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의 계절은 곧 제모의 계절. 피부과에 가서 밀어버리면 별일 아닐 텐데, 뒤처진 사람답게 아직도 제모 크림이나 면도기로 해결을 본다. 없어 보이는 짓인가? 그렇대도 뭐 상관없다. 습관일 뿐이니 이 습관이 못 견디게 지겨워지면 그때 기술자의 힘을 빌리자고 다짐 비슷한 걸 해본다. 지금으로선 그저 더디게 성장해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바가 없다.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더 부지런히 없애고 있으나 어찌 그만큼 더 바쁘게 자라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극소수의 사람이라도 어쨌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들를 수 있는 공간에 이렇게 끼적이고 있는 걸 보게 되면, 내 다리 털에 대해 뭘 좀 아는 사람(예컨대 내 다리털을 볼 때마다 남성의 다리 터럭과 견주어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독백인지 긴 감탄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동생녀석)은 차갑게 퉁을 줄지도 모르겠다. 거 뭐 자랑이라고 남우세스럽게 그런 데서 떠들고 있냐,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신체적 결함에 대해 그렇게 나불대야 할 이유는 대체 무엇이냐, 그럴 시간 있으면 한 올이라도 더 밀든지 등등의 핀잔이 예상된다.
네, 압니다 알아요. 이런 건 당연하게도 자랑일 수가 없어요. 근데 남우세스럽다는 말 맞게 쓰셨네요? 털은... 물론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것이긴 하지요. 근데 갑자기 왠지 부끄러운 것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집디다. 요샌 워낙 다들 잘난 것만 드러내잖아요. 난놈 난년들을 향해 정체 모를 저항감이 오랜만에 슬쩍 치밀었달까요. 글 잘 쓰는 누가 그러더라고요. 잘 쓰고 싶거든, 보여주고 나면 혼날 것 같은 내용을 쓰라고요. 혹시 또 압니까, 이런 짓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꽤 괜찮은 문장을 몇 줄이라도 쓸 수 있게 될지. 물론 털과 글은 별 관련이 없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 역시 압니다 알아요. 그리고 저 지금 시간 많은 건 맞지만 한 올이라도 더 밀자니 지금은 어쩐지 귀찮네요.
라고 대답해줘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직감했다. 나 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음을 말이다. 내 다리털에 대해 내가 왜 떠드는지 물어주기에는 다들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터이다. 그러니 내가 저런 대답을 건네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다행스럽다. 헛짓을 하고 있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