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좋아하시나 봐요 같은 말은 정말 어색하다. 받아치기가 수월치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축구팬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저 유러피안 풋볼 챔피언십 경기만 재밌게 볼 뿐이에요. 이 문장은 모양이 한참 빠질 뿐 아니라 다분히 국제적으로 자존심 없는 변방 얼뜨기다운 면마저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감이 있다만, 그래도 이게 아마 가장 솔직한 답이지 싶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축구에 빠진 적이 딱히 없다.
난 요새 잘나가는 우리나라 축구선수도 잘 모른다. K라는 말이 앞에 붙은 말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게 있나 잘 생각나지 않지만, K리그도 예외가 아니라서 한국 프로축구 리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예 관심이란 게 없다. 그렇다면 사대주의자답게 다른 대륙의 대회에는 맹목적으로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지금 다른 대륙에서 열리고 있는 코파아메리카에 대해서도 개최지가 어딘지 찾아보고 토너먼트 대진표 한번 훑어본 뒤에 아르헨티나 잔치 아니겠는가 하는 아무 근거 없는 예상을 잠시 해본 게 다다.
유럽 축구에 관심 있다고 할 수 있으려면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리그 정도는 관심있게 봐주는 게 도리일 듯도 싶은데 그것도 딱히 아니다. 아스날 팬인 대머리 아저씨들이 런던 튜브 안을 점령하던 날에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게 되어 그들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본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손흥민이 뛰는 토트넘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해봤고, 전부터 맨체스터는 한번 가보고 싶다고 느꼈지만 그마저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바르셀로나에 놀러갔을 때 역시 굳이 축구팬이 아니라도 가볼 가치가 있다며 주변에서 강추한 캄프누 구경을 놓쳤다. 다른 곳에서 노느라 시간을 다 써버려서 말이다. 근데 딱히 원통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박현욱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공 여자처럼 레알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에 대해서 논쟁하면서 남자한테 호감을 살 재주따윈 없음을 안 지 오래다. 심지어 이탈리아, 독일 리그에 대해서는 일자무식 수준이다.
리그 경기에 비하면 월드컵은 확실히 재밌게 본다. 조추첨부터 놓치면 어딘가 찜찜하다. 근데 이것도 정작 보다 보면 내가 이른바 '얼빠'라는 사실만 확인하는 날이 부지기수라 기분이 좀 그렇다. 그렇다면 4년마다 열리는 UEFA 경기도 과연 내가 얼빠이기 때문에 잠까지 줄여가면서 보는 건가? 나는 2012년만 해도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근데 이번에 느끼는데, 그건 그렇게 큰 이유가 아닌 것 같다. 그럼 뭐가 이유냐. 별 이유 없다. 그냥 유럽병 때문이다. 유럽병 환자이기 때문에 '유로'라는 이름을 달고 개최되는 이 대회에 대책없이 끌리는 거다. 명쾌하다. 이런 자가진단을 내린 이후로는 더 이상 단순한 얼빠라는 자책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사뭇 순수하게 경기 시청을 즐기고 있다. 예컨대 어제 내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 F조 경기를 보면서는 헝가리랑 포르투갈 둘 다 16강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말하자면 나는 무엇보다도 그 두 나라의 팬이라서다. 부다페스트, 리스본, 포르토라는 도시의 팬이라서다. 비록 더러운 숙소에서 곯아떨어지거나 다리가 뽀개질 듯이 아팠을지언정 거기서 나답지 않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여행했던 기억이 순간순간 자꾸 떠올랐다. 고메스의 드리블을 주시하던 순간에도 불쑥, 헝가리 골키퍼의 추리닝 바지춤을 보면서도 불쑥.
대진표를 보니까 이런 식으로 내 병세를 자극할 경기가 16강에 벌써 두 개나 더 있다. 이탈리아 대 스페인이랑 잉글랜드 대 아이슬란드. 아, 어떡해야 할지.
병을 알고 나니 병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하고 자학도 줄일 수 있게 된다. 진작 내 병을 좀 더 관심있게 들여다봐줄걸 그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