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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좀 징징대지 않는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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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란 시로 오은은 말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라고.

시인이란 사람들 가끔 무섭다. 뭘 막 투시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뭐든 추위 탓으로 돌리고 싶을 정도로 강추위에 떨었던 날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2월은 이미 와 있다. 그리고 나한테는, 또 내 주변에는 별 변화가 없다. 다행일까? 글쎄. 김태리, 안희정, 설리 등에 대한 기사나 보면서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시간은 부끄럽게도 줄지 않았다. 시시한 메시지를 날리면서 ㅋㅋㅋ를 주고받는 상대는 늘 그들이 그들이다. 밖에 나가면 자리를 양보받는 지긋한 연세의 부모를 상대로는 잘한 거 하나 없는 주제에도 필 받은 양 짜증을 퍼붓는 날이 여전히 잦다. 이런 것도 딸년이라고.

 

싸움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못하는 주제에 누군가와는 지겹게도 자주 싸우는가 하면, 또 누군가와는 더없이 사무적인 대화를 통해 더없이 원만하고 더없이 무관심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기도 하다. 진전이 너무 더딘 일 때문에 어깨통증이 쎄하게 도지는 순간도 더러 있는 것 같고. 그래도 그나마 장한 거 하나는, 아직 수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대여섯 번 중에 한 번쯤은 오늘 좀 갠잔네, 싶은 날이 있으니 그게 어디야.  

 

뭐 어떻게든 흘러가겠지만, 너무 마구 흘러가지는 않았으면. 안 그래도 짧은 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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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노래들을 별로 즐기지 않았었다. 12월에 어느 번화가를 걷다가 징글벨, 렛잇스노우, 화이트 크리스마스 등등 유명한 캐롤이 들려와도 볼륨이 좀 크다고 느끼는 순간이 더 많았다. 왠지 그 노래들은 신남, 들뜸, 로맨틱함을 조금은 강압적으로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우선 들었고 그 느낌이 별로였다. 또 어김없이 한 해를 흘려보낸다는 감정에 먼저 휩싸여서 즐겁기보단 서글퍼졌다. 고작 스물몇 살 때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그러던 시절에도 예외는 있었다.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첫 소절만 들어도 곧바로 두근거렸다. 영국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라스트보다는 래스트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으로 들리는 노랫말 시작부분도, 실로폰 소리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종소리 비슷하기도 한 간주도, 약간은 느끼한 '메리크리스마스' 하는 속삭임도 다 좋았다. 들을 때마다 아무 이유 없이 마음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어쩌면 어느 정도는 학습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때 케이비에스에서 하던 쇼비디오자키 같은 프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영상과 출연자들이 예쁘다고 느낀 기억이 있는 것이다. 좀 더 자라서는 가사를 찾아봤고 이 노래가 우와 크리스마스다, 라는 식으로 마냥 즐거워하는 내용이 아님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사실은 아무 이유 없이 끌렸던 게 아니었다.

 

요새는 이 노래보다는 머라이어 캐리 노래가 훨씬 많이 들린다. 올아이원트... 그 노래가 확실히 사람 마음을 더 빠르게 위로 띄우는 힘은 있는 것 같다. 인정. 그래도 여전히 나는 라스트 크리스마스 쪽이다. 적당히 들뜨게 하는 쪽, 적당히 사랑스럽고 적당히 꼬여 있기도 한 쪽에 어쩔 수 없이 더 기우는 천성 탓인가.

 

그런데 아직도 이 노래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다른 크리스마스 노래들도 예전보다 더 예쁘게 들리고 볼륨도 과하다 여기지 않는다. 청력 감퇴 때문만은 아니겠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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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발표 시즌이 지나갔다. 또 한번 떠들썩했다. 상 못 받아 죽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칼럼이나 보도도 연례행사처럼 전파와 지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후엔 일본은 이렇게나 기초과학 선진국이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가능하겠냐, 좀 배우자 좀, 과학에 대한 장기적 투자와 창의성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등등 하나마나한 소리들이 언론을 통해 돌림노래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생리의학상, 화학상, 물리학상 등을 받은 과학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여론은 내가 못 봤는지 정말로 아무도 안 다뤘는지 어쨌든 본 기억이 없다. 그 천재들은 무슨 업적으로 받았는지 웬만해서는 알 수가 없고, 누군가 알려준다고 한들 역시 알아먹을 턱이 없고, 그러니 그냥 이의까지나 달 작정을 하는 사람도 당연히 별로 없어서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노벨상엔 경제학상도 있다. 외국의 사정은 체감해본 적도, 조사해본 적도 없으니 뭐라 할 말이 별로 없지만 이 나라 국적을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 나라 사정을 느끼기로는, 사람들이 신경 쓰는 건 내 주머니, 내 지갑, 내 통장 정도다. 경제? 뭐 그리 거창하게 경제까지나. 경제학? 언감생심. 물론 먼 훗날 언젠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장하준 같은 사람이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또 한국의 쾌거라며 떠들어대는 광풍이 온 나라를 삼키고도 남을지 모른다. 상상만 해도 좀 피곤하긴 한데, 하여튼 그런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상이 이 땅에 사는 범인들에게 인기 있는 화젯거리가 될 공산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내가 뭐라고 장담까지나 하겠냐마는, 그냥 느낌적인 느낌이 그러하다는 얘기다.

 

평화상은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받을 때 전 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유일하게 받은 노벨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던 시절이 지나가고 나서도 이 상이 종종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우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 못하고 있었다. 오바마가 어떤 업적으로 평화상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딱히 찾아보지 않았다. 사실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이나 평화상은 물론 평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어마어마한 공연수입을 긁어 축적한 부로 엄청난 간지를 장착하고 사는, 유투의 보노 정도 되는 록스타가 무대에서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때 외에는 평화란 단어 때문에 감정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짐을 느낀 적이 30세 후로는 별로 없었다는 고백까지 해버리면 나만 너무 쓰레긴가?

 

근데 문학상은 다르다. 이게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발표되는 만큼 무지 묵직한 상징성을 갖기라도 하는 건지,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이것만큼은 ‘우리’ 한국 사람도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어서인지, 아무튼 이건 많이 다르다. 비록 여기저기서 외국문학, 한국문학에 공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정을 표시하는 일도 거의 요 시즌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때 이 상에 대한 이 나라의 동경과 열망은 좀 과하다 싶다. 하기야 과학은 너무 멀고 경제학 역시 골치 아프고 평화는 내 알 바 아닌데 문학 이건 좀 재밌어 보인다고 느끼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긴 하다. 그리고 이 상에 대해서는 시장에서 직접적인 구매력으로 관심을 드러내기도 좋다. 말하자면 이 상 받은 사람의 업적에 다가가기는 비교적 편하고 만만한 것이다. 이 상의 권위와 나라는 사람의 지적 경향을 쉽게 이으면서 말이다. 그뿐인가. 사실 응구기 와 시옹오가 이 상을 받는다 한들 한국 사람들이 갑자기 케냐를 문화대국으로 떠받들거나 돌연 아프리카 문학에 대한 애정을 키울 리 만무하지만 한국 국적인 작가가 노벨상을 받는 장면을 보면서는 너도나도 문화선진국에 살고 있다는 도취에 젖을지도 모른다. 마치 국적 외에도 다른 공통점이 꽤 있기나 한 것처럼 우리의 저력 운운하며 낯간지러운 언사를 토해내는 무리 역시 분명 있겠지. 당연히 또 누군가는 시장의 수혜자도 될 것이다. 지금도 수상 가능성이 거론되는 작가의 작품을 내는 출판사에서는 수상자 발표 전까지 기대감과 설레발 사이의 아릿한 감정에 한껏 부풀고, 상은 누가 받든 간에 수상자 발표가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서점은 매출에 활기를 띠는 판국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진짜로 이 나라 작가 중 누가 그 상을 받고야 만다면 독자들 아니 소비자들이 무조건적으로 장바구니를 채워대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는가. 물론 이런 일이 곧 독서 문화의 변화를 부르거나 출판 시장 전반에 호황을 야기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겠지만 말이다.

 

누가 뭘 타든 또 뭘 못 타든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지, 나는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수상자 발표를 보고 왠지 잠시 흥분되기까지 했다. 검색어 1위에 올라 있던 밥딜런이란 세 글자에 엄지를 갖다대던 순간까지도 그저 ‘뭐야 왜 실검에 있지? 혹시 이 사람 죽었나? 아님 내한 또 오나?’ 하고 궁금해했을 뿐 꿈에도 그 이름이랑 노벨문학상을 연관시키지는 못했었는데 그가 노벨문학상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많이 놀랐던 것이다. 약간 감동도 했다. 상 주는 사람들 신선하다, 영리하다 느껴서. 그래서 오랜만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남의 잔치 구경 좀 하려다가 갑자기 이 뉴스 이제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다음 날 ‘권위 우려’ 어쩌고저쩌고 말하는 뉴스를 보면서였다. 급격히 피로가 밀려왔다.

 

다행히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잠잠하다. 좋다. 보나마나 곧 더 잠잠해지겠지만, 동네 교보문고에 들어갔을 때 핫트랙스에서 밥 딜런 노래가 줄줄이 나오지 않고 알라딘에 접속했을 때도 밥 딜런 자서전이 잘 안 보이게 되면 그때 스윽 한번 펼쳐보고 싶다, 밥 딜런 자서전은. 그건 그렇고 난 이 사람 음악에 빠져서 허우적댄 적은 여지껏 한 번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무지 멋진 사람이었구나. 한림원에서 연락해도 답이 없고 시상식에 등장할지 여부도 아직 모른다고 한다. 아, 이런 캐릭터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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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남에게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인간을 나는 주저없이 '무례한 놈'이라 부르겠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무례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꺼리는 마음에서 남의 장점을 인정해주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도 똑같이 약하다는 사실을 억지로 증명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추악하더라도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솔직히 고백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인정해주고 또 사랑해주리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버려라. 인생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다.

어떤 인간이라도 그 참모습은 결코 사랑받지 못할 존재이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아무리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운 소녀라도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엿본다면 더 이상 그 소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게 하여 무정의 상을 깨닫게 한다는 불교의 수행 방법도 이 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백하지 말지어다', 254~255)


Q. 소설가는 모두 인생 경험이 풍부하잖아요. 그러니까 경험이 없는 우리에게 인생의 지표를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 즉 조언자로서 존경해요.

A. 당신도 참 바보로군요. 왜 남한테 자기 인생의 지표를 제시해달라고 하는 거죠? 엉터리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남한테 인생 상담을 부탁할 정도라면 차라리 점쟁이한테 사주를 봐달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예요.

인생은 다 똑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3천 명과 연애해본 사람이 딱 한 번 연애를 한 사람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마찬가지로 소설가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유익한 조언을 해줄 거라 믿는 것도 완전한 미신이에요. 소설가도 허우적거릴 때가 있고, 그러다가 겨우 나무토막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는 것이 곧 소설가가 소설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소설가가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정직한 충고라곤 오직 하나 '당신도 소설을 써보시오'라는 말뿐이에요. 그런데 아무나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런 충고는 전혀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속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소설가를 존경하지 마라', 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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