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악을 들을 때 악보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음악을 듣는 목적은 작품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대목에 플루트나 오보에가 들어간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은 내가 보기에 음악을 즐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연주회가 매력과 신비를 잃고 학습의 양상을 띠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를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연구와 분석에 반대한다. 나는 내가 연주하는 협주곡의 오케스트라 파트 악보를 보지 않는다. 나는 보지 않고 듣는다. 그러면 나에게는 모든 것이 경이롭다. 나는 악보 전체를 머릿속에 넣을 수 있고 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브뤼노 몽생종, <리흐테르>, 정원출판사, 245쪽 중에서



이 영상을 틀어놓고 나는 리흐테르가 연주 전후에 손을 주무르는 모습을 꽤 오래 들여다봤다. 손가락을 주무르는 리흐테르의 동작은, 청중을 신경쓰지 않을수록 더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작곡가와 청중을 이어주는 연주자로서의 기본에 극도로 충실하려 했던 그의 태도를 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 사실 이 모습은 매우 인간적이기도 하다. 매력과 신비를 중히 여기던 그 역시 어느 틈에 손가락을 풀어줘야 할 필요를 느끼는 인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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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사람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이장욱, <올드 맨 리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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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ME가 무료화를 선언했으며 롤링스톤도 어려운 처지라는 기사를 봤다. 영미권 팝음악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식에 잠시 가벼운 슬픔을 느끼고 말았다. 영미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팝음악에 한창 빠져 있던 그 한 시절을 함께한 잡지의 폐간을 바라보며 특유의 쓸쓸한 소회를 가지는 입장이라도 되는 양.

 

음악잡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고등학교 때 특별활동을 함께했던 친구가 떠올랐다. 방금 친구라 적긴 했지만 사실 지금은 친구라고 회상하기 어딘가 쑥스러운 친구다. 그래도 별수가 없으니 편의상 친구라 칭한다. 그 친구와 나는 금요일마다 특별활동 시간에 만나 뭔가를 함께했던 사이였다. 이렇게 적고 보니 문득 그 아이와 보통은 넘는 사이였나 하는 생각도 조금은 든다. 1~2학년 때는 정체가 모호한 인쇄물을 만들면서 우스운 작당을 함께했고, 3학년 때는 지구과학반이라는 역시 정체가 모호한 공간에 같이 앉아있었다. 다시 정신을 다잡는다. 별 사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 이 경험을 공유하는 이가 이 친구 말고도 네 명 더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친구라 칭하고 있는 친구는 내 기억에 그 무리 속에서 내가 가장 가까워지기 어려운 둘 중 하나였다.

 

당시 그 친구와 나를 묶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금요일 마지막 교과시간에 향하는 곳이 같긴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우리가 나눈 다른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교하는 방향도 달랐고 이용하는 교통수단도 달랐으며 좋아하는 연예인도 겹치지 않았다. 교복 매무새도 사복 취향도 다 달랐다. 그 친구와 나는 일단 유머감각부터가 달랐다. 그 친구는 자기 할머니가 독일사람이라는 농담을 건넨 적이 있었는데 나는 진짜냐고 물었을 뿐 그 말이 농인 줄 알아차렸을 때도 "어우 야 뭐야 진짠 줄 알았네 까르르" 같은 반응은 차마 건넬 수 없었다. 또렷이 기억하건대, 별로 웃기지 않았다. 또한 그 말에 내가 크게 의심을 품지 않았을 정도로 그 친구의 용모는 꽤나 서구적이기도 했다. 나는 달랐다. 낮거나 둥근 무엇들을 얼굴에 달고 다녔으니만큼 언감생심 그런 농담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성적도 달랐다. 갑자기 생각나는 강렬한 에피소드가 있다. 고3때 모의고사를 친 다음날인가 성적 좋은 그 친구가 지망대학 어디 썼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내가 어디어딜 썼다고 대답하자 그 친구는 말했다. "거기는 삼류 아니야?" 참으로 스트레이트한 언사였다. 내가 듣기에 친구에게 공부 좀 더하라는 뜻을 참신한 방식으로 전하는 말은 분명히 아니었다. 일종의 유머를 드러내려 한 의도 역시 아니었다. 내가 그 시절에도 그런 건 또 잘 알아듣는 편이었다. 문자 그대로 '어머 넌 그 삼류대학을 정말 지망한다는 거니'라는 뜻을 품은 진지한 물음이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엄정한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때 나는 당당하게 "삼류라니, 나는 나름대로 가고 싶은 학굔데"라는 식으로 대답해줬을 리가 없다. 뭔가 대답을 하긴 했는데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 안 나는 걸 보니 매우 호구력 넘치는 멘트였나 보다.

 

당연할 수도 있는데, 보는 책도 안 겹쳤다. 청소를 하던 중 갑자기 그 친구가 <데미안>에 대해 얘기해올 때가 있었는데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 관심사 리스트에 헤세 같은 사람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넌 요새 뭐 읽어?"라는 그 친구의 질문에도 나는 굳이 GMV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권장도서와 월간 대중음악지 사이의 접점을 떠올리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만약 "GMV 읽어. 핫뮤직보다 가볍긴 한데 그래도 나는 내가 아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거 같아서 GMV가 더 재밌더라" 같은 대답을 해줬으면 어땠을까? 나와 그 친구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을까?

 

잠깐 생각해봤는데 더 싸해졌을 것 같다.

 

NME가 아쉬운 건지, GMV가 그리운 건지, 옛날 친구가 문득 궁금한 건지 잘 모르겠다. 다일 수도, 무엇도 아닐 수도 있겠지. 분명한 건, 이렇게 딴짓거리를 해댔는데도 아직 퇴근시간이 안 됐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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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음악을 차에서 꽤 즐겨 트는 동생한테 나는 Fly Away가 그렇게 좋더라고 하니 그 노래가 무슨 앨범에 있냐고 물으며 잘 모르겠단다. 찾아보니 이 노래가 안 들어 있는 Bad 앨범도 있었나 보다.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치고는 라디오에서도 별로 사랑해주지 않았을 것 같고. 


나는 거장들이 좋긴 한데 가끔 거장의 어떤 작품에서 나 거장입네 하는 모습이 느껴지는 순간에는 약간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한편 거장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뚝딱 만들었을 듯한 작품을 보면 그게 그렇게 정신 못 차리게 좋다. 이 노래도 그렇다. 아무리 까다로운 마이클 잭슨이었다고 해도 왠지 이 노래를 며칠 밤을 꼴딱 새가면서 만지고 완성해내며 스스로 인생의 역작이라 평가하진 않았을 듯하다.(인터뷰 샅샅이 뒤져보면 의외로 "Fly Away에는 제 음악인생의 승부를 걸었어요" 같은 문장이 나오는 거 아니겠지 설마?) 

적어도 내 귀에는 이 노래가 마이클 잭슨 몸에서 어느 순간 막 뚝뚝 흘러넘치는 뭔가를 마이클 잭슨이 그냥 어떤 틀 속에 담담히 주워담아서 만든 것같이 들린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좀 정신 못 차리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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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확인, 등록하기 등의 버튼을 눌렀을 때 방금 쓴 글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난감해한다. 난감해하기보다는 화가 울컥 솟는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즉, 쓴 글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주절주절 떠들고 어떤 공간에 던져놓고자 했는데 화면이 바뀌면서 그 글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뜰 때 나는 난감해하고 혹자는 화를 낸다. 

그런데 왜? 글을 쓴 시간이 아까워서? 뭔가 괜찮은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마저 날아간 것 같은 기분이어서? 내가 원한 행위가 기계로부터 거부당한 느낌이어서? 또 써야 한다는 부담감과 귀찮음이 엄습해서? 

말은 흩어진다. 날아가 흩어지는 것이 말의 속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말과 달리 글은 왜 날아가고 사라지면 난리난다고 생각할까? 이것이 일종의 내 작은 관심사다. 어느 순간 글도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좀 멋진 이미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아가는 글, 날 수 있는 글... 괜찮지 않나? 글이 저장되지 않은 사태가 실은 난감해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는 얘기다. 저장이 제대로 되지 않고 날아가는 글은 어쩌면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일 수 있다. 되도 않는 글이 범람하는 공간에서 그저 그런 글이 될 운명을 미리 감지하고는 저대로 먼저 알아서 휘발될 줄 아는 텍스트. 그런 신묘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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