 비슷한 탓도 있을 테고, 현재 20대가 경제적으로 워낙 어려운 세대로 지목되면서 여러 세대갈등 양상이 나타나는 탓도 있을 것 같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이런 한국 청년이 가지고 있을 법한 고민과 '한국'이라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복잡다단한 감정을 맛깔스럽게 풀어낸 소설이다. 본래 공대를 나와 회사에 다니다가 기자가 되고, 이후 전업작가가 된 장강명의 놀라운 이력이 증명하는 그의 유연성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분명 지금 약 40대의 작가가 쓴 글인데, 꼭 옆에 앉은 친구가 하는 말처럼 친근하고 부드럽다. 더군다나 그 글에서 느껴지는 묘한 여성스러움과, 살아 숨쉬는 듯한 인물이란. 아주 잘 읽히는 글이어서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지만, 기실 그렇게 만드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감안하면 글솜씨가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싫어서』는 제목에 충실하게, 한국이 싫어서, 한국에 살 수가 없어서, 한국의 경쟁구도와 그 모든 '참고' 살아야하는 것들을 포용할 수가 없어서 호주로 떠나기로 한 계나의 이야기다.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계나는 나름대로 좋은 학교를 나와 나름대로 대기업에서 일하며, 오래도록 만나온 남자친구까지 있지만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왜냐면 한국에서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은 경쟁 문화나 대화가 허공에 떠도는 것만 같은 인간 관계 등, 그녀가 토해내는 불만에 공감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 계나에게 호주는 꼭 꿈의 나라처럼 보이고, 계나는 호주로 떠난다. 

물론, 그런 호주가 유토피아처럼 서술된다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호주는 당연히 사람사는 곳이지 유토피아가 아니며, 한국만큼이나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인종차별 같은 것들. 하지만 계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에 살기를 선택한다. 장강명은 계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여주면서, 계나와 대치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 다른 삶의 가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1인칭 화자인 계나가 가진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탓에 소설이 조금 편협해보이는 것이 단점.) 약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분명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는 것이 맞는데, 꼭 작품이 한 쪽편에서 서술되어있어서 상대방이 괜히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 (그것을 작가가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특히 그 점이 두드러지는 장면은 계나가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다. 몇 년이 지나도 똑같이 시어머니 흉을 보고 IT회사 흉을 보는 친구들을 만난 계나는 친구들이 '본질적'인 문제를 바꿀 용기는 없고 그저 불평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라고 느낀다. 물론, 계나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나의 친구들이 선택한 그 방법(말하자면, 그저 불평하기)은 문제적일지 언정, 분명히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시어머니에게 대놓고 화를 내지 않는 이유가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존재한다. 

작품 후반에서, 계나는 이 점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행복한 사람, 저렇게 행복한 사람, 우리는 유형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지속적으로 발화한다. 호주에서 사는 게 여기서 사는 것 보다 나을껄? 호주에서 웨이트리스 하는 게 한국에서 동사무소 일 하는 것보다 나을 껄? 계나는 호주에 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말을 거침없이 뱉어낸다. 그런 계나의 모습은, 글쎄, 쿨해보이기는 하지만 그것 이상을 느끼기가 어렵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뒷부분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평론가는 그것을 '존재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체 '존재'하는 삶이라는 건 뭔가? 그리고 대다수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나는 친구들에게 '본질'적인 것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문제적 상황에 부닺힌 계나 본인의 선택은 호주로의 도피였다. 나는 계나가 무슨 운동가처럼 제도와, 팽배한 사회 분위기와, 고정관념, 혹은 이른바 '꼰대' 들과 싸워야 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녀는 적어도 본질이 무엇인지는 보여주어야 했다. 계나의 말은 너무 가볍고, 외피만을 건드린다. 이런 저런 투정, 이런 저런 행태, 이런 저런 것들, 그런 것들은 그런데 왜 생기고, 왜 한국은 그것들을 계속 유지하면서 나아가려고 한단 말인가? 소설은 그 핵심에 대한 발화는 살짝 피해간다. 대신 이런 저런 현상들을 쭉 펼쳐준다. 물론 그것으로도 좋다. 소설이기 때문이다. 계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조금은 불편하면서도 꽤 즐겁고 경쾌하다. 다만 아쉽다. 묵직하게 물음을 남기는 것 없이 넘어간 페이지들이 기억을 치고 올라올 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계나가 가지고 있던 본질적 물음과 그녀의 견해가 조금은 궁금했기 때문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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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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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 적, 읽고 엉엉 운 책이 있다. 제제와 뽀르뚜까가 나오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다.

나는 그 이후, 나이 든 사람과 어린 사람 사이의 우정에 관한 묘한 로망 같은 것이 생겼다. 이를테면, <세인트 빈센트>나 <기쿠지로의 여름> 같은 것에 대한 환상 말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처음 읽을 때에도, 어렴풋이 '그런 이야기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웬걸.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하기 전까지도 '사샤'라고 불리는 사르트르는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미셸은 그저 자신이 그닥 극적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그 클럽에 사르트르가 있다는 것을 알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가 가벼운 무안을 당하는 정도로 1권은 끝이 난다. 도리어 중요해보이는 것은 미셸과 그 클럽에 있는 다른 인물들의 서사이다. 물론, 사르트르는 그 이후 점점 커지며 서사를 장악해오지만 말이다.

 

사실, 처음 우리는 한 사상가를 묻는 이 책을 읽으며 '사르트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파시즘을(정확히 말하면 파시즘적 성향을 보이는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자신이 틀린 것을 어쩌면 알고 있었으나 끝까지 주장을 번복하지 않던 사르트르. 그는 어쩌면 최후의, '낙천주의자' 였을 것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이 사르트르의 문제를 조급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야기는 미셸로부터 시작한다. 독서하는 아이, 수학을 못하는 아이, 테이블 테니스를 잘 하는 미셸을 통해 점차 시대상이 드러난다. 알제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 반면에 만연해있는 '트로츠키'주의자와 이외 공산주의자들, 프랑스로 망명온 다국의 사람들까지, 모두가 미셸의 삶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낙천주의자들이 모여있는 체스클럽이 나온 후, 소설은 미셸과 이들 인물 각각의 삶을 조금씩 섞는다. 어떻게 서로 반대편이던 러시아인들이 합쳐졌는지, 헝가리에서 온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소련에서 온 비행사는 어떤 연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등등. 그 이야기 하나하나에 시대가 녹아있고, 인물들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당시의 분위기가 묻어난다. 마치, 우리의 많은 후일담 소설들이 그러하듯.

 

물론 그것들은 낯설고 생소하다.

91년, 정확히는 92년에, 우리의 앞에서 공산주의는 끝을 고했다. 인류의 실험은 끝이 났고, 많은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져들면서도 해방감을 누렸다. 92년 생인 나는 그 감각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들을 체감할 수 없는데, 때문에 소설 속에 나오는 세실의 말이나 사라져버린 피에로의 말 같은 것을 읽노라면 궁금증이 밀려온다. 그 이상, 그 생각은 대체 어떤 느낌이었단 말인가?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로 가장 빈번하게 지적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적'과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다. 이 생각은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그려내는 사회에서 유효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의 세상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세상,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이다. 틀렸음을 어쩌면 알면서도 믿지 않을 수 없던 사람, 졸지에 먼 타국에 와 있게 된 사람, 순식간에 가족을 잃은 사람, 핑크빛 미래를 점차 잿빛으로 물들이다가 돌아가버린 사람까지. 그곳의 모두는 외롭고 쓸쓸해보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지탱한다.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옭아매어 뿌리내리게 돕는다. "그런 식으로 사람은 자기가 걸어갈 길을 걷게 된다."(p.284)

 

그리고 삶은 변해가고, 시대 역시 변해간다.이 방식은 아주 은근하고 일상적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미셸이 로큰롤을 좋아하는 것 만큼이나 일상적이며, 삶에 스며든다. 변화란 그런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은근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비춰준다. 마치 그 시대의 연애, 그 시대의 사랑, 그 시대의 친구를 노래하는 옛날의 소설들처럼. 그래서 일까? 분명히 낯선 타국의 이야기, 낯선 시대의 이야기인데도 빈번하게 우리의 옛날과 소설은 겹쳐보인다. 그땐 그랬지,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지, 읽는 내내 그 소리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좋은 소설이 그렇듯, 때로 작품은 체감할 수 없던 것은 체감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문학의 힘이란 어쩌면 그런 동일시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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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13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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