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한 조선의 책 읽어주는 남자
이화경 지음 / 뿔(웅진)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읽고, 다시 읽는다.  "채제공" ,  "이옥" 을 등장시키는 이야기라서 읽는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들고 여기까지......

 

       이젠 그 바람과 그림자에 의지해 다음까지...... 아니 ......  끝까지.

 

 

 

 

 

 

199쪽.

'이야기는 허공에 의지해 그림자를 잡는 짓이고, 현실에 의지한
거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야기는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고, 거북에게 털을 구하고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이자 먼지
에 글을 새기고 그림자를 입으로 불어 흔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한마디로 뒤웅박을 찾고 바람을 잡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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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 기념성당.

       '새남터'는 억새와 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

       基)'라고도 한다.

 

        59쪽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

     형장이었던 곳이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들이 피를 뿌린 곳이며, 1801년

     부터 1866년까지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임금이 살고 있는 성안에서는 죄인을 처형하지 않는(피를 보지 않는) 법이었기 때문에 성

       밖으로 죄인을 끌고 나가 사형을 집행 하였으니 새남터를 비롯하여 서소문 밖과 양화나루의

       절두산 등이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처형 장소인 셈이었다. 절두산에서는 산봉우리에서

       죄인의 목을 쳐서 강물로 던져 버리니 시체 처리가 손쉬웠고, 새남터 역시 옛날엔 민가가 적

       고 나무가 울창한 곳인데다 넓은 모래밭이 있고 또 한강이 가까워 처형하고 뒤처리를 하는

       데 최적지었다.

                                                                                      서상요 / 한국교회사연구소

 

      

 

          성모상 옆이 지하의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기념관에는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의 역

       사를 전시했다. 특히 새남터 모래 사장에서 목이 베이는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양

       손은 뒤로 묶이고 귀는 긴 꼬챙이가 꽂히고 무릎 꿇은 채 끌려가는 장면이 생각난다. 양쪽

       귀에는 왜 꼬챙이를 꽂았을까? 잘못된 것을 들은 귀라고 그랬을까? 목을 치는 것보다 더 잔

       인하다.

 

          여기서 나오면 녹색의 한강철교가 보인다.

 

 

          58쪽.

 

         1900년 한강에 놓인 최초의 근대적 다리였던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퇴각하는

      군인들에 의해 폭파된 적이 있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 강을 건너는 상황에서 이

      루어진 성급한 폭파였고,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500명이 폭사하였다. 희

      생양이 필요했으므로 권력은 폭파의 책임자였던 공병감을 전쟁 기간에 처형했다.

      이 책임자는 사후 12년 뒤의 재심을 통해 무죄 판정을 받았다. 다리는 장소와 장소

      를 이어주기도 하지만, 장소와 장소를 단절시키는 참혹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                - 칼의 노래 / 김훈

 

 

          한강철교 다음 다리가 노들섬이 있는 한강대교이다. 한강에 놓인 다리들을 이렇게 가까이

        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건너보기로 한다 시작점에서 보니 대교 좌우에 '직녀까페'와 '견우

        까페'가 서 있다. 이름도 기가 막히게 지었다.

          다리 난간에는 유명한 운동선수, 연예인들의 이름과 함께 길게 뭔가를 적어 놓았다. 아마

        도 난간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적어 놓았나 보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9년부터 2013년 7월 말까지 5년간 한강 다리 가운데 마포대교(110명)에서

        자살시도가 가장 많았으며 한강대교(64명)가 두 번째라고 한다.

            

    

 

   

 

   

    

     '1부 오래된 망각편' 답사는 여기서 마친다. 용산역과 전자상가는 기회가 되면 가야겠다.

     너무 오래되서 잃어버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들, 새남터, 청파동, 효창공원, 한강철교...

     무언가 있겠지, 뭔가를 느낄 수 있을거야 하고 가보지만 기대만큼의 느낌은 아니다.

      그 장소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리석었다.

 

      12쪽.

 

       장소는 시간을 앞지르지 못한다. '장소는 시간의 몸을 입고 있으며 내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장소를 둘러싼 야이기는 완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이해를 받을 수도 없다.

    장소의 의미가 타오르던 극적인 순간은 결국 사라진다.

 

      어떤 호명에 의해서도 장소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장소는

     이름으로부터 초연하다. 하나의 고독한 시선이 장소를 발견했다고 해도 장소는 그의

     고독을 완성해주지 않는다. 장소는 시선보다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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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역은 이 도시에서 가장 초라하고 소박한 역의 하나일 거이다.

           '남영(南營)'이라는 이름은 서울 남쪽에 군영이 있다 하여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일본군

          병영의 흔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애기도 들린다. 전철 1호선 개통과 함께 세워진 이 역은

          철로의 다리 아래에 입구가 있다. 용산역과 서울역이라는 거대한 역 사이에 있는 이 역은

          마치 지방 소도시의 간이역을 연상시킨다. 역의 입구가 하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이 역

          은 거대 도시 속의 생뚱맞은 간이역처럼 보인다.  

 

       

 

       

    

          

          남영역. 개찰구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개찰구가 있기는 할까?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게 신기하다.

         

 

          남영역의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청파동 골목길은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 주거지역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며, 그 여파로 인해 아파

        트 단지 등으로 개발되지 않아 여러시대에 걸친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 전시장과 같다.

 

          한때 이곳이 일본인 고급 주택지의 하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숙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간판들이 무수히 붙어 있는 다세대죽택들 사이로 골목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겨져 있는 어두운 적산가옥들은 이곳이 청파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청파동' 동네 이름에 끌린다. 무슨 뜻일까? '靑 - 푸를 청, 坡 -  고개 파' 푸른 고개?

          푸른 고개? 있었나?

 

           청파(靑坡)란 이름은 한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푸른언덕````인데, 이 동이 연화봉(蓮花

          峰)이라는 푸른 야산에 위치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조선 세종대왕 때 명인인 청파 기건

          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청파동1가는 현재는 모두 주택가로 변했지만 과거

          에는 연화봉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연화봉은 산 모습이 연꽃 봉우리같이 생겨

          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는 목동산(牧童山)과 옻나무가 많아 생긴 옻나무골도 있었습니

          다. 서울역 남쪽의 역촌인 청파는 수륙교통의 연계소인 용산의 배후 취락이자 내륙으로

          이어지는 교통 상 요지였으며, "청파삼대불문지례"란 속설이 있을 정도로 역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 용산구청 홈페이지

 

           

        

 

        

 

            회화적 아름다움? 그림을 그려놓은 것같은 인위적인 아름다움?

            깨끗하다.

            골목을 타고 들어가면 저런 의외의 건물이 보인다. 만들어 놓은걸까?

            연꽃봉오리를 닮았다는 연화산.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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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전쟁터' - 효창공원

 

 

 1부 '오래된 망각'을 읽으면서 꼭 보고 싶었던 곳이 '효창공원'과 ''새남터기념성당'이었다. 왜?

    

    

 

      '이 곳은 조선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원래 명칭이 효창원이었으나   

    1940년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정책 차원에서 이름을 효창공원으로 격하하고 묘 자체도 고양 서

    삼릉으로 강제이장했다.
    
이후 백범 김구 선생이 독립투사였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

    생을 안장하고 자신도 사후 이곳에 묻힘으로써 애국지사 묘역으로 거듭났으나, 과거 정권을

    거치면서 효창운동장(1961년), 북한반공투사위령탑 및 어린이놀이터, 원효대사동상(1969년),

    노인회관 및 육영수 송덕비(1972년) 등의 시설물이 설치됐다.' 

                                                                                              연합뉴스 / 2007.5.18

 

 

  남영역에서 청파동을 지나 숙대 앞까지 걸었다. 숙대에서 왼쪽으로 효창공원이 있다. 공원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원효대사' 동상이다. 원효대사? 기사를 검색해보니 1969년 원효대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용산에 원효로라는 거리도 있네? 원효대사와 여기 무슨 인연이 있을까?

  원효대사 동상 옆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국악과 학생이 북을 치고 있다.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집중을 못하고 자꾸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걸 보니 아마 벌을 받는것 같다.

 

  거기에서 애국지사 묘역으로 내려왔다. 작은 연못, 쉽터, 정자, 꽃밭이 잘 정리되어 있다. 애국지사 묘역에서 망설이다 올라가서 묵념을 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비석을 세우지 못한 묘가 안중근 의사의 가묘이다. 넋이라도 고이 쉬시길 바란다.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몰랐다.

 

 

 

 

  묘역에서 내려오면 백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입구 정면의 동상이다.

  조용하다.

  도슨트 선생님께 설명을 듣는 고등학생들 몇 명 외엔 없다.

  2층에 전시된 검정 구두가 눈에 들어온다. 2층 복도 안쪽에서는 김구 선생님의 묘도 살짝 볼 수 있다. 

 

 

  기념관 아래가 바로 효창운동장이다.

    

         "이곳에 운동장이 세워진 것은 '아세아축구대회'를 계기로 1959년부터 이승만 정권

         이 추진한 것이며, 이때 애국지사 묘소의 이장에 대한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며, 결국

         묘소는 유지하고 운동장은 세워지는 결과를 빝었다. 효창운동장은 1960년 학생혁명

         이 일어난 그해,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과 연못을 사라지게 하고 세워졌다. 운동장은

         애국지사들의 무덤 옆에서 수없는 나무들의 죽음 위에서 건설되었다. "

 

 

         "18세기 왕족의 묘소에서 출발한 이곳은, 200여년 동안 외세와 집권 세력에 의해 끊

         임없이 그 장소의 의미를 두고 길고 긴 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장소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은 기억에 대한 투쟁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기억을 다시 세

         우는 일이지만 억압된 기억은 긴 우회를 거쳐 언젠가 유령의 얼굴로 귀환한다."

 

 

      마지막 '언젠가는 유령의 얼굴로 귀환한다.'는 말이 울린다. 우리가 이 귀환한 유령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닌지......발길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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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노래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67년 이 지역에 입체교차로가 세워진 후였다.

        이 입체교차로는 27년 동안 이 자리에 있다가 1994년 헐리게 된다.

 

          이 거리를 상징하던 건축물이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거대한 입체교차로는 이 거리

        의 보도블록의 작은 얼룩처럼 처음부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노래를 남기고 달아간다는 것은 친절하고도 가혹한 일이다. 노래는 그의 부재를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그가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노래는 침묵의 언어,

        너의 또다른 침묵이다.

 

 

          시골장터나 고속도로 휴게소 쯤이었다면 '돌아가는 삼각지' 가 계속 흘러나오지 않았을

         까? 박달재를 넘는데 "울고넘는 박달재'가 계속 들렸던것처럼.

 

         '삼각지고가로 올라가는 위태로운 육교'가 궁금했다. 일단 지하철역에에서 나와 전쟁기념

        관 앞으로 간다. 여기가 기념관 정문인지 후문인지 모르겠다. 보초를 서는 병사와 전쟁기념

        관이라는 글자만 보일 뿐이다. 신호등을 건너니 오른쪽은 기다란 담장, 왼쪽은 주상복합,

        정면으로는 가림막이 보일뿐, 고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기찻길을 찾자. 때마침

        기차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정면의 가림막 뒤가 기찻길인가보다.

          키가 자그마한 할머니가 개를 앞세우고 가신다. 머리는 쪽진 머리처럼 동그랗게 올리고,

        파란색 슬리퍼에 펄럭이는 얇은 바지, 박스티의 소매가 팔꿈치를 덮고 있다. 기찻길옆 작은

        지붕에 살고 계실 것 같은 외국인 할머니. 

          가림막까지 와서 우회전하자 고가의 오르막이 보인다. 고가가 시작되는 곳으로 와서 육교

        를 찾았다.

        

 

 

 

     허물어진 교회 때문인지 낡은 육교가  위태

    롭게보인다. 계단도 많다.

     

      허공을 향해 올라가는 것 같은 가파른 계단.

    그런 위태로운 육교를 걸어간 적이 있을 것

    다. 그 시간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오랜 후

    에 알게 된다. 매 순간의 위태로움에 대해

    지 못하다가, 어느날 내게 들이 닥쳤던 위험

     한 시간들을 한꺼번에 마주하게 될 때.

     

    

         

 

 

 

 

 

 

 

 

 

  육교에 올라서니 기찻길이 훤히 보인다.

  오막살이 옆의 기찻길이 아닌 높은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찻길에는 어떤 그리움이 있을까?

 

 

 

   

 

  

  

 

    

 

   육교를 다시 내려오니 낡은 식당들이 보인다.

                                                              

 

 

 

  

 

 

    

 

 

      

 

      이 거리의 밥집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를테면 '기찻길 왕갈비' 같은 이름이

    어울리겠지만, 네거리의 한강집에대해서

    도 말해야 한다. 생태탕과 목살, 자랑스럽

    게 단 두 가지의 메뉴만 있는집. 언젠가

    누군가와 마주앉았던 집. 한 냄비의 음식

    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날들의 온전한 따

    뜻함. 다시 그 집을 같은 얼굴로 찾아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

    이다.

 

 

 

 

 

 

 

 

    

      이 밥집 앞이 교차로다. 여기서 20년 전에 사라진 교차로를 상상했지만 감이 안잡힌다. 지하

    철 역사가 아니라 지하철 입구에 알림판을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싶다.

      교차로에서 정면으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가깝구나.

      처음 가는 곳마다 느끼는건 지도나 설명에 비해 좁다는 거다. 좀 걸리겠구나 하고 예상하고

    가면 의외로 가까운 곳이 많다. 길을 헤매지 않으려고 시간을 넉넉히 잡고 가면 시간이 많이

    남는 다. 그걸 알면서도 매번 긴장하며 일찍 나온다. 그런데 삼각지는 두리번 거리는 시간이

    많았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니 첫눈에 보이는건 '초코파이'를 만드는 회사 간판이 아니라 '산

    도'를 만드는 회사 간판이었다. 엥?  맞겠지뭐 하며 길을 찾다가 고가 밑에서 회사 로고를 보고

    씨익 웃었다.

       점심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대라 거리에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그런데

    하루 중 어느 시간대라도 여긴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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