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노래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67년 이 지역에 입체교차로가 세워진 후였다.
이 입체교차로는 27년 동안 이 자리에 있다가 1994년 헐리게 된다.
이 거리를 상징하던 건축물이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거대한 입체교차로는 이 거리
의 보도블록의 작은 얼룩처럼 처음부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노래를 남기고 달아간다는 것은 친절하고도 가혹한 일이다. 노래는 그의 부재를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그가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노래는 침묵의 언어,
너의 또다른 침묵이다.
시골장터나 고속도로 휴게소 쯤이었다면 '돌아가는 삼각지' 가 계속 흘러나오지 않았을
까? 박달재를 넘는데 "울고넘는 박달재'가 계속 들렸던것처럼.
'삼각지고가로 올라가는 위태로운 육교'가 궁금했다. 일단 지하철역에에서 나와 전쟁기념
관 앞으로 간다. 여기가 기념관 정문인지 후문인지 모르겠다. 보초를 서는 병사와 전쟁기념
관이라는 글자만 보일 뿐이다. 신호등을 건너니 오른쪽은 기다란 담장, 왼쪽은 주상복합,
정면으로는 가림막이 보일뿐, 고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기찻길을 찾자. 때마침
기차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정면의 가림막 뒤가 기찻길인가보다.
키가 자그마한 할머니가 개를 앞세우고 가신다. 머리는 쪽진 머리처럼 동그랗게 올리고,
파란색 슬리퍼에 펄럭이는 얇은 바지, 박스티의 소매가 팔꿈치를 덮고 있다. 기찻길옆 작은
지붕에 살고 계실 것 같은 외국인 할머니.
가림막까지 와서 우회전하자 고가의 오르막이 보인다. 고가가 시작되는 곳으로 와서 육교
를 찾았다.

허물어진 교회 때문인지 낡은 육교가 위태
롭게보인다. 계단도 많다.
허공을 향해 올라가는 것 같은 가파른 계단.
그런 위태로운 육교를 걸어간 적이 있을 것이
다. 그 시간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오랜 후
에 알게 된다. 매 순간의 위태로움에 대해 알
지 못하다가, 어느날 내게 들이 닥쳤던 위험
한 시간들을 한꺼번에 마주하게 될 때.

육교에 올라서니 기찻길이 훤히 보인다.
오막살이 옆의 기찻길이 아닌 높은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찻길에는 어떤 그리움이 있을까?
육교를 다시 내려오니 낡은 식당들이 보인다.
이 거리의 밥집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를테면 '기찻길 왕갈비' 같은 이름이
어울리겠지만, 네거리의 한강집에대해서
도 말해야 한다. 생태탕과 목살, 자랑스럽
게 단 두 가지의 메뉴만 있는집. 언젠가
누군가와 마주앉았던 집. 한 냄비의 음식
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날들의 온전한 따
뜻함. 다시 그 집을 같은 얼굴로 찾아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
이다.
이 밥집 앞이 교차로다. 여기서 20년 전에 사라진 교차로를 상상했지만 감이 안잡힌다. 지하
철 역사가 아니라 지하철 입구에 알림판을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싶다.
교차로에서 정면으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가깝구나.
처음 가는 곳마다 느끼는건 지도나 설명에 비해 좁다는 거다. 좀 걸리겠구나 하고 예상하고
가면 의외로 가까운 곳이 많다. 길을 헤매지 않으려고 시간을 넉넉히 잡고 가면 시간이 많이
남는 다. 그걸 알면서도 매번 긴장하며 일찍 나온다. 그런데 삼각지는 두리번 거리는 시간이
많았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니 첫눈에 보이는건 '초코파이'를 만드는 회사 간판이 아니라 '산
도'를 만드는 회사 간판이었다. 엥? 맞겠지뭐 하며 길을 찾다가 고가 밑에서 회사 로고를 보고
씨익 웃었다.
점심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대라 거리에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그런데
하루 중 어느 시간대라도 여긴 그럴 것 같다.