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소설을 읽을때마다 나라별로 느낌이 좀 다르기는 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번역하는 이의 고충이나 느낌 등까지 깊이 헤아려본적이 없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문학까지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해야함에도 읽기 쉽게 번역되어 나온 책들을 쉽게 읽으며 고마움을 크게 못 느껴왔던 것이다.

이 책에는 옮긴이와 해설, 두 사람의 이야기가나온다. 특히나 해설을 쓴 분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번역한 사람으로 알려져서, 그 이후로도 이 소설과 관련된 많은 문의를 받아왔다고 한다. 교생 실습을 나가기 위해 이 수업을 자꾸 빼먹게 되자 교수님이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번역해보라고 하셨고, 과제로 받은 것이라 재미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재미에 흠뻑 빠져서, 사랑하던 여인을 위해 생일선물로 직접 열심히 번역에 열을 올렸던 대학생때의 번역이라 하였다. 참, 그의 사연만으로도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대학 시절, 수업 과제로 혹은 논문을 위해 번역을 할 일이 있었지만 아주 짧은 시기였고, 거기에 흠뻑 빠질 만한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이 분의 사연은 유독 귓가에 남는다.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간 곰스크로 가는 기차

 

모든 끌림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는 몰랐다. 곰스크가 왜 그토록 절절하게 다가왔는지를.

돌이켜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내 삶의 메타포였다.

아니, 어떤 누구의 인생이라도 삶은 '곰스크로 가는 기차'와 비슷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해설 중에서.

 

이 소설의 작가인 프리츠 오르트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고 했다. 사실, 여기 실린 단편 8편 정도와 그 외에 장편 소설 정도가 있을 정도로 그가 남긴 작품은 많지 않아 더욱 그러할거라는 이야기였다. 작가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지지 않고, 단지 입소문에 의해 퍼지던 그소설이 어느 순간 tv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지고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했다 한다. 어떤 소설일까..

 

주인공인 나와 아내는 신혼여행으로 가진 돈 전부를 털어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곰스크에 대한 환상을 들어온 나의 인생 목표 자체는 바로 곰스크에서의 삶이었고, 곰스크 외의 그 어떤 삶도 꿈꿀 생각을 못하였다. 다만, 아내는 그런 내 생각에 반기를 들며 오히려 불안해하고, 곰스크로의 여행을 반기지 않았다. 중간에 잠시 정차했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아내는 비로소 활기를 되찾고, 식사도 맛있게 하였다. 그리고 잠깐 산책하는 동안 마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차, 기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나만 서두를뿐 아내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나를 붙잡는다.

 

하루에 한번 들른다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무정차로 그냥 지나칠 때도 많은 그런 작은 시골역이었다. 간신히 며칠만에 잡은 역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표는 무효라는 대답을 듣고, 미친듯이 돈을 모으기 시작하고, 아내는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채 이 곳에서의 삶에 익숙해진다. 나만 이방인처럼 겉돌뿐.

나를 위해 일주일을 일하고 받아왔다는 안락의자. 그런 아내에게 나는 화를 낸다. 돈으로 받아 기차 삯을 모아야하는거 아니냐고. 그런 나에게 아내는 서글픈 마음을 드러낸다.

 

돈을 다 모아 다시 떠날 기차표를 사고, 기차에 오르는 날 아내의 안락의자까지 실고 가겠다는 어이없는 제안에 나는 그저 허물어지듯 마을에 안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아내의 계획대로 마을의 선생님이 되어 아기를 가진아내와 따뜻함이 보장되는 집에서 살게 된다. 전임 선생님이었던 노인이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와 노인의 인생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꾸물거리며 주인공의 앞길을 막는 아내가 좀 답답하게도 느껴졌었다. 그러나 옮긴이의 말마따나 이 모든 것들이 다 비유적 장치일 뿐이다. 안정적인 삶을 꿈꾸는 아내, 그리고 이상향을 향해 날아가고픈 남편의 충돌은 어쩌면 누구나의 인생에서 있을 수 있는 그런 한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꼭 아내와 남편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내 안의 모습일지라도 두 가지 모습이 충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생의 의미를 가질지 아니면 망가질지는 오직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왜 직시하지 않는 거죠?" 57p 곰스크로 가는 기차

 

곰스크로 가더라도 딱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이와 아내까지 데리고 가서 새로이 삶을 살아간다는게 과연 지금의 삶보다 나은 삶인지는 주인공조차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아버지조차 평생 가보지 못했던 그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아들이 이어받아 자신 안의 환상으로 재 탄생시켰을뿐.. 처음에는 갑갑하게 느껴졌던 아내의 방해공작이 나중에는 쳇바퀴같은 삶만 산채 아내와 아이들을 등한시하는 남편의 모습에 묻혀 남편에게 되려 화가 났다.

 

등장하지 않는 고도를 평생 기다리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 작품 역시 연극으로 만들어지기 좋은 작품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나 역시도 들었다. 그보다는 훨씬 재미도 있겠지만 말이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서도 역시 곰스크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막연한 꿈을 가진 그가 사람들에게 물어도 약간은 뜨악한 반응만 돌아올뿐, 그곳이 어떻다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다. 전임 선생님 역시 어딘가, 그곳이 곰스크일지 아닐지 모를 곳을 꿈꾸던 젊은이 중의 하나였고, 그렇게 정착한 삶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고 그에게 말해줄 유일한 사람이기는 했다.

 

연이어 나온 소설 배는 북서쪽으로가 주는 느낌은 곰스크와 비슷하면서도 더 몽환적이었다.

가이드인 나도 도저히 기억이 안나는 목적지, 게다가 손님들은 모두 행선지가 달라 거의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수준이다. 선장 조차도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은채 혼자서 방에서 칩거하고, 목적지를 모르고 탄 유일한 사람, 존재를 알수없는 병약해보이는 소녀가 의외로 나와 연결이 될 수 있다는 묘한 결말만을 남긴채..소설은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양귀비, 럼주차 등의 소설도 참 느낌이 독특했다. 해설자가 너무나 따뜻한 작가의 소설들이라 평하는 것은, 소설 안에 있는 비유를 이제는 모두 이해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해설자 또한 자신만의 곰스크, 그리스로 떠나지 못하고, 묶여있는 안주한 삶이 마치 젊은 시절 그가 읽었던 이 소설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함을 암시하는 듯 하였는데, 나 또한 나만의 곰스크가 어디였는지 무엇이었는지를 회상하게 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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